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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특집/오늘의 시인/주병율/너무 늦은 시간 외 4편/신작시/안개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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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오늘의 시인
주병율
<자선 대표시>
너무 늦은 시간
용서하게
겨울 하늘을 무연憮緣히 휘날리는 하얀 눈들을 용서하게
사랑을 잃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너에게 전화를 하는 나도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 앞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낡은 포장마차 안 과수댁이 쳐주는 소주잔으로 앉아서
힘이 든다고, 힘이 든다고 말하는 이 미친 겨울바람도 용서하게
살다보면 때로는 저렇게 굽은 느티나무 등걸 위에 손을 올려놓고도
가끔씩 서로가 따뜻해지는 날이 있다고
대낮부터 불콰하게 젖어서 눈밭에 붉게 갈대로 눕는 과수댁도 용서하게
십 년을 혼자 모질게 버티고도 아직 굽은 마음이 있어서
검게 갯벌로 흐르는 저 진눈깨비 같은 눈물도 용서하게
만경灣景이 만경晩景으로 맺혀서 불덩어리로 눕던 바다
나는 아직 그 바다의 만경晩景을 마저 건너지 못하고
작은 등 하나 기댈 곳 없이 사락거리며 눈이 내리는 저녁
굽은 등으로 누워서 잠들 수 없었던 밤도 용서하게
갈 곳도 없이 헤매던 너의 지난밤도 다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 앞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사랑을 잃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아직도 무연憮緣히 휘날리며 붉은 눈발이 되어 내리는 나에게
너무 늦게 도착하던 시간도 용서하게
짧은 유서도 끝내지 못하고
사랑한 마음을 용서하게
이 추운 겨울을 용서하게
빙어
달밤이었다.
화톳불이 타고 있었다.
겨울 무덤 주위에선 가랑잎 한 장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검게 숯이 되고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당나귀처럼 어둔 산맥을 넘어갔다.
얼음이 벤 돌들이 오래도록 강물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어디선가 쩔렁거리며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없이 저문 산맥을 넘어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시간의 뼈
그 냉기의 뼈를 바르며 빙어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내 건너지 못한 언 강물을 거스르며
자신들의 생애에 대해, 시간에 대해, 죽음에 대해 골똘해져 있었다.
더는 외롭지 않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한 방울의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졌다.
달밤이었다.
강물 속에선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데 한 무더기의 억새가 흔들리고 있었다.*
발목이 가는 빙어의 옆구리가 물살에 흔들릴 때마다
달빛은 얼음 속에서 하얗게 깊어갔다.
*김춘수, 「뭉크의 두 폭의 그림」 중에서
머위
마당에서 머위를 키우기 시작한 지도 삼 년이 지났다
무엇을 키우고 기르며 산다는 세월이란
헝클어진 솜털뭉치와 같아서
내가 사연 많은 그의 시간이 된다는 것인데
가끔씩 황호색비단벌레가 울음을 우는 밤이면
한 뼘 머위대의 가는 허리가 더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의 눈빛은 주검을 바라볼 때처럼 깊어져서
성긴 울음의 빈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곤 하였다
그로부터 시간은 비늘처럼 생긴 포苞들에 싸인 꽃대 위에서
하나하나의 꽃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한때는 꽃의 부드러운 손에 들렸던 밀서 같은 비밀에 기대어 나도
장식의 말발굽 아래 새긴 헛된 요령을 흔들며
저 울음의 내력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말도 모른 채
내 마른기침의 내력을 용서하기만 하였다
머지않아 무연히 닥칠 부음처럼 바람은 차고
마당에서 황호색비단벌레의 울음도 잦아질 것인데
밤마다 머위의 어둔 물관을 들추면
단사丹砂로 맺혀 거기 속이 까맣게 타버린 비바람도
눈보라도 있었다
오후의 잠
오후에는 잤다.
법이고
규칙이고
생활이고
아이
마누라
밥통
시달림
죽은 꽃
나발이고 잊고
잤다.
지하실과
시멘트와
벽과
피뢰침이 꽂힌 옥상을
옥상에서 쏟아지던 햇볕을 잊기 위해
흐린 기억을 끼고 잤다.
이제 희망 따위는 없다.
기다림과 외로움과
슬픔 따위도 없다.
문학도 없고
시간도 없다.
술에 취한 정신병자도 없다.
파계와
구원과
지옥 천당도 없고
열반도 없다.
집과 네모난 방과
벽에 박힌 못과
바퀴벌레와
흔들리는 옷걸이를 잊고
백치같은 해는 종일을 타는데
더 이상 시들지 않기 위해
오후에는
잤다.
간다는 것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뒷목에 까슬거리며 달라붙은
먼지도 탈탈 털어버리고
가방도 버리도
구두도 버린다는 것
오전 10시에 죄다 닫혀버린 대문과 창문을
대낮에 남아서 빈둥거리는 먼지와 햇빛을
버리고
잊는다는 것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서
분별도 없이 웃자란 자신을
비워간다는 것
서른 지나 마흔을
삿된 마음을
버린다는 것
길이 없는 밤에도
타박타박 말없이
또 하나 길이 된다는 것
말言들의 집
어머니는 내가 떠나는 길 위에 행운을 기원하며
아들의 이름을 적은 소지를 하늘에 걸어 놓는다
어머니는 너는 생각으로 죄가 많은 자이니 늘 현자들의 기도문을 외우며
무릇 불과 비, 바람의 움직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가 밟고 선 이 땅은 네 것이 아니라
영혼이 맑은 자들의 것이다고 생각한다
너는 생각으로 죄가 많은 자이니 땅을 소유할 수 없고
땅 위에 지팡이를 꽂을 수 없고
네 죄의 무게가 너를 지탱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지면
얼음이 깨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울의 눈보라를 헤집으며 먹이를 찾아 지친 새 떼들이 돌아 올 때 마다
가을에 거둔 곡식을 던지며 어머니는 점을 친다
그 때마다 신은 결코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저녁은 달과 어둠의 신이 지배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혼들이 이 땅 위를 가득 채우고
물과 풀, 짐승에게도 죽은 자들의 영혼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온통 살아 있는 것들이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겨울 주변엔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데
너는 생각으로 죄가 많은 자이니
멀리까지 보기 위해 언덕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지라도 그것을 찾을 때까지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눈보라 주변에는 늑대와 이리
늑대가 나를 먹고 이리가 먹고
종내는 늑대와 이리를 내가 먹었다고 생각한다
늑대와 이리의 입으로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너는 생각으로 죄가 많은 자이니 내가 말을 하면 남자들이 먼저 먹히고 뒤이어 여자들과 아이들이 먹힌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하는 말들을 상자에 넣어둔다
말들의 입, 말들의 귀, 말들의 눈
그것들을 상자에 넣어두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들이 어머니에게 경배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 때문이다
생각으로 죄가 많은 집
내 죄의 움막에도 겨울이 가고 몇 주에 한 번씩은 비가 내린다
사방에 흩어진 먼지들을 몰아오고
거센바람
현자들의 지붕 밑에도
특별히 말과 생각들을 찾아 볼 수 없는데
당신은 무게를 느끼지 못한 듯 한없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신작시>
안개
안개가 내리는 밤이었다.
포구를 빠져나온 소금기들은 바람을 타고
저녁 종소리처럼 낮게 퍼져갔다.
사람들은 제방 아래 모여 한 손에는 바다를 들고
한 손으론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눈을 뜨면 죽음의 그림자들이
벚나무 꽃잎을 얇게 두드려 펴서 뉘인 듯
먼 바다의 수면 위로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하얗게 쓸쓸해졌다.
제방 아래는 갯것들이 버려지고
선창의 우묵한 밑바닥은 모두 무덤인데
저렇게 안개가 많은 곳에서 바다에 반 쯤 묻힌
어린 새들의 작은 귀에는
아직도 소금기가 많은 물소리가 가득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
낮은 휘파람 소리도 없이
바다는 늙어서 어린 바다로 새로 돋아나고
지금 내 몸을 버릴 듯이 안개는
제방 아래로 자꾸만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은방울꽃이 피는 아침
누군가 밤 사이 수곽의 모서리에 은방울꽃 한 무더기를 심어 놓았다 햇볕이 들자 꽃들은 일제히 은색의 방울을 흔들며 모천을 찾아가는 은어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꽃들은 자신이 진짜 은어라도 된다는 듯이 부산스럽게 수련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어린 물풀의 옆구리를 심하게 흔들어 놓기도 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소리를 지르다가 모자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햇볕에 발목이 붉어진 꽃들도 있었다 몽환에 시달리는 이들이 그러하듯 그들 중 몇은 햇볕과 바람을 따라서 집을 나가기도 했다 순간순간 하늘은 변하고 푸른 이끼와 붉은 물방개의 둥지를, 햇볕은 다시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었다 그때마다 꽃들은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자신의 모습을 서로의 거울에 비추고 있는 것처럼 물살을 발끝으로 느끼며 서로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넣어 짤랑거리는 은방울 하나씩 달아주고 있었다 누군가 밤 사이 수곽의 모서리에 은방울꽃 한 무더기를 심어 놓고 간 아침, 그렇다. 나는 지난 밤. 죽음이 차가운 손가락으로 사자의 눈을 감기며 지나갔던 내 낡은 책방을 뒤져보지만 수런거리는 저 존재들의 발자국들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신기루
―굴참나무 잎
새들도 해가 지면 두루 들어감에 들어가게 되니 굴참나무도 숲에 들어가고 어두워지는 숲도 굴참나무 잎에 들어가며, 굴참나무 잎은 한 산에 들어가고 한 산이 모든 산에 들어가며, 모든 산들이 한 산에 들어가고 한 산은 바람의 처소에 들어가며, 바람의 처소는 바람의 처소 아닌 곳에 들어가고 바람의 처소 아닌 곳은 말할 수 없는 곳에 들어가며, 말할 수 없는 곳은 한 꽃잎에 들어가고 한 꽃잎은 한 음성과 언어에 들어가고 한 음성과 언어는 눈으로 들어가며, 눈으로 들어 간 음성과 언어는 귀에서 일어나고, 귀에서 일어난 음성과 언어는 코로 들어가 혀에서 일어나며, 혀에서 일어난 한 음성과 언어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지고 다시 티끌 속으로 들어가며, 티끌 속에는 또 한 티끌이 들어가 해가 지면 새들도, 산도, 바람도, 모두 두루 들어감에 들어가게 되니 어두워지는 한 티끌이 일체 굴참나무 잎으로 들어간다.
<시작메모>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농부의 신발에 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신발의 푹 파인 안쪽이 희미하게 어둡게 보이는데, 거기에 일한 자의 걸음걸이의 피곤함이 묻어 있다. 난폭한 바람이 마주 불어오는 들판의 밭에 널리 뻗어 있는 이랑들을 지나서 터벅터벅 느리게 걷는 걸음걸이의 강인함이 그 신발의 무게에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신발의 가죽에는 땅의 축축함과 그 땅을 함뿍 머금은 모습이 배어있다. 그 신발 밑창 아래에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을 통하여 풍겨오는 들길의 고독이 묻어나고 있다. 그 신발에는 대지의 고요한 부름, 대지가 나누어준 익어가는 곡식과 겨울 밭의 황량한 휴한지 속에서 말하기 어려운 거절들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신발을 통하여 빵의 안전한 확보를 위하여 울지 않는 두려움, 가난에서 살아남은 말할 수 없는 기쁨, 탄생의 도래가 주는 떨림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의 전율이 지나가고 있다. 이 신발은 대지에 속하고 농부의 아내의 세상에서 그것이 보호되고 있다. 이렇게 보호와 귀속으로부터 그 신발 자체는 자기 자신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농부의 신발에 관하여 하이데거가 단순히 신발이라는 도구의 도구적 존재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 신발이 지닌 유용성과 신뢰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농부의 신발의 존재는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도구적 신발의 기술이나 해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그 신발의 제작 과정에 관한 보고를 통하여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저 농부의 신발과 같은 예술 작품이 갖는 본질을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 작품 속으로 착석함’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존재를 계시하고, 예술 작품 속에서 그런 계시가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생각은 예술 작품이 존재의 진리와 직결된다는 사유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술 작품이 계시하는 진리는 그 작품을 대상화해서 표상하는 진리일 수 없다. 그런 표상적 사고는 이미 작품의 존재를 사유하는 태도가 아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작품을 통하여 어떻게 생기하고 있는가를 깨닫는 태도와 관련된다. 예술가가 진리를 표상해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계시하고 있는 생기를 깨닫는 것이 곧 예술의 진리를 이해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존재와 존재자, 곧 사물 그 자체를 엄격히 구분할 것을 주장하면서 시인이 시작을 하는 행위도 존재의 진리를 묻는 철학가의 본질적 사유와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철학가의 임무인 존재의 사유와 시인의 시작의 시작은 존재를 ‘이끌어 냄’이란 뜻의, 같은 어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진리를 현시하고 수립하는 공동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시인에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언어다. 언어는 존재 이해의 방법론적 통로다. 그에게 문학은 존재의 드러냄이고, 이 존재는 존재자와 대립되면서 매우 신비스러운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의 미학은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에 근거를 둔 ‘형이상학’적 미학이 된다. 그의 시론은 “언어가 말한다.” “언어가 존재를 말한다.” “언어는 세계와 사물로서의 존재를 말한다.”로 집약된다. 그에게 있어서 사유의 본질로서의 존재란 본질적이며 근원적인 것, 비밀에 가득 찬 형이상학적 힘이며 일종의 은폐된 신이다. 존재의 이런 신비적인 면은 그의 존재의 현상학에 미리 약속된 것이다. 여기서 “언어가 말한다.”라는 신비주의적 명제가 당연히 탄생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한 시인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말한다. 그에게 시인은 이차적 의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인은 존재를 수용하는 하나의 통로이며 매개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시인을 부리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인 신에 접신되었을 때 시가 탄생되므로 시는 시인의 주관이나 개인적 정황과는 무관하다. 시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유 세계에서 말은 인간이 쓰는 의사전달의 도구가 아니다. 말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따라서 인간이 그 말을 만든 창조자가 아니다. 반대로 말이 인간의 주인이라는 사유를 하이데거는 견지하고 있다. 언어로서의 말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고 인간이 말의 존재에 의해 사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말의 본질과 존재의 본질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바람이나 의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말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저서 『형이상학 입문』 27절에 「존재의 이해가 없이는 말하기가 없고, 말하기가 없이는 인간존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하나의 말하는 자로 존재하고 있음이라 불리워진다. 그래서 인간은 긍정과 부정을 말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본질의 근거에서 하나의 말하는 자이고, 말하는 그 자체이다. 이것이 그의 특성이고 동시에 그의 번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 존재가 하나의 말하는 자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말이다. 말의 기원은 신비로 남아 있다. 신비의 특성은 말의 근원의 본질에 귀속한다. 이것은 인간이 존재에로 들어가는 출발에서 아주 강력한 것과 스산한 것에서부터 말이 시원하였음을 뜻한다. 이런 출발에서 말은 존재가 말이 되는 깨달음의 시였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 사물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존재를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 하는 것은 모든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고민들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적세계를 바탕으로 사물이 지니고 있는 실체적 표상 저 너머에서 존재하는 본질적 세계를 구체적 대상을 통해 구현하고 제시하기 위해 그 대상의 근원적인 세계와 동일성의 획득을 위해 고민한다. 관념과 사물은 그때에서야 그 시인을 통해 스스로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는 사물이며 동시에 언어이며 그는 존재고 동시에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회가 그 사회를 질서 있게 그리고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만든 질서, 즉 언어의 체계란 그 지시적 기능에 의해서 점차로 의미가 간직하고 있는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 보일 때 모순과 갈등의 극복은 온전히 시인의 몫이 된다. 시는 감각의 대상인 사물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말한다. 언어는 사물이다. 사물은 존재를 말한다고 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인식은 시인의 존재 구현의 의지와 일치한다. 사물이 내포한 존재성의 구현이란 의식의 언어로서는 포착하지 못한다. 존재는 언제나 신기루와 같이 나타났다가 우리가 의식으로 다가가면 그것은 무한의 영역 속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존재를 존재로서 사유하는 본질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와 존재와의 사이에 리사무애의 차연이 성립하듯이, 우리 앞에 현존하는 그 어떤 것을 인식하는 그 순간, 우리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사물을 인지한다고 말할 때 사실 우리는 그 이미지 혹은 사물의 외면을 둘러싸고 있는 그리하여 정확히 그곳으로 들어가 그것을 인지하려는 것을 막고 있는 언어를 만난다. 이때 만나는 언어는 비실재성의 언어다. 사물들이 드러내는 존재는 시인들의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우리 주위에 있을 따름인 모든 것을 지향하며 부재 속에서 언어들은 구현되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그 사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시인은 서성거리고 있다. 그것이 시인의 삶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서성거리고 끊임없이 사물들과 내통하기를 염원하며 호시탐탐 사물들의 말을 훔친다. 그들의 의식은 잠들기를 거부하고 흔들리고 침묵한다. 카뮈는 예술적 창조를 가리켜 천지창조의 산화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미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변모시킨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물의 이 포착하기 어려운 존재를 바탕으로 예술적 방법을 통해 현시적·정신적 의미의 새로운 세계를 재구성함을 뜻한다. 존재와 존재자-형태를 갖지 않은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은 방황한다. 그것이 시다.
참고도서
김형효,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청계, 2002)
김현,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문학과 지성, 1991)
김화영, 『문학 상상력의 연구』(문학동네, 1998)
김준오, 『시론』(삼지원,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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