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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추모특집/랑승만/병상시 너무 늦은 시간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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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랑승만
<병상시>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너는 가을잎으로 가버렸다.
안개꽃의 향기를 남기고
너는 가버렸다.
이제 너는 내 가슴에
그림자로만 남아 있구나.
너는―.
바람 부는 날은
내가 너에게로 간다.
나의 고향이던
너에게로 간다.
너는 내 가슴에 그림자로 남아서
아픔을 주는 것은
이 가을에
바람이 불기 때문인가보다.
바람이 부는 날은
네가 안개꽃으로 오던
골목길을 내려다 보느니
너는 오지 않고 바람만 분다.
너는 오지 않고
나무잎만 날린다.
바람이 되어간 얼굴.
어디선가 작은 기침소리.
바람 속에 너의 이름을 그린다.
가을 잎으로 너를 만난다.
바람 속에 너를 만난다.
바람 부는 날은
가을잎 하나도 그리워진다.
너의 발자욱 소리는
바람 속에 지워지고
눈물나게 잡아 본
하아얀 손목 하나.
이 가을 저녁 아픈 바람만 분다.
바람 부는 날은
너는 없는 너에게로 간다.
바람 부는 날은
너가 없는 너에게로 가면
가을꽃 향기로 너는 돌아오는가.
바람 부는 날
나무잎은 떨어져 내리고
잃어버린 추억으로
떨어져 내리고
먼 물기슭 쪽에
노을로 내리는
너의 작은 얼굴.
무상無常
불어대니까
바람인 줄을 알지
물결을 쳐대니
파도인 줄을 알지
활활 타오르니
불인 줄 알지
주검이 묻혀
흙으로 돌아가노니……
흙이었다가
물이었다가
불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다시 흙이었다가
흙으로 돌아가노니…….
꽃잎이었겠지
너와 나는
그렇게 어깨 한 번 맞춘
이슬 같은 꽃잎이었겠지.
나뭇잎의 노래
나를 잊게 하여 주십시요
그리고 당신을 잊게 하여 주십시요
저 내 영혼 속에 흐르는
당신의 목소리
이 낙엽을 잊게 하여 주십시요
무척이도 우주롭던 그 그늘이
이 시간 무슨 빛깔로
저물어가고 있습니까 나무여
이제 돌아가
아무 곳에도 열매 지을 수 없는
별리別離의 뒷자리를 위하여
모두 다 잊게 하여주십시요
마지막 당신의 그 뜨거운 몸짓이
크낙한 파도로 흔들린 다음
모두가 한 덩이 푸르름으로 지쳐버렸을 때
당신의 뿌리 밑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다는 것을
모두모두 다 잊게하여 주십시요
어느날엔가 가을벌레의
노래처럼
부서져간 나의 얼굴이
당신의 뿌리 밑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다는 것을
모두모두 다 잊게하여 주십시요
달무리
달무리 뜨면
복사꽃 피지
달무리 지면
복사꽃 지지
어느 날 다시 달무리 뜨나
어느 날 다시 복사꽃 피나
사랑이 가면
추억도 가고
사랑이 지면
눈물만 남아
어느 날 다시 달무리 뜨나
어느 날 다시 복사꽃 피나
맥주麥酒
그것의 이미지는
거품이라는 의미이다.
방울방울 떠오르는
영롱한 파도 속에
목마른 투신投身을
나는 그 눈망울과 함께
감행한다.
그것의 세계는
온통 나의 신혼身魂을
목욕시키고, 그 구름빛의
눈망울을 사랑하게 한다.
풋풋한 계절의 과실처럼
영글은 나신裸身속을 파고 들며
손바닥에 지구를 놓고
공치기를 하면……
풍덩풍덩
나는 거품의
의미 속에서
끝없는 항해를 한다.
거품의 해일을 빨아대며
끝없는 여름의 뱃길을 간다.
그 겨울의 눈길
누군가 거기 나무등걸에 기대어
피맺힌 울음을 토하고 가셨을
벌거벗은 나무들 서 있는
하아얀 눈밭
그 겨울엔 삼동을 눈만 내리고
그 겨울엔 이별의 이야기만 자욱했는지……
누구의 발자국인가
어느 설운 님의
한 맺힌 발자국인가
다소곳이 고개 떨구고 가셨을
옷고름 적시며
눈물 떨구고 가셨을
하아얀 발자국마다
서러운 발자국마다
눈물자국으로 찍혔으니
얼마나 가슴 아프셨기에
저리도 자국마다
가슴 패이듯 찍혔느니
그 땅엔 사랑도 할 줄 모르는
가슴 추운 사람들만 살았는지……
봄이 오걸랑 떠나갔던 사람들 모이듯
다시들 오셔서
따뜻한 사랑 이야기들 피우고 사시면
아니 좋을까
발자국마다 눈발자국마다
서리고 서린 하아얀 아픔
하아얗게 하아얗게 서린
아픈 사랑의 자욱이여!
죽어서 피운 꽃
들끓는 태양太陽의 열기熱氣이다가
한 줄기 부활復活의 난향蘭香으로 피어 올라
부끄런 우리들 살려 놓고
너만 죽어서 꽃이 되었구나.
유형流刑의 시詩
―유형의 꽃잎들
구름밭에서라도 풀잎 이끼 풋풋할
이 초여름날에도
아니 초여름날로 옷을 바꾸는
별리別離의 준비를 서두르는
이 늦봄날의 저녁 바람에도
서러운 이들의 가슴속으로는
쓸쓸하디 쓸쓸한
떠나지 못한 겨울 바람은 인다.
초여름날에도 가슴으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그 바람에 섞여 흘러가며
유형流刑을 당하는 꽃잎들.
유형流刑을 당하는 꽃잎들.
진달래빛으로 울어
가슴을 뚫고 그 꽃 한 송이
꽂으면
세상은 온통 자비로 가득해지는가.
초여름날에도 가슴으로 밀물쳐 오는
별리別離를 준비하는 겨울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
여름날에도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유형을 당하는 꽃잎들…….
빙벽의 가슴에서 떨어져 내리는
유형 당한 꽃잎들이여…….
비극의 새
새는 나뭇가지에서만 울지 않는다
심근心筋이 풀어진
앙상한 심장 속에서도
한 마리 새는 끊임없이 운다.
총탄이 뚫고 간
내안內岸의 피벽皮壁에서도
끝없이 날개를 치며
피리가 되지 않는,
모어母語를 잃어버린 울음을 운다.
뿌우연한 풀밭을 가로질러 나는
한 마리 새의 그림자는, 빈한貧寒이 낙수짓는,
추녀 끝에서 밤새껏 울어대고
그래서 신이 주신, 마침내 평화의 울음 소리로
펑 뚫린 내벽과 갈라진 심장 속에서
저녁 잠기는 추녀 끝에서
저 높은 하늘의 계층階層에서 낙하하는
지순至純의 음악 소리로―.
들려와, 소나기 맞는
축축한 초록의
입김으로 물들게 한다.
뜨거운 입김으로―.
한 마리 새는 나뭇가지에서, 잃어버린
계층階層에서
풀밭에서 울다가
구름 속에서 울다가
저녁 깃 접는
슬픈 머릿 속에서 운다.
미명未明의 신앙信仰
1
밖은 기나긴 패연沛然의 소리를 전달傳達하는
창窓의 밤입니다.
내 안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그런 세월歲月의 수억數億의 밤이
겉으로만 흘렀던 저 심원深源한 강물의
기다림 같은,
한낱 보이지 않는 과실果實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는, 굳게 안으로 푸르르게 닫혀 있을
바위 속의 가장 뜨거운 눈물 같은, 그것이
언제이고 그 겹겹이 어둠을 뚫고
솟아나는 폭포瀑布의
시원始原임을 또한 잊지 않습니다.
2
무엇으로 가벼이 이름지을 수 없는 당신 앞의 암흑暗黑을
나도 하나 넘치게 담고,
오직 풀잎처럼 성장成長을 발원發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당신과 나의 새벽을
가장 아득한 지평地坪에서부터
예상豫想하고 있습니다.
열리지 않은 미명未明의 바람 속에서 꽃망울은
더욱 안으로부터 열려질 일이 아닙니까.
한 겹 두 겹 열어 젖힌 가슴의 절정絶頂에
닿아
어느 아침 눈부실 일순一瞬의 발돋움으로
얼었던 뿌리여.
한 발자국 당신 앞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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