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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추모특집/최일화/피안의 세계로 날아간 영혼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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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
최일화
피안의 세계로 날아간 영혼의 새
―랑승만 시인 시문학 60년을 돌아보며
1. 시작하며
2016년 4월 28일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인천 연수구 한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84세의 시인이 영욕의 삶을 마감하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병고의 세월 36년을 훌훌 털어내고 피안의 세계로 날아갔다. 그가 그토록 그리던 김관식, 천상병을 비롯한 많은 문우들이 기다리는 곳을 찾아 날아갔다. 아니 부처님과 어머니의 곁으로 훨훨 날아갔다.
수만 명은 족히 된다는 문인들 중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하고 설령 그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얼른 찾아가 문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문인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잊혀진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 등단하여 19권의 시집을 내며 현역 시인으로 활동했으면서도 그는 문단에서 많이 잊혀져 살았다. 모두 그의 가난과 병고 때문이다.
수많은 시인이 쏟아져 나오는 작금의 문단현실에서 거동이 불편하여 어두컴컴한 골방에 유폐된 듯 살아가는 한 늙은 시인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질 사람은 많지 않다. 1980년 한국잡지협회 이사회에 참석한 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시인은 모든 사회생활을 접고 병석에서 투병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발병하기 전 두 권의 시집을 냈던 시인은 발병 이후 17권의 시집을 냈다. 기적 같은 일이다.
19권의 시집을 세상에 남기고 시인은 영혼의 새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날아갔다. 발병하기 전 부인과는 이미 헤어지고 어린 두 아들을 돌보며 살아온 삶이 어떠했으랴. 그를 지탱해준 것은 오로지 문학이었고 병고와 가난도, 절망도 희망도,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모두 문학으로 수렴되었다. 곁에서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분은 오로지 부처님이었다. 부처님께 귀의하여 그곳에 진리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 말씀에 귀의한 일생이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긴 병 앞엔 아내도 자식도 외면하고 만다는데 활동을 못하는 늙은 시인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 보살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들 반열에서 한국 시단을 떠맡았던 시인은 차츰 동료시인들과도 연락이 끊겼으니 그 비애와 고독이 어떠했을 것인가.
시인의 마지막 시집 『우주의 뜨락』엔 「먼저 떠난 바람소리」’ 5편의 연작시가 있다. 교유했던 10명의 시인들의 실명이 등장한다. 시인이 거명한 10명의 시인은 박재삼, 박봉우, 미당, 구상, 박남수 어르신, 전봉건, 이형기, 이한직, 김관식, 천상병 시인 등 제씨들이다. 모두 우리 문단의 보석 같은 분들 아닌가.
1980년 쓰러지기 전 시인은 주부생활, 삼성출판사 등에서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하고 한국잡지기자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순간 그는 모든 걸 잃고 반신불수가 되어 인천의 초라한 전세방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1985년 여름이었다. 나는 첫 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30대 중반부터 나는 다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 월간 문예지에 몇 차례 추천응모작을 보냈지만 소식이 없게 되자 자비를 들여서라도 시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에 나는 문학엔 문외한이었다. 시창작법이거나 시 창작 강의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고 인천에 문인협회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인천에 시인들이 있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 여성잡지를 보다가 랑승만 시인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시인의 투병기가 실렸고 그 분이 인천 숭의동에 산다는 것을 알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시집의 발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문밖 출입을 하던 때다. 어머니가 손수 만든 약주 한 병을 들고 찾아뵈었다. 반갑고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첫 시집의 발문을 받았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까지 거론하며 발문을 써주었다.
“이 시인에게 있어 미사여구나 겉 치례 같은 형용사 따위는 금물이겠다. 그렇다고 결코 아무렇게나 안이하게 다루어진 작품이라 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각박하고 냉엄한 현실(엄동)이라도 봄이 오는 자유를 노래하기 까지 커텐도 치고 난로도 피워 동장군의 횡포를 이겨내는 생활인의 슬기로운 자세를 일상의 생활어까지 구사하여 결코 거부감 느끼지 않게 따뜻하게 노래해주고 있다. 이 얼마나 정감어리고 재미있는 분위기의 작품이냐.”
선생님은 칭찬 일색이었다. 처음 중진 시인에게 칭찬 섞인 발문을 받고 나는 감격했었다. 선생님의 발문은 이어졌다.
“그는 이렇게 시를 쓰며, 신앙하며, 그가 바라보는, 꼭 그가 써야하는 소박한 시 정신 속에서 새로 탄생하는 것이다. 시의 엽록소인 서정성의 결핍으로 윤기를 잃어,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는 바삭바삭한 영양실조 된 시가 행세를 하는 우리 시단에서 이만큼 축축하고 끈끈한 정감 있는 시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칭찬을 하시던 선생님은 따끔한 충고를 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최일화 시인의 작업은 더 많이 험난하게 남아 있다. 더 말을 아끼고, 가다듬고, 에스프리의 값진 보배를 천착하여 보석처럼 빛나고 단단한 언어를 찾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끝 부분에 “이 깊은 가을에 이 시인을 발견하게 된 것을 1985년을 보내는 큰 감격과 기쁨이 아닐 수 없다.”고 격려를 해주셨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들어보는 시인의 격려 말씀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 발문이 실린 시집을 발간하고 시집을 들고 찾아뵈었더니 인천 문인협회 회원들 주소를 주시며 어느 회원에게는 ‘님’자를 붙이고 어느 회원에게는 ‘씨’자를 붙이고, 또 어느 회원에게는 ‘선생님’이라고 써서 시집을 발송하라는 충고의 말씀을 자상하게 일러 주셨다. 나는 그렇게 겉봉에 주소를 써서 인천문협 회원들에게 시집을 발송함으로써 문단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인천문협에 가입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선생님과의 인연은 30년 넘게 이어졌으나 막상 선생님 떠나시고 나니 새삼 얼마나 선생님께 무관심했는지 또 하나 회한이 되고 말았다.
2. 랑승만 시인의 시세게
1) 불교사상으로 무장된 시혼
시인은 자신의 처소를 조그만 암자처럼 꾸며놓고 ‘여천암’이라는 당호를 사용하곤 했다. 그만큼 불교에 심취해 있었고 불교의 진리에 따라 삶을 영위하며 문학작품을 집필했다. 1970년에 펴낸 첫 시집 『사계의 노래』에도 1978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 『북녘바람의 귀순』에도 불교적 색채의 시는 보이지 않는다. 1981년 펴낸 세 번째 펴낸 시집 『우수제』에 불교적 색채의 시가 여러 편 등장하는데 「연꽃」, 「여름불경·1」, 「여름불경·2」등 일련의 작품이다. 이후 불교사상은 그의 시와 혼연일체가 되어 작품 속에 구현된다. 2015년 펴낸 마지막 시집의 제 1부에 수록된 11편 모두가 불교와 직접 관련된 작품들이다. 찬불가로 작곡되어 불교방송에서 불리어지기도 한 「찬불가·참회합니다」를 비롯하여 표제시인 「생사를 뛰어넘는 우주의 뜨락」, 「임 그리다 굳어버린 관음의 노래」, 「꽃의 열반」 등 제목부터가 모두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나뭇잎 한 장 노을에 흔들리면
백리 밖 강물이 넘쳐나고
나뭇잎 하나 바람에 떨어지면
천 리 밖 산자락이 들썩이고
천 리 밖 산자락이 흔들리고
강물이 넘쳐나고
하늘이 흔들리면
새의 날개, 꽃망울 하나 구름 한 조각
풀잎이 흔들리고
아니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천강이 흔들리고
천강이 흔들려서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나니……
달빛 잠긴 강물이 이윽고 잠을 자고
달빛 내린 산자락이 고요해지고
적멸의 기쁨이 내려앉아
자유로운 새의 날개가 깃을 접고
꽃잎이 고개를 수그리고 구름이 멈추고
우리들의 마음이 큰 자유의 강물에 잠기나니……
아, 한밤중 달빛 잠긴 천강이 춤을 추나니
아, 생사를 뛰어넘는 저 우주의 뜨락은 어디인가.
―「생사를 뛰어 넘는 우주의 뜨락」
시인이며 불문학자인 송용구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불교의 연기론에서 우러나온 통합적 세계관을 미려한 언어의 붓으로 채색하고 있는 시적 풍경화이다. 어느 한 곳에서도 단절과 막힘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호흡과 숨결을 주고받으면서 소통의 길을 열어간다. 죽음과 삶, 시작과 끝,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허물어져 있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했던 ‘열린 세계’란 이런 세계를 일컫는 것이 아닐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열린 세계’ 속에서 ‘나’와 ‘너’의 구분 없이 ‘유와 무’의 차이마저도 뛰어 넘고 있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천강’의 ‘춤’에 사무쳐 있다.”
시인 이혜선은 이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위의 시는 이번 시집의 표제시로서, 역시 불교적 사유가 바탕이 된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세계를 아름답게 펼쳐놓고 있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滅하면 저것이 멸하는, 모든 것이 한없이 서로 연관되어 발현되며,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인드라망 속에서 살아가는 법계의 아름다움과 환희를 천강이 춤을 추는 환희의 세계로 생동감 있게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박제천 시인은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마음은 곧 일체유심조니, 마음 따라 천강이 흔들리면 적멸의 기쁨도 크나큰 자유의 강물에 잠기니, 모든 것이 날개깃을 접고, 멈춘 뒤에 ‘달빛 잠긴 천강이 춤을’ 춘다 . 그곳이 곧 ‘생사를 뛰어넘는 저 우주의 뜨락’이다. 감탄사가 절로 발해지는 순간의 적멸보궁인 셈이다.”
열아홉 번 째 시집은 예전 작품이 더러 섞여 있다. 신작과 예전 작품을 함께 수록하여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 의도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체가 작품 속에 녹아 있으니 신작 구작을 구태어 따질 필요는 없다.
저기 저 날아가는 새를
쫓아가거라.
날씨가 이리 좋으니
중생衆生들 마음도 한결
환하겠구나.
브루노 존자尊者 효강曉江스님이
밀어드리는 휠체어를 타신
부처님 마음이 싱글벙글하신가 보다.
새가 어디로 날아갔느냐
저기 빨간 우담바라 꽃이 핀
미륵부처님 계신 ‘봉경사鳳慶寺’에 가서
‘주광스님’을 만나자꾸나
봉경사 뜨락에 가서 미륵부처님께
인사 좀 드리고 오자.
아니 아니 아니
저쪽 골목길이 좋겠구나.
담장 밖으로 얼굴을 내민
꽃송이들 아름다운
저쪽 골목길 꽃구경 가자.
이 늘어진 다리 좀 올려놓아라.
부처님은 우주宇宙 한 바퀴 돌아 휠체어를 세우시더니
아픈 다리를 올려놓으시란다.
그때 마침
건너편 저쪽에서
하아얀 할머니 한 분 산을 내려오신다.
부처님께서 손을 들어 인사하신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쪽으로 날아간
새 한 마릴 못 보셨는지요.
할머니는 그냥 하아얗게 웃기만 하신다.
휠체어는 이제 암자庵子 아래
잠시 쉬어 있다.
아주 밝고 맑은 날의 일이었다.
―「휠체어를 타신 부처님」전문
이 시에는 새가 나오고 꽃이 나오고 휠체어를 타신 부처님이 나온다. 왕궁을 떠나기 직전 부처님의 시중을 들던 브루노 존자가 부처님의 휠체어를 밀고 있다. 하얀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나누시는 부처님 그리고 밝고 맑은 날씨. 아주 환상적인 환경을 설정하여 세상을 초월하여 피안의 세계를 시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을 부처님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하고 극락을 주유周遊 하며 어머니와 조우하기도 한다. 이런 배경 설정, 이런 상상의 세계를 펼침으로써 시인은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희망을 새롭게 한다.
2) 애국 애족 우국의 시
시인의 시집 제목 중에 『북녘바람의 귀순』, 『꽃섬 독도의 울음』, 한국인의 한을 노래한 『한·비가』, 그리고 역시 한국인의 한을 노래한 『억새풀의 땅』 등의 시집을 보면 시인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우국의 정신이 얼마나 강렬하고 절박했는지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놋그릇에 관한 이야기를 시를 엮어낸 연작시 「놋그릇 이야기」 5편도 일제에 강점당한 암울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우국충정이 끓어오르는 열사임에 틀림없다. 『북녘바람의 귀순』은 병석에 눕기 전 대한민국반공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집으로 유일하게 재판을 찍은 시집이다. 9장으로 된 시집은 마치 염불을 외우듯 유창하게 읽힌다.
……전략……
돌밭에선 썩은 심장들만
쟁기 날 끝에 찍혀 나오고
쑥대뿌리 얽힌 이슬 들녘엔
냉이 한 뿌리 묻히지 않아서
서운히 돌아오는 순이여
빈 나물바구니 같은
허전한 마음을 캐어들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당신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듣던
당신의 치마 끝에 서린
뜨겁고 지극한 말씀
……후략……
―「북녘바람의 귀순」의 일부
전쟁의 상처로 황폐화된 조국 산하를 9개의 장으로 풀어낸 이 장시를 읽으며 신경림 시인의 시평이 생각난다.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며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시인의 입담이다. 실상 이 입담은 이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의 하나이다.”
이런 평을 하면서 단시일 경우 어쩌면 이 입담이 장황해서 시를 지루하게 만들 터이지만 장시일 경우엔 시를 전개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 이런 천부적 입담 때문에 그럴까 시인의 시집엔 연작 장시로 꾸며진 시집이 많다.
3) 한국인의 정한을 노래한 시
우국충정이 어린 시와도 일맥상통하는 주제이면서도 개인적 정서가 좀 더 가미된 연작시가 있는데 한국인의 정한을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자녀들을 키우며 일제 치하에서 가난 속에 삶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한을 노래한 「간난이 한」 13편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44년 가을 어느 날 이른 아침
경성부 신당동 서천동 162번지
간난이 여사 댁에서 생긴 일이라네.
간난이 여사 흰 앞치마 질끈 동여매고
가난한 장독간에 올라서서
한 손에 하아얀 조선 사발 들고
된장 한 숟가락 뜨려는 순간
된장 한 숟갈 뜸뿍 뜨고 있던 참이었네.
느닷없이 일본 순경놈 벼락처럼 뛰어 들어와
간난이 손에 들려 있던
된장 뜸뿍 뜬
조선의 놋숟가락 나꿔채 달아나더라네.
―「간난이 한 · 1 -빼앗긴 조선의 숟가락」
조선의 하늘이 높이 솟아 울음 울던 시절
전쟁에 터트릴 포탄 만든다고
조선의 조상님 소중한 밥그릇
놋화로, 상청에 모신 정화수 놋대접, 젓가락, 숟가락
몽둥이 닥치는 대로 쓸어가던 그 아픈 시절
이른 아침 숟가락을 빼앗긴 간난이
일본 순경놈 더럽고 징그러운
손끝이 스쳐간 손등 부끄러워
수세미에 잿가루 묻혀
손등을 씻고 또 씻어
가슴에 담긴 부끄럼 씻어 내리고
장독간에 주저앉아
앙앙 울음 토하셨다네.
한창 이쁨 뽐낸
봉숭아 꽃잎도 몇 잎
눈물 흘리듯 장독간에 떨어져
간난이와 같이 피울음 쏟는데
고추잠자리 한 마리
가난 덮인 마당으로 날아 들어와
맴을 돌더라네.
아 서러운 간난이 장독간의 한이여
아 서러운 조선의 기막힌 아픔이었을레.
―「일제 강점기 」
일제 말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백성들의 놋주발까지 몰수해 갔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역사적 사실을 아주 실감 있게 묘사해낸 이 연작시는 바로 우리들 어머니의 한이요 곧 민족의 한이다. 아주 눈에 보이듯이 사실 그대로 표현해낸 이 작품에서 잊어서는 안 될 우리 민족의 수난과 비극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겨보는 것이다. 한편 시인은 「놋그릇 이야기」 연작 5편에서 따로 이 주제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쪽발이 먹구름에 짓눌린
조선의 하늘이 통곡을 하신다.
왜놈 발길에 짓밟힌
조선의 가슴이 울음 우신다.
간난이 고우시던 님
가신 님 지아비 상청
극락왕생 가시는 길
길 밝혀드리는 놋촛대
눈 부릅뜨신다.
놋그릇끼리 가슴만 부벼도
맑고 맑은 조선의 종소리 내시어
눈 부릅뜨시네.
어머님은 알고 계시죠.
서역삼만리
서역정토
맑고 높은 하늘에 계신
간난이 어머니 잘 알고 계시죠.
1940년 그 무렵
경성부 신당동 서천동 162번지
아득한 세월 저쪽에 살던 그
일흔 다섯 해 전 1940년 그 무렵
신당동 가난한 언덕에
신당학원 세워
조선 어린이들에게
우리 지극한 조선어 독본으로
조선말 가르치고
단군 할아버지 조선의 역사 가르치던
신당학원의 숭고한 역사의 문 열어
조선의 가슴에
꽃을 피웠는데
얼마 못가 그만
일본 헌병놈들 탄압에 못 견뎌
신당학원 문을 닫고 말았지요.
간난이 어머니 지아비
그만 깊은 화병 드시어
하룻밤 아이고 머리야 하시고
눈을 감으셨나니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놋그릇 이야기 1 -1940년대 조선 사람의 하늘이었던 유기령별곡鍮器靈別曲 」
일본의 강점 시 일본 헌병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시련을 겪으시고 마침내 일본의 탄압으로 조선어 교육마저 시키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시인이 일제의 탄압을 뼈저리게 가슴속에 간직하게 된 연유가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의 개인사적 이야기이지만 이 시 속엔 개인의 체험을 민족의 체험으로 그리고 만인 공통의 정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5) 먼저 떠난 시인들에 대한 그리움
시인을 방문하면 시인은 옛날에 교유했단 시인들의 얘기를 종종 들려주곤 했다. 고은 시인을 비롯하여 김관식, 천상병 시인의 얘기를 하곤 했다. 지난해 펴낸 마지막 시집에 먼저 떠난 시인들을 거명하며 쓴 연작시 5편이 있다. 그가 병상에서 얼마나 고독했으면 떠난 시인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연작시를 썼겠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온다.
먼저 떠난
텅 빈 바람소리야
소란스럽고 넘치고 넘치네만
아주 높으시고 향기로운
바람소리는 드무나니……
선생질 하던
내 도타운
아주 먼 옛날 20대 때
명동 바닥을 휩쓸던 술친구
관식이 술싸움하다
팔을 다쳐
끙끙 앓고 누워 있는
자하문 밖 앵두골 바람소리
내가 한 살 위인데도
형님이라 부르라며 껄껄대던
바람소리 관식이
그가 바람처럼 누워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찾아서
로 바람이 되어 앉아
술잔 부딪치던 바람 소리였는데
그의 고운 마나님 방 여사를 남겨놓은 채
술 주전자 끼고 너무 일찍 떠난
그의 이쁜 시 「자하문 밖」에서 귀하신 높으신
바람소리 듣고
아쉬워 흐느꼈었네.
―「먼저 떠난 바람소리 · 5」
목 여사가 빨간 버선 신겨주어
두 번째 먼저 떠난 바람소리
상병이 갈갈갈...
웃어대며 막걸리 마시러 가자 소매 끌던
바람소리 상병이
그의 절시 「갈대」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 달래며
서로 사무치게 바람소리로 바라보다가
아직 더러운 세상에 남아 있는
늙은 바람이 먼저 떠난 바람소리
관식이와 상병이의
하늘 솟구치는 목소리 듣나니……
그대들 그 머나먼 하늘에서
반가운 빗소리 같은소식 한 방울 없네만
그대들 두고 간 바람소리는
항상 내 곁을 감돌고 있으니 말일세.
―「예쁜 골무 같은 마나님」
허형만 시인의 회상에 의하면 랑승만 시인은 김관식 시인하고 무척 가까웠다고 한다.
“랑승만 시인은 1956년 《문학예술》지에 시 「숲」이 추천되어 한국 문단에 거보를 내딛기 시작했다. 그때 그이 나이 24세, 한 살 아래인 김관식과 절친한 사이였다.(중략) 랑승만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순수 열정 문인들 모두의 정신적 뜨락이었던 명동과 그리고 친구 김관식 시인을 회고하면서 ‘세상이 썩어가든 어찌되든 썩은 땅에서 하아얀 냉이 한 뿌리 캐는 마음으로 순수룰 더욱 천착하고 서정적 시 정신을 더욱 가다듬기로 한다’고 다짐하며 랑승만 시인은 오늘도 창작의 불씨를 끄지 않고 있다.”
―허형만 「따뜻한 슬픔과 서정 정신」의 한 대목
6) 가난과 병고의 세월
모든 문인 독자들에게 랑 시인의 이미지는 가난과 병고다. 그 가난의 뿌리는 역사가 아주 오랜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자전적 시와 산문 여러 곳에서 감지되듯이 어렸을 때부터 넉넉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시인이 동국대학교 다닐 무렵 교유했던 신경림 시인의 글을 잠시 빌리기로 한다.
“랑승만 시인과 나는 한 해 차이를 두고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는 인천에서 통학을 했었다. 우리가 처음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술자리에서 그는 기차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연신 시계를 보곤 했지만 그것은 잠시뿐, 그는 이내 기차시간을 잊고 술 마시기에 열을 올렸으며, 기차시간이 지나면 살았다는 듯이 더 기승을 부렸다. ……(중략)…… 이 무렵의 랑승만 시인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잘 웃고 잘 울고 잘 노했다. 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얘기도 잘했다. 특히 그의 노래는 하나하나가 시적이어서, 한 친구는 그의 얘기에서 인천 앞바다의 짙은 술 냄새가 난다고 지적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임종국 시인과 함께 인천으로 그를 찾아갔던 때의 일이다. 언제든지 찾아오라면서 그가 적어준 주소와 약도를 가지고 기차에서 내려 약 두 시간을 헤매다가 납작한 판자문이 달린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파자마 바람으로 판자문과 무릎이 맞닿는 마루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뜻하지 않았던 그의 가난에 오히려 우리가 당황했지만, 그는 조금도 가난을 두려워 않는 당당한 태도여서, 우리는 자못 마음이 편했다. 그는 노모와 형과 함께, 아니 형에게 얹혀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셋이 앉으면 터져나갈 것 같은 마루에서 두어 가지 해물을 안주로 취하도록 소주를 마셨다.
―신경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목소리」에서 발췌
이 무렵 랑승만 시인은 이미 《문학예술》지의 추천을 받았고 학생문단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한 때 십만 부를 육박하는 잡지의 편집부장을 맡고 있어 그 탁월한 편집 능력을 보고 신경림 시인은 랑 시인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경림 시인은 그때 조그만 전문지의 편집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탁월한 능력을 보이던 그가 1980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비극이 겹쳐 일어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고 신경림 시인은 안타깝게 회상하고 있다. 시인 김영승은 꽤 오래 전 시인의 회갑연에 참석하여 헌시를 낭송한 바 있음을 회상하고 있다.
……전략
다시 맞은 계유년
돌아보니 방울방울 눈물방울이었구나
첨벙첨벙 핏방울이었구나
그러나
풍설풍뇌 같은 기쁨이었구나
만경창파 같은 황홀이었구나
효박한 누항의 어두운 급류를 뚫고 날아가는
단 한 발의 우는 화살이여
―김영승 시인의 헌시 일부
이어서 김영승 시인은 랑 시인의 삶은 ‘시생일여詩生一如’의 삶이라고 규정하면서 랑 시인의 문예지 대담 한 토막을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시를 삶의 들불로 생각하고 불교를 영혼의 등불로 생각해 시 한 편 쓰면 10년을 더 살고, 시 한 편을 발표하면 20년을 더 살고, 시집 한 권을 발간하면 30년을 더 산다는 것이 내 정신생명의 의지와 신념으로 굳어졌어. 일종의 정신생명의 부활의 의지인 거야. 시에는 생명력이 있지. 시를 쓰면 거듭날 수 있어요. 자기 영혼의 목소리를 터득하고 간직해야 하는 거지. 이것은 나한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야. 모든 시 쓰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말 장난꾼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거야. (대담- <유형의 삶, 그 불꽃같은 시인 랑승만>),
―『학산문학』 95년 봄·여름 합본호에서
19권의 시집 속에 가난과 병고의 한은 시인의 삶의 모습으로 입증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모진 운명을 극복하며 이룩해낸 숭고한 영혼의 문학은 또한 가장 명백한 인간 승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면 비교적 시인의 근황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시 한 편 소개한다.
노인 장기 요양보험으로
나날이 봉사활동 해주시는
이영실이란 보살님
도움으로 휘체어를 타고
세상 구경을 하러
바깥세상을 나섰네.
반신불구 34년만에
두 다리도 못쓰는
80노구 이끌고
목숨 새로 태어나듯
세상길에 나섰네.
길 가는 사람들 만나
너무 반가워 인사를 던지고
사람 바글거리는 세상을 돌아
가을 잎 우수수 떨어지는
공원 끼고
꼬리가 바다로 뻗어나간 '청량산'
정자 앞에 머물러
잎 푸르고 울긋불긋한
숲 속을 엿보는데
언제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는지
거기 반갑고 그리운
가을이 빨갛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시더네.
아 이쁘신 가을이여
은행잎 하나 주워들고
가슴에 부비노니
가을이 눈물지시네.
'청량산' 깊은 골이
가을향기로 흠뻑 젖어
사람들의 발걸음마다
가을 향기로 펄럭이누나.
반신불구 34년에
두 다리까지 못써
움직임 신통치 못한
외로움의 늪에 파묻혀
키에르케고오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
'고독'이라 했던가.
키에르케고오르의 고독과
가을을 휠체어에 싣고
우주宇宙 한 바쿠 돌고
땅굴로 돌아오는 기쁨일레.
―「예쁜 골무 같은 마나님」
한 보살의 도움으로 세상 구경을 하러 바깥나들이를 하는 풍경으로 마치 어린이처럼 즐거워하고 있다. 비교적 말년의 모습인 이 풍경은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주 즐겁고 경쾌한 기분이 들게 한다. 사실 말년의 시인의 모습은 참혹했다. 혼자서는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전립선 비대증으로 항상 지저귀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의 풍경은 아주 즐겁고 편안한 모습이다. 이제 저 부처님의 뜨락에서 늘 이렇게 신선한 바람과 햇빛 속에 나들이를 하며 지내시기 바란다.
시인은 2014년 《리토피아》에 기고한 자전적 에세이에서 시인에 얽힌 재미있는 비화를 기고한 바 있다. 상당한 양의 기고문인데 극히 일부분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 랑승만 시인이 인천에 정착하게 된 사연: 나의 친형 랑승태 선생이 인천상업학교(현재 인천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근무하게 되어 인천으로 내려와 살게 된 것이지. 당시 인천상업중학교엔 교가가 없었지.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표량문 시장이 작사를 하고 친형인 랑승태 선생이 작곡을 하여 인천상업중학교 교가를 만들었는데, 현재 인천고등학교 교가가 바로 친형이 작곡한 인천상업중학교 교가이라네.
* 《문학예술》지에 등단한 사연:1950년대 일찍 작고한 김관식 시인과도 두터운 친교를 가지게 되었지. 1956년 12월 어느 날 술이 잔뜩 취한 김관식이 ‘승만아, 너 됐단 말야.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이 되었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김관식이 멱살을 잡고 ‘이놈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게야. 내가 문학예술에 추천이 되었다니…….’ ‘이놈아. 내가 지금 문학예술사엘 다녀오는 길인데, 네 놈이 시가 추천되었어.’ 나는 그 길로 문학예술사로 달려가 확인했지. 당시 주간은 박남수 시인이었고 추천한 분은 이한직 시인이었지. 이렇게 하여 나는 1956년《문학예술》12월호에 시 「숲」이 추천을 받게 되었다네. 이한직 선생의 추천사를 여기에 옮겨 보네.
“랑승만군 과거 근 일 년을 두고 선자들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많은 시인들이 탈락하고 말았는데 군은 묵묵히 노력하여 마침내 선자를 설복시키고야 말었다. 이메이지와 이메이지 사이의 연결이 충분치 못한 까닭으로 사고의 흐름이 때로 중단되는 흠은 없지 않으나 「숲」은 짜임새에도 흠할 바가 없고 말쑥이 맺은 아담한 작품이었다.”
* 첫 시집 『사계의 노래』가 출간된 사연 : 1970년 당시 시인협회 회장이었던 박목월 시인의 주선으로 문단에 나온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시집을 내지 못한 사람을 선정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께서 시집을 내주셨는데, 나도 포함되어 감사하게도 나의 첫 시집 『사계의 노래』가 상재되었네.
* 제 2시집 『북녘바람의 귀순』이 재판을 발행하게 된 사연 : 1984년 새해가 된 겨울의 일이지. 어느 날 갑자기 육군사관학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 육군사관학교 교장 황인수 장군의 부관 김 아무개 대위인데, 황인수 장군이 선생님을 찾아뵈라고 하여 전화를 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다음날 부관이 찾아와 황인수 장군이 갖다드리라고 했다면서 금일봉을 내놓으며 다음 같이 말하는 것이었지. 내가 그 무렵 《세대》지에 ‘한국인의 한’이란 테마 에세이를 연재했는데 황인수 장군이 감명 깊게 읽고 또 자택에서 병상시화전을 여는 사연을 기사를 보고 김 아무개 부관을 보낸 것이지. 나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황인수 장군과 마침내 통화하게 되었네. 일주일 후에 부관은 나를 지프차에 태워 육군사관학교로 데리고 갔지. 황장군은 나를 보더니 얼마나 고생을 하시냐면서 도와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네. 나는 간 시집 『北녘 바람의 귀순』을 내보이며, 이 시집을 재판하여 육군사관학교 부교재로 써주면 좋겠다고 제안했지. 황인수 장군은 대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출간하여 3백 권 납본을 하면 책값을 드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시집 『北녘 바람의 귀순』재판 3백부를 찍어 육군 사관학교에 납본하게 된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이야기가 된 것이지.
* 시집 『뿌리와 한』이 나오게 된 사연: 2006년 9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남한산성 깊숙한 곳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나눔의 집’에 가서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할머님들의 쓰라린 경험을 기록한 ‘뿌리와 한’이란 자료집 한 권을 얻어 와서 그걸 참고로 시를 써서 『뿌리와 한』이란 시집을 만들었지.
* 시집 『반야의 산바람 물소리』가 나오게 된 사연 : 1993년 봄에 두 번째로,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초청을 하여 또, 그 지극한 청정도량을 방문하게 되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반야의 방’에서 묵었는데 운문사 승가대학의 학장스님인 전명성 비구니 큰 스님께서 종민 스님을 시켜 랑승만 시인이 묵으면서 시를 쓰라고 책상까지 갖다 주어 ‘반야의 방’에서 시를 썼네. 그리하여 1994년에 11月에는 12번째 시집 『반야의 산바람 물소리』가 나오게 되었네라.
랑승만 시인의 시집은 모두 19권이다. 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짧은 시간에 모두 읽고 연구하여 시인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시인의 해박한 불교지식을 내 짧은 필력으로는 해독하기도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오랫동안 시인의 모습을 지켜본 한 후배의 입장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시인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앞으로 훌륭한 연구자들이 나와 시인이 그 오랜 병고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며 차원 높은 문학의 세계를 구축했는지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명쾌하게 밝혀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참고로 상당수의 작품과 인용 자료가 한자로 쓰여 있었는데 모두 한글로 바꿔 표기하였음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약력:《계간 문예》 신인상. 시집 1985년 첫 시집 『우리 사랑이 成熟하는 날까지』 발간. 『어머니』(1998),
『소래갯벌공원』(2011), 『시간의 빛깔』(2013) 등 다수. 25회 인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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