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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근작읽기/정미소/문득 차창 밖에 어리는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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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550회 작성일 17-01-0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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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읽기

정미소





문득 차창 밖에 어리는 유년시절
―정무현 시인의 근작시






세게 내리쳐야 한다
그렇더라도 지렛대 발이 필요하다


넘겨야 할 놈에 비하면
발이 높아 어림없어 보이지만
쓸모없어 뵈는 돌덩이가
돌다리를 만든다


치는 순간 세상은
오직 넘겨야 할 대상이다.


                                                                ―「딱지치기」전문


   정무현 시인의 시에서는 개구쟁이 사내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엿보인다. 어렸을 때 달렸던 청보리밭길, 흙먼지 폴폴 날리는 학교 운동장, 삼삼오오 모여서 딱지치기에 구슬땀 흘리는 아이들의 불룩한 주머니, 담장 너머 들려오는 “무현아, 노올자!” 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커서 어른이 되고 사회의 경쟁구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띤 토론을 하고 컵라면을 먹는다. 지옥철이라 불리는 출퇴근길의 지하철을 타고 떠밀리며 흔들리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가졌을 것이다. 문득 차창 밖에 어리는 유년시절이 다가오며 웃는다. 헐거워진 신발을 지렛대 삼아 힘껏 내리치는 바람의 가속을 등에 업은 딱지가 맥을 못 추기도 하고 승승장구하기도 한다. 책가방 속에 어김없이 접혀 있는 수북한 딱지. 지난 봄 우연히 넘긴 ‘2016 아트페어전’도록에서 서양화가 박상천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한지로 크고 작은 딱지를 접어서 거대한 우주를 만든 작품이었는데, 작가의 말은 “딱지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라고 했다. 개구쟁이의 손때 묻은 딱지치기 놀이가 승부근성을 키웠고, 승부근성이야말로 무한 질주하는 세계 속의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동력은 아니었을까? 유쾌한 상상을 한다.



샛노란 산수유 꽃이 피어 있다
단풍보다 붉은 계곡의 물소리
그 속에서 탁주를 들이키는 선비
낙관과 함께 꿈틀대는 호탕한 웃음소리
손바닥만 한 공간에 온 누리가 들어있다
곳곳에 길이며 산이며 마을이 있고
하늘 곳곳엔 해며 달이며 별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떠나려는 선비 일어서지 않는다.



                                                                                        ―「한지공예」전문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가 떠오르는 작품이다. 계곡물이 흐르는 정자에 앉아서 탁주를 마시는 선비의 호탕한 웃음소리. 세상의 근심걱정이야 잠시 뒤로 미루고 흘러가는 구름과 물소리와 단풍 들어 불콰해진 낯빛이면 어떠리. 벗 삼아 한 잔 두 잔에 시름도 벗고 오늘만은 내 세상이라 소리친들 어떠리. 병풍으로 에두른 봉우리 봉우리마다 봄이 걸어온다. 내친 김에 시조 한 수 읊는다. '동창이 밝았느냐/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약천 남구만의 시조를 읊으니 그의 유배지가 필자의 고향인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심곡마을임을 밝힌다. 한지공예로 꾸민 손바닥만 한 공간에서 일어설 줄 모르는 선비. 시인은 선비가 부럽다. 하루 스물네 시간의 톱니바퀴에 떠밀리며 먼저 먹지 않으면 먹히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벌판에서 갓끈 풀고 탁주나 한 잔 거하게 하시라고 철철철 넘치게 권하고 싶다.



눈물이 난다. 겨드랑이에서,
가슴에서, 등에서, 발에서


열꽃이 핀다
온몸에 뜨거운 열꽃이 솟는다
뼈가 내려앉도록 걸은 탓이다
머리가 터지도록 계산한 탓이다
아무리 걸으며 계산해도 답이 없는 답이다


보이는 대로 볼 수밖에 없는 눈
감을 수 없어 못 본 체 할 수 없어
열꽃이 핀다.



                                                                                    ― 「열꽃」전문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눈을 다물어야 한다. 다치지 않기 위해서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말을 하니 열꽃이 핀다. 벌겋게 닳아 오른 열꽃은 주로 혀와 겨드랑이와 발바닥에 뿌리를 내린다. 열꽃이 번식하는 동안 진실은 기진하여 스스로 드러눕는다. 위장과 허위와 음모와 결탁이 목청을 돋우는 솜방망이 앞에서 시인은 소금소태를 쏟는다. 마른 소금 알갱이들이 폐부를 짓누른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왜곡된 보도와 눈을 가린 말, 말 앞에서 눈물이 난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 생존방법이라면 정의로움은 무엇인가? 뼈가 내려앉도록 걸으며 갈등하는 시인의 어깨에 천 근 무게가 얹힌다. 옳음과 옳지 않음을 분별할 줄 아는 동심이 거대한 현실의 벽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하는 열병을 앓는다. 역사 속에서도 직언직설을 하며 충심을 바친 선비들은 귀양살이를 갔다. 알아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꿀 먹은 벙어리로 냉가슴 앓는 것이 현명한 세상살이의 대처법인가? 시인의 몸에 핀 열꽃이 아프다.



어둑새벽은 돌아 설익은 모양을 드러내고
뿌연 고요는 일순 매혹으로 번진다
발목에 닿는 밭둑길 이슬 두른 풀잎에서
온몸으로 새벽을 빨아올린다
치걱대는 밭둑길 연무 속에서
물비늘 꽂히는 길을 지나야 꿈의 자락을 잡는다지
드러나는 밭이 번지면서 희망산이 둘려있는데
이 터전에서 싹을 틔운 아이가
햇살 바르며 솟아오른다.


                                                                                    ―「연무비상」전문



   연무는 연기와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아직 어둠이 물러서지 않은 새벽의 창밖에 연무가 몰고 온 희디 흰 고요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좁은 둑길을 걸으며 발목에 닿는 풀잎의 보드라운 감촉이 남은 잠을 깨운다. 이슬방울이 아침을 밀어 올린다. 희디 흰 고요가 물비늘을 드러내며 환하게 밝아지는 저수지를 바라본다. 시인은 한 때, 이 길을 걸으며 꿈을 키웠을 것이다.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읽으며, 알퐁스도데의 ‘별’을 읽으며, 윤동주의 ‘서시’를 외우면서. 어쩌면 시인의 꿈은 사방 벽면이 책으로 빼곡한 서점의 주인이 되어 책을 마음껏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조용필처럼 ‘위대한 탄생’ 밴드를 결성하여 가수가 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아직 시인의 꿈은 햇살 바르며 희망적이다. 연무가 심한 독감에 걸려 유년의 고향 언저리에 머무는 고요함이 사라질 지라도, 저수지로 가는 밭둑길이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포크레인에게 뭉개어질지라도. 시인은 손때 묻은 책을 어루만지며 나고 자란 고향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 할 것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울컥 콧잔등이 시리다.



꿈이 소리로 흐른다. 아치스의 슈가슈가는 그대에게 눈뜨고 필링소우

굿은 절정에 이르렀다. 박인수의 봄비에 그대와의 흐느낌을 알았고 존덴

버의 록키마운틴하이로 눈은 다시 빛났다. 키메라의 신천지 얼굴은 팝페

라의 대명사가 되고 모차르트의 피아노곡은 아침 커피가 필요한 이유를

알려주었고, 베토벤은 운명처럼 사색에 머물게 했다. 지금은 레코드 안에

 들어 앉아 버린 꿈, 언제나 소리로 꿈을 만든다. 아버님의 18번 유정천리

도 한때의 꿈이었을 터, 내가 살아온 길이 레코드 안에 들어있다. 까맣게

돌고 돌아 결국은 작은 점으로 돌아간다. 하얗게 바뀐 시디에서 인생 뭐

별 거냐고 소리가 흐른다.


                                                                                                                                                      ―「 레코드」전문



   시인은 시를 쓰는 일 외에 작곡을 한다. 시인의 말에 의하면 시는 어렵고 작곡은 시보다는 쉽다고 한다. 시를 써서 곡을 만들고 발표한 음반을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꿈이 소리로 흐르는 음반의 길을 따라 귀를 열면 별 것도 아닌 인생 돌려버리라고 해서 통쾌하기도 하였다. 전 장르를 통한 음악은 각박한 삶 속에 윤활류가 되어준다. 실연의 아픔도, 사랑의 기쁨도, 꽃의 환희와 절망도 음악을 통하여 위로가 되고 희망을 안겨준다. 시인은 레코드 안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목걸이 귀걸이를 한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꿈을 발견한다. 존덴버의 터질 듯한 백색 바지와 폭발하는 가창력에 눈을 빛낸다. 하지만 현실은 동네 어귀의 상하수도 배수관을 살피며 어르신들의 문안을 여쭈며 동장님으로서 발 빠르게 돌고 돌았다. 30여 년의 레코드 밖 인생에 매진하다보니 어느새 정년을 맞이한 오후, 까맣게 잊었던 레코드의 말에 귀 기울이니 스멀스멀 꿈이 기어나왔다. 백발의 시디가 유년의 동창생처럼 어깨를 툭툭 친다. 인생 뭐 별 거냐고.

   사석에서 만나는 정무현 시인은 잘 웃는다. 하얗게 드러나는 대문니가 개구진 사내아이의 천연스러운 웃음이어서 좋다. 딱지치기를 하던 아이가 어느새 정년퇴임을 맞이하였다. 공직에서의 우직한 30년 외길 인생이 존경스럽다. 시인은 성품대로 신중하고 시창작과 작곡의 영역에도 감각적이다. 묵직한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좌중을 기쁘게 하였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상담자가 되어준다. 시인의 근작을 통하여 근황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시 창작에 더욱 전념하는 시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약력: 2011년 《문학과창작》으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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