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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특집/오늘의 시인/소율/수평선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외 4편/신작시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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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오늘의 시인
소율
수평선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바람일수록 더욱 선명한
기억 속의 붉은 깃발은
그대로 굳어버린 풀자욱처럼
여백을 충동질한다
조금의 습기에도 미완성의 모자이크는
눅눅하게 되살아 난다
발 헛디뎌 깨어진 무릎 아직도 아픈
첫사랑
이른 봄날의 풋마늘 내음같이 알싸한
첫 경험
굴업도에서 하루
갈매기가 절뚝절뚝 다리를 전다
해묵은 전설들을 무수히 쏟아내던
바다는 밤 내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하필 북두칠성은 어찌 내 몸을 덮쳐왔던가
산란이 시작되려는지 동이 터오기도 전에
아랫도리에 이슬이 비치고 있다
응고된 시간들이 파도 끝에서 힘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해풍을 타고 꿈을 꾸던 활자가 책갈피 사이에서 탄산음료처럼 기포를 낸다 바다의 폐는 기포로 가득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피를 점점 부풀려가는 폐, 팽창하는 압력을 견디다 못해 해일이 인다 컴컴한 밤 만조와 맞물려진 바다는 커다란 기포덩이를 쉼 없이 쏟아놓는다 발자욱들 잠깐 사이 질서를 잃고 허둥거린다
억새능선을 따라 우욱우욱 울어대던 소사나무
밀림 사이에 서서 나도 절뚝절뚝 다리를 전다
간밤 북두칠성은 그림자만 남아있다
바다의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달빛 걷기
잠깐 사이 해무는 밀려왔다네
소란했던 한낮은 입을 닫았고
별들 졸음만 쫓고 있었네
밤바다를 끊임없이 충동질하던 달뜬 휘파람 소리
내 집 담장을 넘어
설익은 뒤뜰의 앵두나무 잎새를 흔들곤 사라져갔네
그 밤 파도는 유난히 잘잘거렸네
고양이가 붉은색 장화를 목에 걸고서 바다로 들었다는 소문
돌았네
하필 그 밤, 안개는 어둠 속 바다를 안고 부표처럼 떠올랐다네
어울렁더울렁대던 가슴 한 쪽이 조금씩 더워져오고 있었네
하늘에서 별들 쏟자 바다가 해맑게 미소를 짓네
솔숲을 홀리던 밤의 향기는 공간을 끝도 없이 확장해 갔네
그 밤 하얀 모래밭 위로 푸른 물 뚝뚝 흘리며 걷던 달빛 보았네
자박자박 달그림자 발자욱 새기며 걷네
이 밤 그렇게 임 마중 가네
이 봄에 자목련
밤마다 마른 울음 삼켜야 했다 한 밤중 시계소리만 긴 밤을 울어대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선명하게 새겨지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곰팡이꽃 도도하게 솟아올랐다 어둠 속에서 낮게 포복해있던 상흔들 물기 젖은 바람이 불어올 때쯤이면 꽃송이 불콰하게 피워 올렸다
빛은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개더미가
터널 속에서 허우적이는 내 발목을 휘감아 안고 사라져 갔다
음표들이 불안한 듯 동당거리며
어둠의 소매 끝에 매달려 있다
꾹꾹 눌러두었던 상처가 켜켜이 날을 세우며
한꺼번에 일어서고 있었다
각각의 생각과 행동들이 뒤엉켜 날카롭게 대립을 하고
창밖의 나무는 연신 메마른 가지를 흔들어댔다
현기증 인다
자목련이 놀라 화들짝 꽃망울을 터뜨려댄다
훌쩍 가벼워진 어깨를 펴며
슬픔의 덩어리들을 뭉클뭉클 쏟아 내놓고 있다
눈시울을 붉히며
봄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겨울나무 위 눈꽃
뼈들이 발아하는 소리 들렸어 한 밤중이면 충만하던 수액들 줄줄이 증발해갔고 통증을 호소하던 지층이 발끝에서 흔들리고 있었어 몇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각질 켜켜이 쌓여만 가던 발뒤꿈치엔 균열이 일고 있었어 마침내 골반의 균형마저 좌우 서로 어긋나기 시작하였어 겨울은 뼛속으로만 격하게 파고 들었어
봄은 번번이 무릎 연골 틈새를 비집고 나와 꽃을 피웠어 폭염 속 늘어진 나뭇가지 잎잎들 처연하게 푸르러갔어 하지만 저 들판의 억새, 비바람 내려칠 때마다 고독에 몸부림치며 몸 낮춰 울고 있었어 가을은 정수리 한 가운데서 뭉턱뭉턱 뽑혀 나온 내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쥐고 잎들 태연하게 물들이고 있었어
창백한 보름달이 우듬지 끝에서 가을날 연시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어 사막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자궁이 다시 달거리를 시작하려는지 혈관 붉어지고 있었어 갓 구워낸 오븐 속 쿠키처럼 바삭이던 뼈들이 결기를 세우고 있었어 심장은 혈맥을 열어 피돌기를 시작하였어 앙상한 나무 가지를 타고 꽃들 순결하게 피어나고 있었어
절망의 더께를 딛고 별들 창백한 얼굴로 빛을 쏘아대고 있었어
꽃술들 사이 점점이 박혀있던 옹이가 흐느끼듯 빛나고 있었어
<신작시>
네비게이션
그녀는 참, 친절하다, 안전한 삶은 절대 안전속도를 지킬 때에만 가능하다, 속도위반 또는 지정된 경로를 이탈할 시엔 영원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고 때로는 나긋나긋하게 또 때로는 아주 엄하게 수시로 안내해온다, 그런 그녀의, 몸매는 비너스처럼 분명 뒤태가 매우 아리따운 여인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직선으로 뻗어있는 도로 위를 달려가고 있을 때 경로를 벗어났다 외쳐대는 다급한 경고문은 이미 무의미하다, 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쫓기듯 떠밀려가는 등뒤로 손을 흔들며 빠르게 멀어져가는 저 경계선 너머의 길, 차라리 쿨하게 포기할 것, 오직 허용된 길 위의 법칙만을 준수 할 것, 하여 또 전진!
앞으로만 전진해가던 한 남자가 도심 속 사찰寺刹 문 안으로 숨어들었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사찰이 침묵의 방어벽 단단히 친다
사찰의 문, 그 안과 밖 경계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버티기 하던, 남자가 끝내 문턱을 넘어 밖으로 걸어 나온다, 문과, 문 사이의 경계의 지점 바로 그 위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사찰査察당하던, 그가 체포 된다, 그에게선 불법 소요주도 혐의가 포착되었다고 신문 속 활자들이 유난히 호들갑떤다, 그 남자는, 단지 비너스 그 아리따운 뒤태에 홀려 넋을 놓고 달려간 죄 밖에 없을 뿐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애초 아리따운 그녀, 따윈 없다 그는, 육중한 철문 안에 갇혔다 밤처럼, 문고리는 밖으로 엄중하게 채워져 있다
해가 저물기엔 아직은 이른 시각, 거리엔 벌써 어둠이 내려앉는다, 도로 위 표지판조차도 선명성을 놓치고 있고 운전대를 잡은 손바닥 안엔 땀이 흥건해온다 이 때, 경로를 벗어났으므로 새로운 경로를 재탐색하겠다는 그녀의 음성이 애국가처럼 경건하게 흘러나온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그 남자의 하루, 되돌이표 후렴구 같은
해가 저물어 컴컴한 저녁, 용산역 기차티켓 발매 창구 앞에서
한 남자가 손 벌려 구걸을 한다
제가요, 표 값이 모자라는 데요, 조금만 보태주세요
제가요, 표 값이 좀 모자라는 데요, 보태주세요
그 남자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손을 벌리고 있다
행인들은 될수록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 위에 새겨진 전자태그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개찰구를 빠져 나간다
저 아득한 아랫녘 길을 향하여
철로는 사방으로 어지럽게 펼쳐져 있고
어쩌다 성큼 다녀온 무등산 중심사
이 밤, 그 아래의 길로 함께 떠났던 사람들 되돌아온다
길 하나 마침 불빛 속에서 또 다른 길에게 손을 내민다
남자는 하루 온종일 매표창구 앞에서 구걸을 한다
그의 과제는 언젠간 넘사벽*인 저 개찰구 당당히 통과해가는 일
그러나 지금 그에겐 너무 요원한, 그래서 끊임없이 구호만 반복해대는
용산역의 하루가 그 남자의 손끝에서 내내 휘돌고 있다
제가요 표 값이 모자라는 데요, 조금만 보태주세요,
제가요 표 값이 좀 모자라는 데요, 보태주세요,
제가요, 좀 모자라는 데요 보태주세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라는 말의 줄임말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주 쓰인다. 곧 능력이 탁월한 어떤 대상이나 인물이 있을 경우 그 대상(인물)과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의미로 쓰이는 신조어.
<시작메모>
―‘시’ 톺아보기
난 아직도 ‘시’와 그 ‘시의 세계’에 대해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론이란 걸 앞세우며 가야할 만큼 그의 필요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일찍부터 글이 고팠고, 써야만 했고, 그것이 하필 시였고…….
그러나 여타의 시인들이 어떤 지표를 세워놓고 그 지표에 심취해가는 모습을 대할 때면 부러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로 인해 불필요하게 생겨나는 제반 경직현상 등에 대해선 오히려 안타까움이 앞섰던 부정적인 영향도 한 몫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시론의 존재적 가치의 유무에 대해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참에 솔직히 치졸한 변명 하나쯤 앞세워 빈약한 시인의 허술함을 슬쩍 덮고 가고픈 계산이 깔려있음도 굳이 부인하진 않겠다. 이런 나를 향해 무책임하다 비난한대도, 어쩌랴 그것이 나인 걸. 나라는 인간 자체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하고 살아본 적이 없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이것이 나이다. 내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갔는지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제 와서 그게 또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 이야기한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어.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었지?
나는 말한다. 어차피 인생사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이게 나이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껏 시를 써 오면서 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한 가지.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어떤 심오한 사색도 어느 광활한 사유의 확장도 그 출발점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한다면, 나의 시는, 내가 추구해가는 내 시의 세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삶이 나의 인생이 그 안에 오롯이 담겨있음일 터. 따라서 그것이 곧 나의 시론이라 주장한다면 지나친 말이 되려나.
여하튼 나는, 나의 시는 오늘도 계속해서 직진 중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언젠간 보다 근사한 시론 하나쯤 우뚝 세워볼 날을 기대해 마지않으며.
━‘바다’, 그리고 환상통
섬, 덕적도. 나는 그 지극히 폐쇄된 공간에서 나고 자랐다. 특히 안개와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섬을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시키고 고립되게 하는 주범, 그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난 까닭 없는 외로움으로 많이 고독하였다. 때로 답답함이 턱밑까지 밀려들 때면 한없는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무엇보다 한평생 산등성이 또는 거친 갯바닥을 훑고 다니며 척박한 삶을 살아내야만 했던 내 부모님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늘 가슴 한 구석을 다치게 하는 이유가 됐다. 특히나 술과 벗하며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는 남자 어른들을 대신해 한 가정의 생활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늘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시절이었다. 그 런 가운데 남다른 감성이 키워졌을까, 초.중등학교 시절 교내 글짓기대회가 열리면 늘 수상자 명단에 오르내리곤 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다는, 고행이다. 상처다. 통증이다. 바다는 그렇게 우리네 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나아가 인생이란 거대한 틀 안에다 독특한 무늬를 새겨놓는다. 바다에서 사계절을 견뎌보지 않은 자, 섬 안의 속살을 직접 만져보지 못한 자들이여, 어쩌다 한 번쯤은 바다 앞에서 경건해지라. 흔들리는 목선에 몸을 싣고서 한 겨울 바다에 나가 몰아치는 한파와 맞서 싸워본 적 있던가. 하루 온종일 굴바위 위에 쪼그려 앉아 얼굴 퉁퉁 부어오르도록 다급하게 손을 놀려 본 적 있던가, 휘청이는 나무 말짱(말뚝)의 뿌리 저 단단한 갯벌 바닥 속으로 꾹꾹 눌러 박으며 차가운 물속에서 허리 한 번 겨우 세워본 적 있던가.
때로는 바다로 간 사람들 더러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날 물속에서 불쑥 건져 올려진 옆집 어린아이의 죽음, 하필 밤이면 만조와 맞물려진 바다에 해일이 일어 바닷가 오두막집 축대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컴컴한 어둠 속에서 우웅우웅 울음소리 허공을 타고 구슬프게 울려 퍼지던 그 밤 그 날의 기억들. 언젠가부터 내 가슴 안에선 물줄기 강물 되어 흘러내렸다. 지금은 섬을 떠나온 지 이미 수십 년, 그럼에도 난 아직도 바다로 인한 환상통을 앓는다. 나의 시도 그렇게 바다와 함께 여전히 통증을 호소하며 밤을 지샌다.
━그럼에도, 햇귀
등단 이후 엉겁결에 받아든 타이틀, ‘시인’. 하지만 그에 걸맞는 시를 쓰지 못한다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다 결국 서울의 한 대학교 문창대학원의 문을 두드렸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진정한 나의 스승이신 신대철 교수님(시인)을 만나게 된다.
“시가 별거에요? 내 맘 속에 있는 이야기 진정성 있게 풀어내면 되는 거지요? 애써 이름 내려 용쓰지도, 거창한 목표 같은 것도 다 부질없어요. 다만 치열하게 쓰십시오. 그러다 어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 시를 읽고 위안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시 한 편을 몇 번 정도 고쳐봤지요? 백 번 이상 고쳐봤나요? 노력해야 해요. 또, 하루에 시를 몇 편씩이나 읽고 있나요? 시인이라면 하루 시작하기 전 적어도 시집 한두 권 정도는 읽고 시작해야 합니다. 적어도 시인이라면은요.” 신대철 시인의 말씀이시다.
시의 세계는 웅대하다. 심히 경외롭다. 차마 함부로 가볍게 범접할 영역이 아니다. 적어도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래서 또 시인들이 심오한 우주의 끝자락까지 머리카락 휘날리며 달려가 보아야 할 이유가 분명 그곳에 있다. 우리 모두 간절히 바라는 일말의 감동도 그러한 수고 뒤 자연스레 얻어지는 결과물일 터. 부디 여전히 시야를 뿌옇게 가로막고 선 안개숲 저 너머를 향해 포기하지 않고 다만 한걸음씩 천천히 보폭을 내딛는 하루가 지속되기를. 그러다 어느 날 불쑥 현현되는 오로라처럼 어쩌면 길목에서 환하게 웃는 시의 햇귀를 만나는 행운이라도 맞닥뜨린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난 오늘도 그렇게 행복한 꿈을 꾸며 또 하루를 보낸다.
<자술연보>
·1960년 3월 1일 경기 덕적도에서 출생(현재는 인천시로 행정구역명 변경).
·1966년~1975년 덕적초등학교, 덕적중학교 입학 및 졸업.
·1975년~1978년 인천 문성여자상업고등학교 입학 및 졸업.
·1980년~1981년 덕적면사무소 근무.
·1994년 1월 월간 《예술세계》 시 부문 당선으로 등단.
·1994년~1998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및 졸업.
·1998년~2002년 웅진씽크빅 학습지 교사 및 관리자 역임.
· 2001년 12월 ‘웅진씽크빅 문봉클럽상’ 수상.
· 2002년 첫 시집 『브래지어가 작아서 생긴 일』 발간.
· 2003년 3월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입학.
· 2004년~2006년 속독논술학원 운영.
·2006년 2월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졸업.
(「무속의 구도적 관점에서 본 강은교의 시세계 비평」으로 석사학위 취득)
·2006년 3월 국민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입학.
·2006년~2007년 서울시 노원, 송파 등 다수의 중학교에서 방과 후 논술교사로 활동.
·2007년 한국학술진흥원 주관 ‘미래한국 100년 인문장학생’에 선정.
(졸업 시까지 학비 전액 지원 받음)
·2008년 5월 ≪우리어문학회≫, 『우리어문연구』제31집에 「오장환 시의 공간의식 연구- 문.항구.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가 게재됨.
·2008년 8월.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오장환의 시세계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2008년 9월~2010년 12월 국민대 출강.
·2010년~2012년 대입컨설팅학원 운영.
·2012년 “고향 출신 시인초청 문학강좌”(국어교과의 날, 덕적중고등학교)
·1994년 월간 《예술세계》 1월호에 시부문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하다. 이후 가정형편상 상업고 진학으로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하고자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 졸업하였다. 졸업하면서, 학교에 맨 처음 입학했을 당시 선배들로부터 신입학생 대비 약 2%만이 정상적으로 졸업의 관문을 뚫는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공부가 어려웠음에 감회가 새로웠다. 가정과 양립하려니 더 그러했던 것 같다.
·1995년 습작기 때부터 시를 지도해 오셨던 성춘복 선생님의 권유로 “죽란시동인회”란 모임을 결성하다. 하두자, 김미녀, 나숙자, 권옥희, 서주석, 남인희, 강연화 시인들과 동인활동을 하면서 「여유당 뜰을 걷는 구름의 말씀」, 「장미차를 생각함」 등 두 권의 동인사화집을 발간하였다. 이 때 필자가 ‘죽란시 동인회장’에 반강제로 선출되면서 당시 총무였던 하두자 시인과 지금까지 긴밀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년차 되던 해에 강연화, 서주석, 남인희. 하두자 시인등과 함께 회에서 탈퇴하였다.
·생업을 위해 학습지 교사를 지원하다. 여러 어려운 과정을 거쳐 우수교사가 되고 한 해에 100명 이상의 회원을 늘려야만 받는다는 ‘문봉클럽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광화문 근처 모 호텔에서 시상식이 있었는데 당 학습지광고 모델로 주가를 높이던 백지연 MBC 아나운서도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부상으로 황금열쇠 1냥을 제공받았다.
·2002년 예술시대 작가회(이하 ‘예작회’로 표기) 회장을 맡으면서 “‘한강맑히기’ 선상시낭송회” 행사를 한강유람선에서 개최하다. 이계진 당시 KBS 아나운서와 이춘재 시인의 공동사회로 진행되었다. 이주환 시인의 시(제목:청바지와 물고기)를 시극화하여 시극공연도 하였다. 시극엔 이주환, 김훈영 시인, 전수림 수필가 등이 참여하였으며 배경음악엔 나유성 작곡가가 무료로 협조해 주셨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김남조 시인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던 일이다. 얼굴도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저에게 직접 전화하셔서 “우리 문단에 이런 큰일을 하는 여류시인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고맙다. 선배문인으로써 힘을 주고 싶어서 전화했다” 라고 말씀해주셨다. 처음엔 김남조 시인의 존함을 내가 잘못 들었거나 혹은 전화를 잘못하셨거나 한 줄로 알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이렇게 지켜보는 문단의 큰 어른이 계시다는 것에 한편으론 황송하면서도 자랑스러웠다.
행사진행은 200여명이 넘는 문인들과 일반인들을 합하여 약 3~400여명이 참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낭송에는 황금찬, 허영자, 문효치, 나호열, 하두자, 정인관, 홍금자, 오만환 시인 등 약 20여명의 시인들이 참여하였고 유람선 내부에 회원들이 한강을 주제로 한 시화를 직접 제작. 전시하였다. 그 해 연말 ‘예작회 동인지 출판기념회’ 행사에 감사의 의미로 김남조 선생님을 직접 모셔와 초청 강연을 들었다. 몸이 편찮으신 가운데에서도 흔쾌히 응해주셔서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2003년 국민대문창대학원에 입학을 하다. 그곳에서 만난 신대철 교수님(시인)은 박두진 시인의 직계 제자이시다. 그래서인지 박두진 시인과 참 많이 닮아있다. 신대철 교수님은 박두진 선생과의 숱한 일화들을 수업시간 틈틈이 말씀해주시면서 시인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자세를 알려주셨다. 나는 문창대학원 강의를 듣는 내내 안일하게 살아온 자신을 책하면서 종종 가슴으로 울면서 귀가하곤 하였다. 다만 신 교수님께서는 자신에겐 더없이 엄격하신 관계로 함부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큼은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시는 참 따뜻한 분이셨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인도를 위하여」란 시로 등단(1968년)하신 신 교수님께서는 당시엔 상당히 주목받는 시인이셨다. 하지만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약 23년간) 필을 접으셨었고 문단에서의 통상적인 활동조차 단호히 거부하신 채 홀홀단신 칩거해오셨다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나이가 드시고. 조금은 유해졌다 생각될 무렵 ‘창비’에서 문학상을 준다하여 갔더니 아는 이 하나 없어 조금 창피했었단 말씀을 하시며 아이처럼 웃으시던 모습이 인상이 깊다. 그분을 만난 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커다란 행운이었다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또 한 분의 비평 부문 지도교수였던 황광수 교수님의 “무식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는 내가 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릴 수 있게 한 작은 촉매제가 되었음에 감사드린다.
·2006년 국민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등록을 하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의 필요성이 간절해왔다. 신대철 교수님께서는 박사학위 공부가 창작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시면서도, 다른 시인의 작품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일은 좋은 일이니 열심히 해보라 격려해주셨다. 덕분에 이 때 참 많은 시인들의 시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 작품들을 두루두루 접하게 된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오장환의 「병든 서울」은 당대 우리나라의 혼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34세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작고한 오장환 시인은, 해방을 앞 둔 매우 혼란한 시기에도 투병생활을 지속해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인텔리라 칭하는 문단 및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좌우이념 대립이 첨예화하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오장환 시인은 “서울이 병들고 있다”고 작품 속에 슬픔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오장환은 일찍이 러시아(구 소련) 반체제 시인인 예세닌에 심취하였다. 특히 예세닌과 프랑스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였다. 이러저러한 영향 때문이었을까, 이후 오장환은 월북하였다. 그리고 북한 김일성의 주선으로 러시아로 가 신병 치료를 받는 등 나름의 혜택을 입는다. 오장환은 「성벽」 등의 초기 작품에서는 매우 진보적 성향을 보였으나 월북 후 역시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체제 시로 전향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가치가 훼손되기에 이르렀고 특히 나라의 해방은 보지 못한 채 지병으로 숨지고 만다. 이러한 오장환 시인의 굴곡진 인생사가 나로 하여금 오장환 시인을 연구하게 한 동인이 되었다.
·‘문. 항구, 길’이라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오장환 시인의 공간의식」을 좀 더 내밀하게 연구한 논문이 우리어문학회, 《우리어문연구》 학술지에 게재되는 영광을 얻다. 2015년 5월, 예작회에서 오장환문학관을 탐방하는 문학기행 행사를 치루게 되었는데. 이 때 학술지에 발표된 본 자료를 토대로 오장환 문학관에서 세미나를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다. 예상 외로 너무나 열심히 듣던 회원들의 모습에 내가 되려 놀란 기억이 있다.
·2012년, 인천시 덕적중고등학교에서 고향 출신 시인으로 초청되어 문학강좌를 열다. 고향 후배들과 함께 했던 뜻 깊은 시간. 덕적도엔 유독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어 있고 각처에서 모두들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대표적 시인으로 장석남 시인이 있으며 이외에 필자를 포함, 이세기. 문신진, 김덕천 시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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