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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근작읽기/권순/못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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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185회 작성일 17-01-0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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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읽기

권순





못가에서 신발을 본 날은
밤새 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을 꾸었다
수없이 자맥질을 하는데 물의 결을 스치며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이 지나갔다
본 듯한 얼굴이었다


못가에는 구두 한 짝 가지런하였다
그 속에 꽃잎 한 장 날아와 앉았다
검은 구두 속이 연분홍으로 환했다


어쩐지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은 어스름 속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귓전이 울음소리로 쟁쟁하였다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달려온 여자가 구두를 끌어안았다
꽃잎이 천천히 떨어졌다
먼 곳이 부르는 듯 얄팍한 생이 하르르 내려앉았다


한 생이 그렇게 가라앉고
수면 위에는 밀서 한 장이 떠올라 물살에 찢겼다
고요하였다
고요의 내면이 바뀌고 있었다






여자 3호



그녀는 탐색 중이다
누군가 변덕을 부리거나 그녀를 믿지 못할 때면
주저 없이 재탐색을 시도한다
창에 불이 켜진 동안은 쉬지 않는다
그녀의 혀는 구강기 아이처럼 말랑할 것이다


그녀는 좌우로 굽은 도로를 기억한다
들판과 강물을 기억한다
들판과 강물 사이 절집과 밥집의 내력을 알려준다


그녀가 사라졌다
정지된 화면은 막 지나온 해변을 꽉 물고 있다
탐색에 몰두하던 그녀가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


어떤 견딜 수 없는 혼란의 순간이
그녀에게 찾아온 것일까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더듬어 본다
서둘러 봄을 맞으려고 먼 바다에 온 때문인가
바닷물이 노을에 물든 때문인가
노을에 취한 우리가 서로를 더듬거린 때문인가


억새가 물결치는 밤이다
무심한 듯 고갯길을 내려오는데
그녀의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잠시 후 좌회전입니다
-좌회전 후 직진입니다






현기증



지금 동쪽으로 가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뒤로 돌아가는 것일까
서쪽 정문으로 들어 온 여자들이 보리밭을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그녀들 뒤에는 절름거리는 노인이
발을 끌며 뒤따라 간다
느리거나 빠르거나 모두 동쪽으로 간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젊은 사내가
날개죽지에 여자를 끼고 숲으로 간다
저들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뒤로 돌아가는 것일까


분수대 앞 벤치에 엄마와 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 중이다
-엄마, 언제 집에 가
-지금
-지금이 언제야
-지금은 언제나 네 발등에 붙어 있단다


아이가 제 발등을 내려다보며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뒤로 돌아가는 것일까






당신, 거기



아직도 있는지요, 봉긋한 잠적 앞에.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오십을 다 넘긴 거죽들이 왔어요.
건너편 산그늘이 깊어지고
무덤 옆 오동이 수십 년 잎을 털어내는 동안,
삼베 끈으로 질끈 묶인 몸 육탈은 되었는지요.
가늠할 길 없는 어둠 속에서
뼈를 휘감으며 쳐들어오는 나무뿌리들을 어찌 견디고 있는지요.
자작자작 속으로 스며드는 물기에 축축해진 몸 젖고 또 젖는지요.
온갖 벌레들 달라붙어 마지막 남은 체액까지 빨아내도
거기 누워 자고 또 자는지요.
육신은 다 거기 두고 꿈처럼 깨어나서
그 옛날 사랑방에 헛기침으로 머무는지요.
양지바른 저 비탈에 옮겨 앉아
싯퍼런 잣나무 둥치에 몸 대고,
더운 몸을 식히고 있는지요.
床石에 나와 앉은 송장메뚜기처럼
여기 남은 쓸쓸한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아버지, 풀 좀 내릴께요.






사과 반쪽, 반쪽 사과



사과 반쪽이 마르고 있다. 막 늙어 버린 여자의 입가처럼 쪼글하다. 붉은 기운을 잃고 있다. 수분이 빠져나간 껍질과 과육 사이에 밀고 당긴 흔적이 있다. 아직 사과임을 잊지 않은 듯 씨방만 제 모양을 지니고 있다.


팽나무 항구에 연일 시신이 올라온다. 누군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사과의 힘으로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킬 수 있는가. 오늘도 사과는 없다. 다만 누구의 사과가 진정한 것인지 서로를 긁고 있다. 사과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사과는 눈물 뒤에 오는가. 반쪽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자가 울고 있다. 입가 주름이 파르르 떨린다. 울음 끝에 걸터앉은 그녀, 먹다 둔 사과처럼 누렇다.


반쪽의 사과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살집이 물렁하다. 누런 낯빛이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다. 열어 둔 속심으로 오고 가는 바람과 공기를 받아주며, 제 몸 헐어 낼 곰팡이를 맞으며, 사과에게는 사과의 길이 있는 것처럼 시침 뚝 떼고 앉아 있다.






**약력: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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