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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근작읽기/장종권/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인생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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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읽기
장종권 (시인, 발행인)
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인생의 고뇌
인생 60갑자 한 번 휘돌고 나면 더 이상의 세월은 덤일 수도 있다. 회갑을 맞이할 정도까지만 살아도 더 이상 살아있어야 하는 의미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생명체로서의 강력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없다면 죽음을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를 꿈꾸는 이 마당에 이런 생각은 자칫 망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60년 정도만 제대로 살아도 사람은 얼추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더 배우고, 더 경험하고, 더 발전한들 그것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는 그저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지고지순한 깨달음이 별 무소용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인간 모두가 선각자나 선지자가 될 수는 없다. 그만한 세월에서 얻은 경험과 정보만으로도 세상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어야 그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바른 세상이 아닐까. 이후의 세월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야말로 지겹기조차한 공포와 인내의 시간으로 남아 있게 될 뿐일 테니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생명 에너지를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인생의 정점인 어느 시기를 지나면 이 생명 에너지는 꺾이기 시작하고 대신 죽음이라는 달갑지 않은 존재에 대해 점점 친숙해져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말 친숙해지기 싫은 죽음이라는 존재를 가끔씩 엿보는 일은 등골이 오싹하는 공포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다음 시는 죽음과 만난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생전 기억을 추적하고 생전의 아름다웠을 추억에 대해 아름다운 상상력을 보태가면서 한 생의 의미를 파악해가려는 시인의 의도가 엿보인다. 죽음이란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존재이고 사랑할래야 영 사랑하고 싶지도 않은 두려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모른 척은 할 수가 없어 그 의미 파악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어차피 맞닥뜨려야 하는 존재라면 가능한 한 당당하게 만나고 싶기도 하다. 어차피 이겨낼 수 없는 존재라면 무릎을 꿇느니 먼저 사랑해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시에도 에너지는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는 청춘의 지독한 사랑이 가장 훌륭한 밥이다. 혹독한 사랑도, 뼈아픈 사랑도, 황홀한 사랑도, 모두가 생명 에너지의 극대화에 필요하다. 반면 죽음에 대한 시라면 생명 에너지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 어떤 에너지가 함께할 수 있을까.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사람들은 그리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기묘한 방법이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죽어도 소멸되지 않는 기억 속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저장하고 여기에 연원한 생명 에너지를 불어넣는 방법,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으며, 초연한 자세로 죽음과 연애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못가에서 신발을 본 날은
밤새 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을 꾸었다
수없이 자맥질을 하는데 물의 결을 스치며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이 지나갔다
본 듯한 얼굴이었다
못가에는 구두 한 짝 가지런하였다
그 속에 꽃잎 한 장 날아와 앉았다
검은 구두 속이 연분홍으로 환했다
어쩐지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은 어스름 속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귓전이 울음소리로 쟁쟁하였다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달려온 여자가 구두를 끌어안았다
꽃잎이 천천히 떨어졌다
먼 곳이 부르는 듯 얄팍한 생이 하르르 내려앉았다
한 생이 그렇게 가라앉고
수면 위에는 밀서 한 장이 떠올라 물살에 찢겼다
고요하였다
고요의 내면이 바뀌고 있었다
─「못」 전문
필자가 살던 고향에도 방죽이 있었다. 가끔은 그 방죽가에 고무신이 놓이는 날이 있었고, 이후에는 어김없이 혼굿판이 며칠이고 벌어져 온 동네를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다. 죽은 자는 느닷없이 떠났지만 산 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볼거리이기도 했다. 시인은 우연히 못가에서 신발 한 켤레를 발견하고 죽은 자에 대한 상상의 세계로 뛰어들기도 한다.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없이 자맥질’하다가 숨을 거뒀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그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빈 신발짝에 하르르 떨어져 앉는 꽃 한 송이, 바야흐로 생명 에너지는 사라지고 우주 속에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간다. ‘한 생이 그렇게 가라앉’은 것이다. 죽은 자의 마지막 밀서 한 장이 떠오르지만 그것은 물결과 세상의 고요 속에 묻혀 함께 고요하다. ‘못가에서 신발을 본 날은/밤새 검은 물속을 헤집는 꿈’을 꾸는 시인은 죽은 그가 마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죽은 자의 생전 기억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와 생의 지난한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그것이 산 자들의 죽음과 화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절대적 한계 안에서의 긍정적이고 따듯한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아직도 있는지요, 봉긋한 잠적 앞에.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오십을 다 넘긴 거죽들이 왔어요.
건너편 산그늘이 깊어지고
무덤 옆 오동이 수십 년 잎을 털어내는 동안,
삼베 끈으로 질끈 묶인 몸 육탈은 되었는지요.
가늠할 길 없는 어둠 속에서
뼈를 휘감으며 쳐들어오는 나무뿌리들을 어찌 견디고 있는지요.
자작자작 속으로 스며드는 물기에 축축해진 몸 젖고 또 젖는지요.
온갖 벌레들 달라붙어 마지막 남은 체액까지 빨아내도
거기 누워 자고 또 자는지요.
육신은 다 거기 두고 꿈처럼 깨어나서
그 옛날 사랑방에 헛기침으로 머무는지요.
양지바른 저 비탈에 옮겨 앉아
싯퍼런 잣나무 둥치에 몸 대고,
더운 몸을 식히고 있는지요.
床石에 나와 앉은 송장메뚜기처럼
여기 남은 쓸쓸한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아버지, 풀 좀 내릴께요.
―「당신, 거기」 전문
죽은 자는 죽어서도 생시와 같은 고통에 빠진다. 물론 살아있는 자의 해석이다. 노년의 여유를 챙겨보지도 못하고 ‘50’을 넘기지 못한 인생이어서 그의 인생이 더욱 안타깝다. 자식들을 키우느라 애만 쓰고 쓸쓸히 떠난 인생은 죽어서도 ‘가늠할 길 없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뼈를 휘감으며 쳐들어오는 나무뿌리들’을 견디고 있다. ‘온갖 벌레들 달라붙어 마지막 남은 체액까지 빨아내’고 있다.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으나 매한가지로 인식이 된다. 인생은 고뇌와 갈등의 연속이고 그것은 죽는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다. 죽은 자의 눈에는 산 자의 모습도 ‘쓸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애써 죽은 자의 무덤을 쓸어내리며 풀을 내린다. 죽은 자의 영혼과 함께 자신의 가슴도 쓸어내린다.
우리는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며 살아야 어쩔 수 없는 한 인생을 의미 있게 보냈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은 가끔 거대한 벽으로 나를 둘러치고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평화로운 세상으로의 출구를 막기도 한다. 그 벽은 세상이 나를 향해 이유도 없이 둘러친 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세상을 향해 접근 금지라는 단호한 벽을 둘러치는 경우도 없다할 수는 없다. 자의든 타의든 그 벽으로 인해 나와 세상은 단절이 되고 평화는 고난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뒤바뀌는 것은 아닐까.
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인생의 무게와 고뇌, 그리고 기억은 아무리 아픈 것이어도 종내는 아름답게 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죽음의 얼굴이라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이름에 간신히라도 용서라는, 혹은 사랑이라는 기호를 붙여 친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사과 반쪽이 마르고 있다. 막 늙어 버린 여자의 입가처럼 쪼글하다. 붉은 기운을 잃고 있다. 수분이 빠져나간 껍질과 과육 사이에 밀고 당긴 흔적이 있다. 아직 사과임을 잊지 않은 듯 씨방만 제 모양을 지니고 있다.
팽나무 항구에 연일 시신이 올라온다. 누군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사과의 힘으로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킬 수 있는가. 오늘도 사과는 없다. 다만 누구의 사과가 진정한 것인지 서로를 긁고 있다. 사과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사과는 눈물 뒤에 오는가. 반쪽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자가 울고 있다. 입가 주름이 파르르 떨린다. 울음 끝에 걸터앉은 그녀, 먹다 둔 사과처럼 누렇다.
반쪽의 사과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살집이 물렁하다. 누런 낯빛이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다. 열어 둔 속심으로 오고 가는 바람과 공기를 받아주며, 제 몸 헐어 낼 곰팡이를 맞으며, 사과에게는 사과의 길이 있는 것처럼 시침 뚝 떼고 앉아 있다.
─「사과 반쪽, 반쪽사과」 전문
죽음의 이유는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신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인간의 잣대 아래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래서 인간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고와 관련된 어떤 죽음에도 인간의 책임을 추궁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사회적 시스템에라도 문제가 있는 것일까. 시인은 ‘사과의 힘으로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킬 수 있는가’를 묻는다. ‘사과는 없’고, ‘다만 누구의 사과가 진정한 것인지 서로를 긁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사이 먹지 못한 ‘사과’ 반쪽이 마침내 마르고 있다. ‘사과’가 무슨 맛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길이 있는’ 사과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사과는 ‘울고 있는’ 여자들을 그나마 달랠 수 있지는 않을까. 죽은 자는 이유도 없이 떠나고 우습게도 ‘사과’만 남은 사회는 갈수록 아리송하기만 하다.
**약력:전북 김제 출생.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아산호 가는 길』, 『꽃이 그냥 꽃인 날에』,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호박꽃나라『 외. 장편소설 『순애』. 창작집 『자장암의 금개구리』. 인천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계간 《리토피아》 주간.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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