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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신작특선/정남석/덩굴장미 담장이 있는 풍경의 이해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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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정남석
덩굴장미 담장이 있는 풍경의 이해
담장은 담장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얼기설기 담장을 끌어안고 있는 덩굴장미가 안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장미는 새순을 어디에 둘지 몰라 가시를 키웁니다. 가시는 담장이 상처 입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담장은 이미 어깨를 내어준 것이고 장미는 담장을 지켜주려는 것인데. 바람은 호흡을 몰아쉬며 끼어든다.
이것 보세요.
다 바람 때문이라고요.
은근슬쩍 죽고 못 사는 사이인 것 같기도.
덩굴장미 담장이 있는 풍경의 오독
두려울 것 없다
몸을 더 가까이 붙이면
세상은 스스로 경계를 풀고
은밀한 구석을 믿어줄 것이다
이왕 마음을 먹은 것인데
꽃잎이 꽃잎을 누르듯이
술술 담장을 넘어라.
별것 없다
어깨를 한층 낮추면
시간도 잠시 숨을 멈추고
찐득한 애정을 지켜줄 것이다
이왕 곁을 내준 것인데
들숨 날숨이 섞이듯이
화끈하게 등을 들이밀어라.
북으로 난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옛집 마루는 고작해야 서너 평, 흙벽의 반을 가르고 창문이 달려
있다. 송판을 이어붙인 창문은 바람이 숭숭 드나들어 비닐을 덧대고
아예 못질을 해버렸다. 틈 사이로 소나무 그림자도 비치고, 참새 소
리도 들을 수 있었다. 별빛, 달빛 다 어둠인 채로 지나가고 말았다.
어쩌다 들어오는 빛은 모두 칼을 쥐고 있어, 대남방송에 저절로 귀
가 기울여 졌다. 1. 21 무장간첩 침투사건 이후 산이란 산 근처에는 얼
씬도 못했다. 한 번쯤은 뒷산으로 난 길을 멀리 가보고 싶었다.
살짝살짝 보이는 틈이 아니라 활짝 열리는 창문으로 가보고 싶었다.
소나무가 방을 염탐하다
발코니를 넘어온 소나무가
그녀의 방을 염탐한다.
겉씨식물인 걸 아는 그녀
창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어두워져야 그 방은 불이 켜진다.
나무는 부지런히 새순을 달았으나
그녀는 돌아와 커튼부터 친다.
새들의 토론도 길어진다.
입이 잰 그들도 답답한 모양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창을
날카로운 솔잎도 넘지 못한다.
앵월櫻月
앵두는 발갛게 익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꿈에서도 꼭 쥔 주먹은 펴지지 않았다.
너무 잘 자라서 탈이네요.
앵두는 안 열리고 입만 무성해 진다니까요.
사람들은 웃자라는 가지를 모두 잘라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앵월에 남의 손에 넘어갔다.
헛열매를 따내시던 어머니 손도
앵두물이 든 내 손도
주먹을 움켜쥐어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앵월에는 바람소리도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시작메모>
잎도 없이 꽃부터 피우는 목련을 보며 운명적이란 단어를 떠올려본 기억이 난다.
목련은 누군가에게 초인종을 누르고 봄을 알린다.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이른 새벽,
짙은 안개의 문을 열고 나오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상등을 깜빡이며 오고 가는 사람들조차 뚜렷한 시야를 가진 것은 아닐지 모른다.
초록이 한동안 수평인 여름을 위해 물을 주어야 할 때
발끝을 세워 높은 곳으로 아직 충분하지 않은 습기들을 모아본다.
**약력: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검정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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