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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신작시/김영준/화들짝, 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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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정수
화들짝, 봄
노총각 동생이 집을 나간 후부터 서울역 지하도 지나다닐 때마다 흘깃, 등 돌리는 얼굴들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느닷없이
검은 손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코 틀어막은 손가락 두 개
길을 종종댔다 가출한 동정은 따스한 눈으로 건너와
두 손에 건네지는
차가운 금속성, 혹은 쨍그랑 앞뒤로 젖혀지는
하루의 질책
외따로 떨어져 잠든 종이박스 왈칵 들춰보고 싶은 충동에 등 푸른 계단 아래로 굽고
마지막 통화와 함께 사라진 욕설
화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서울을 떠날 때마다
뒤 돌아보는, 세 살 터울 같은 습관
네모난 풍경에 갇히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잦은 외출이 해감 될 즈음
면역력 약한 삶 하나가 환절기를 넘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세월 귀에 머물던 절벽의 야유에서 이명의 꽃 피었다지고
서울역 지하도 지나갈 때면
앞만 보고 걸었다 봄은
웅크린 몸에 푸른 물 불러들이는
소란한 감전
붉은 신호등에 숨겨둔 하얀 비명
화들짝, 길을 건넜다
잠시
빠른등기를 부치고 소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핀 지 꽤 오래된 배롱나무꽃이 고요한 새소리를 불러들인다 우표 같은 꽃들이 길의 미간에 붙고 흰 고양이 품에 안은 젊은 여자가 공원을 배회한다 시소를 건너온 눈빛으로 느닷없이 비가 내리고 공원 입구에서 끊긴 길에 빗물이 갇힌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귀가한 날들이 미끄러져 쥐똥나무 울타리에 빽빽하다 각자 살아온 날들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더 키를 낮추고 빗방울 자리 옮겨가며 장기를 두던 두 노인은 결국 비겼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도 비겼다 별거가 길어질수록 꽃진 상처는 잠시 머뭇거린 비좁은 공간, 기둥을 타고 올라간 등나무의 하늘이 가로로 비척거린다 늦은 오후인 양 배달된 우편물에 짧고도 긴 슬픔은 등을 기대 누울 것이다 공원을 나서던 젊은 여자가 흠뻑 젖은 어깨처럼 바라본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에 오래 시선이 머문다
**약력: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경희문학상 수상. 빈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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