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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신작시/이명/가을비는 몽유병 환자처럼 내린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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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명
가을비는 몽유병 환자처럼 내린다
비 내리는 마로니에 공원 앞 횡단보도
한 움큼의 약 봉지를 받아들고 약국을 나왔다
신호등은 선혈처럼 붉었다
맞은편 신호등 옆에는 박인환이
만삭의 젊은 여인과 함께 핏기 없는 얼굴로 서 있고
그 곁에 버버리 옷깃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김수영이 서 있었다
몇 사람 건너 백석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는 이상이 반팔 옷을 입고 비를 맞으며 막 내려오고 있었다
저들은 왜 또 추적추적 비를 타고 내려와 여기에 있는가
태우다 남긴 꽁초와 마시다 남은 해장술과
마무리 하지 못하고 버려둔
너덜거리는 몇 줄의 시 때문인가
잎은 지고 바람은 불고 비는 내려 질척한 보도에서
나는 플라타너스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저들이 길을 건너올 때까지 기다리며 서 있었다
떨어지는 누런 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문 해변
백사장, 등이 굽었다
서퍼들은 햇살에 검정깨처럼 털려나간다
물결이 달려와 가슴에 안기자 해변은 환하게 젖는다
윤기 없는 모래도 처음에는 매끈한 바위였을 것이다
섬을 출산해 놓고
거친 파도를 다독이다 보니 잘게 부서졌을 것이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처럼 몸부림치며
한 점 남김없이 하얗게 눈물을 거두어 갔을 것이다
햇볕에 그을리며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아늑하게
내게도
물기를 빨아들이는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해질녘 해변은 더욱 촉촉이 젖는다
**약력: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벌레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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