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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신작단편/장순/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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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장순
캐릭터
모니터를 바라본다.
<외톨이1 : 듣고 있나요? 거기에 있는 건가요? 상관없어요.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요. 오늘은 날씨가 맑고 화사하네요. 하지만 내 마음은 왜 자꾸만 우울해지는 걸까요. 당신도 그런 가요? 왠지 당신은 포근한 사람 같아요. 당신을 만난 적은 없지만 느낄 수 있어요.>
채팅창을 바라보며 자판 위에 손을 얹는다. 하지만 속내를 끄집어낸 자판의 조합들을 나는 채팅창에 올리지 못한 채 결국 Esc 키를 누르고 만다. <외톨이1>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누군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외톨이1>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외톨이1>의 방문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게 된지 벌써 6개월째다. 모니터 속의 나는 <외톨이>이다. 그러고 보면 <외톨이1>은 나를 모태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캐릭터다. <외톨이>는 나에 의해 먼저 선택되어졌을 뿐이다. <외톨이1>은 <외톨이>를 얻지 못한 결과물이다.
두 대의 컴퓨터와 두 대의 모니터는 내 무뎌진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 속에는 늘 내가 있다. 나는 모니터 속의 나를 현실의 나보다도 더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한다. 모니터 속의 나를 확인하는 것이 나의 일과며 유일한 낙이다.
평범한 일상의 일탈은 실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너를 사랑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원하지는 않아, 라고 남자가 말했다.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가 내게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거짓으로라도 우리의 사랑이 진실했다는 말을 남자에게서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나의 기대마저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남자가 나를 짓밟은 날 나는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그리곤 나를 철저하게 짓밟았고 한 생명을 짓밟았다.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내겐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단지 남자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정작 나 역시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그 결심과 함께 엄마의 비보를 알리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뺑소니 교통사고라고 했다. 내게 혈육이라곤 엄마뿐이었다. 고아였던 엄마는 사랑하던 남자로부터 버림받았다. 엄마를 버린 남자가 나의 아버지다. 엄마는 끝내 나에게 아버지에 대한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나 역시 서른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움보다도 원망이 컸던 탓이었다. 나도 엄마처럼 고아가 되었다. 그렇지만 내 자궁 속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을 길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더더욱 엄마의 영정을 바라볼 수 없었다. 평범했던 나의 일상은 황폐해진 내 자궁처럼 병들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문을 닫아걸었다. 문 밖 세상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작고 초라했다. 문을 닫아버린 이상 남자의 배신으로 슬퍼해야할 이유도 없었고, 엄마를 죽게 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세상과의 단절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기 시작했다.
Ctrl+Esc 키를 눌러 나는 잠시 게임에서 벗어난다. 곧바로 인터넷마켓에 접속 로그인한 뒤 식품 코너를 클릭한다. 라면과 몇 가지 건어물 그리고 김치를 장바구니에 담은 다음 마지막으로 위생용품 코너에 들려 생리대를 사는 것으로 쇼핑을 마친다. 결제를 마치고 다시 게임 속 나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4분 50초다. 5분이 지나게 되면 게임과의 접속이 자동으로 종료되기 때문에 나는 쇼핑 시간을 되도록 지키는 편이다. 게임이 종료되면 그것은 곧 손실이 된다. 계정과 비밀번호를 눌러 재접속을 시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점 또한 새로 개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동안 내게 올 손님이 다른 상점에서 아이템을 사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허비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게임으로 인한 강박증에 시달린 지 오래다. 서버 다운이 되거나 서버 정기 점검이 있는 날이면 나의 그러한 증상은 더더욱 극심해진다.
내가 개설한 상점은 몇 시간째 거래 실적이 없다. 거래 실적이 있었다면 채팅창에 거래자와 품목이 나열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루해 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세월을 낚으려는 강태공처럼 나 역시 기다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지 않은 한 아이템은 언젠가는 팔리게 되어 있다. 드문 일이지만 때로는 책정해 놓은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될 때도 있다.
- 캐릭터는 또 다른 나입니다.
게임 내의 문구처럼 나는 모니터 속에 존재한다. 그 문구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보면 난 폐인이 분명하다.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게임 중독증이나 폐인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 단어들은 내게서 무덤덤해진지 오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지만 게임을 하다보면 게임에 정신이 팔려 식사 거르는 것을 밥 먹듯이 하곤 한다. 오늘 역시 나는 아침과 점심을 거른 채 게임에 몰두해 있다. 외톨이는 사냥을 한다. 혹은 게임 속 세상의 방랑자가 되어 여행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외톨이가 은둔자로 불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외톨이의 머리 위에는 은둔자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나의 오른손은 마우스를 왼손은 자판의 단축키를 쉴 사이 없이 누른다. 그 움직임은 과격함과 단조로움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게임 속엔 분명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게임의 유혹을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모니터 속 또 다른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또 다른 나를 보며 살짝 윙크를 보낸다.
늦은 밤이 되어가지만 실내는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뿐이다. 불을 켜지 않아도 방안은 그럭저럭 환하다. 그즈음 나는 시장기를 느낀다. 주방으로 향하면서도 시선은 모니터를 벗어나지 못한다.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는 주전자를 대충 행군 후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후다닥 모니터 앞으로 달려간다. 나는 애인의 손이라도 잡는 듯 설레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살며시 움켜쥔다. 핸드폰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다음이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서 발송된 문자메시지에는 등록해 놓은 물품을 구매하겠다는 구매자의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다. 나는 먼저 거래 사이트에 접속한 후 구매자에게 전화를 건다. 상대편의 목소리는 투명하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상투적이다. 나는 철저하게 모니터 속의 내가 되어 버린다. 어차피 거래를 끝내면 그만이다. 친절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관계가 성립 됐을 뿐 그 이상은 서로에게 존재의 가치가 없다. 각자의 몫일 뿐이다. 늘 해오고 있는 일이지만 거래를 할 때마다 나는 조심스럽다. 한순간 방심으로 사기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의 수법도 상상을 초월한다. 게임 업체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사기를 당했는데 복구를 해 줄 수 없냐는 문의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온다. 사기꾼들이 언제 내게도 마수를 뻗어올지 모를 일이다. 방심은 금물이다.
구매자에게 물품을 인계하고 판매 대금이 입금된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거래는 완료된다.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래를 마치고 시장기가 느껴져 가스레인지를 쳐다보지만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는 묵묵부답이다. 불을 켜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 고객 여러분의 건전한 게임 문화 정착을 위한 작은 노력이 사이버 문화 선진국으로 향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컵라면에 물을 부어 들고 모니터 앞으로 다가 갔을 때 초인종이 울린다. 낯선 방문의 실체를 짐작하며 나는 현관으로 다가가 잠시 망설인다. 인터넷마켓에서 온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연다. 마켓 직원이 앞에 서 있다. 낯선 얼굴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2주일에 한 번씩 이 남자의 방문을 감수한다. 그것은 내가 현실에 존재하는 이유다. 현실 속의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와의 만남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물품을 확인하기 위해 투명한 배달상자를 열었을 때 생리대가 볼썽사납게 고개를 든다. 남자가 돌아간 후 보조키를 걸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바깥출입을 언제 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세 달 전쯤, 6개월 전쯤, 어쩌면 일 년 그 이상 되었는지도 모른다.
거실에 걸려 있는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본다. 엄마는 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움과 서글픔이 깃들 즈음 나는 변함없이 모니터를 의식한다. 퉁퉁 불어 터진 컵라면으로 시장기를 달래면서도 내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 속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한다. 또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진통제를 서랍장에서 찾아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나는 그 고요함에 익숙하다. 그래서 일부러 스피커도 켜지 않는다. 숨소리조차 적막함으로 자지러든다. 채근하지 않더라도 모니터 속의 나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잠시도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그 사이 생리통은 점점 더 심해진다. 더는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침대 위에 눕는다. 누운 상태에서도 온 신경은 모니터 속의 나를 의식하고 있다. 모니터 속의 내가 나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한다. 귀여운 녀석, 네가 나라는 걸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외톨이1 : 거기에 있나요? 아마도 거기에 있겠죠. 지금 눈이 와요. 진짜로 눈이 와요. 전 커피를 마시고 있어요. 당신도 그런 가요? 눈을 기다렸는데 왜 반갑지 않은 거죠.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눈이 온다고, 그런데 어쩌라고. 나는 침대위에 누워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끔뻑일 뿐이다. 감정의 골은 무뎌질 대로 무뎌진지 오래인 모양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모니터 앞으로 달려간다.
- 마법서 <어드밴스 스피릿>을 허봉창에게 판매했습니다.
아이템창의 물건들이 사라지고 게임머니인 아데나가 불어나기 시작한다. 아데나는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서 현금으로 쉽게 교환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아데나는 현금인 셈이다. 게임과 현실은 그렇게 구별 짓기에는 모호한 선으로 희미하게 그어져 있다. 더더욱 나에겐 게임과 현실이 공존하고 있다. 나는 팔려나간 물건의 빈자리를 다시 세팅하고 침대로 가서 눕는다. 허봉창? 봉창 두드린다고 할 때 그 봉창인가? 왜 하필이면 캐릭터를 봉창으로 정했을까? 아마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궁금증이 일 즈음 전화벨이 울린다.
-어떻게 된 애가 그동안 전화 한통도 하지 않니.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왜 결혼식에는 오지 않았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내일 시간 어떠니? 집들이에 갈 거지?
모니터 속의 또 다른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옆의 또 다른 내가 역시 나를 본다. 아랫배를 짓누르는 생리통은 너무도 기분 나쁘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수면제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생리통과 불면증은 끝내 약의 힘을 이기지는 못한다.
대신해 주면 좋으련만 모니터 속의 나는 나를 향해 무표정할 뿐이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약기운이 모든 기능을 잠식해 들어갈 즈음 나는 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잠들기 직전에 느껴지는 기분 나쁜 감정들의 조합들이 나는 싫다. 그 기분 때문에 나는 수면을 흔쾌히 용납하지 않는다. 낮선 누군가가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물론 착각이다. 누군가 나를 부르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지만 마음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무거워진 눈꺼풀 너머로 희미하게 그 누군가가 보인다.
<외톨이1 : 아직도 거기에 있나요? 잠이 오지 않아요. 벌써 며칠째 뜬 눈으로 보내고 있어요. 실컷 잠을 잤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언제부턴가 그래요. 어느 날 생각해 보니 달콤한 휴식이 그리웠어요. 그러고 보면 내겐 그런 휴식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구요. 잠을 자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어요. ……내가 당신의 단잠을 깨운 건가요?>
나의 잠든 모습을 또 다른 내가 지켜보고 있다. 잠든 모습이 평온해 보이지만 가끔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면 결코 만족스런 수면은 아닌 듯 보인다.
스르르 눈을 뜬 나는 한참동안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눈만 멀뚱거릴 뿐이다. 적막의 익숙함이 낯설다. 일어나 앉아 나는 눈을 비빈다. 그리고 모니터를 확인한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는다. 언제부턴가 벽시계는 멈추었고 나는 멈춰진 시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모니터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앉으며 기지개를 켠다. 하지만 좀처럼 개운함을 느낄 수는 없다. 마우스에 손을 얹는 순간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다. 모니터 앞으로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는다. 눈이 초롱초롱 해진다. 이제 나는 모니터 속의 내가 된다.
몸 밖으로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생리혈 때문에 불쾌하다. 어제 배달 업체 직원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그 눈빛. 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생리혈이 불결하게 느껴진다. 게으름을 탓하던 배달 업체 직원의 눈빛을 뒤로 하고 나는 망설인다. 모니터 속의 나는 대화를 주고받지 않더라도 내 속마음을 고스란히 꿰뚫고 있다. 집들이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나는 모니터 속의 나에게 결정권을 떠넘긴다. 두 달 전에도 망설이다가 결국 친구의 결혼식장에도 가지 않았다. 친구의 당부 탓에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모니터 속의 나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 듯 이번에는 흔쾌히 수락한다.
서둘러 샤워를 끝내고 화장을 한다. 거울 속 여자는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과 닮은 내 얼굴을 싫어한다. 정성들여 한 화장을 지운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내 삶은 늘 어머니의 삶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 삶을 애써 부정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나는 결국 현실을 받아 들여야 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겉으로 표현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엄마를 원망할 수도 없다.
화장대 앞에 앉은 여자의 얼굴은 초췌하다. 멈춰진 시계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시계바늘이 움직일 것 같다. 내가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116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시간을 확인해야 할 마땅한 조건을 나는 용인하지 않는다. 오늘처럼 시간을 가늠해야 하는 날이면 당혹스럽다. 그 시간을 건너뛰기 위해 나는 고심한다.
<외톨이1 : 오늘은 좀 늦었어요. 많이 기다렸나요? 그럴 리는 없겠죠. 아마도 당신이 나를 기다릴 일은 없겠죠. 내가 너무도 행복한 상상을 한 모양이에요. 고마워요. 이런 상상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지내실 건가요?>
그는 남자일까? 아니면 여자일까?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순간 밀려온 궁금증에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려다가 포기한다. 멈춰진 시계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나는 막연하게 그가 여자라는 생각을 한다. 옷장에서 어울릴만한 옷가지를 고른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 그래도 가장 무난한 정장을 꺼내 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옷이 낯설다.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낯설다. 침대 위의 정장이 초라해 보인다. 옷이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거라는 것을 나는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도 옷맵시를 살리기 위해 거울 앞에 서서 시간을 보낸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나는 시간의 흐름을 가로 막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솔직히 외출하는 것이 나는 싫다. 그저 모니터 속의 나이고 싶다.
모니터에서 확인된 시간은 오후 5시 20분, 지금 당장 출발하더라도 빠듯한 시간이다. 거울 속 여자는 초췌하다. 나는 현관으로 향한다. 신발장에서 꺼낸 구두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 대충 솔로 먼지를 털어낸다. 구두를 신으려는데 무언가 빠뜨린 것처럼 허전하다. 나는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허전함을 되짚어 본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가스밸브는 잠갔는지, 창문 단속은 제대로 했는지, 혹시 외출 중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할 위험성은 없는지, 다시금 천천히 확인한다. 내 시선은 또다시 모니터 속의 나에게 멈춘다. 나는 차마 모니터 속의 나를 외면 한 채 전원을 끌 수가 없다.
현관 앞에 서자 이유 없이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곧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계속 늦장을 부리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나는 마지못해 구두를 신는다. 구두가 왠지 꽉 끼는 것 같고 불편하다. 또각또각, 몇 번을 맞춰 보고 재 보아도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남의 신발을 신은 것처럼. 나는 신발장에서 굽 낮은 단화를 찾아낸다. 한결 편안함이 느껴진다.
보채듯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모니터 앞에 놓여 있는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지만 전화기는 언제 울렸냐며 벙어리가 되고 만다.
현관문을 열지만 나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그만 문을 닫는다. 내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경직된다. 어지럼증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불안함과 초조함이 내 온몸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다시금 용기 내어 발을 내딛으려 노력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입에서 긴 한숨이 파리하게 쏟아져 나온다.
모니터 속의 내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긴장성 두통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모니터 속의 나를 바라보지만 나는 다가서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다. 내 시선은 모니터를 벗어나 싱크대로 향한다. 싱크대 위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를 바라보며 소매를 걷는다. 싱크대 한쪽에는 컵라면 빈 용기가 온기 없이 쌓여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따듯한 밥을 지어 먹는 것보다 인스턴트에 더 익숙한 편이다. 나는 빈 용기를 대충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다. 주방세제의 거품과 함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수의 감촉이 부드럽다. 전화벨이 기다렸다는 듯 울린다. 내 청각이 잠시 전화벨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손끝에 느껴지던 감촉이 무뎌진다. 전화벨은 한동안 계속해서 내 의식을 지배한다. 전화벨이 멈추자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좀처럼 전화벨 소리가 내 귓가에서 떠나가지 않고 윙윙거린다. 설거지를 모두 끝내고도 나는 수도꼭지를 잠그지 못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쌀을 씻기 시작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쌀알의 오톨도톨한 감촉이 싫지 만은 않다.
어둠 속에서 모니터 속의 내가 손짓한다. 나는 모니터 속의 나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니터 속의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짓는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상냥한 미소에 섬뜩함을 느낀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내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나는 모니터의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감싼다. 나는 어둠 속에서 전원이 차단된 모니터를 바라본다. 조바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칙칙칙칙, 압력밥솥의 압력추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증기가 배출된다. 하지만 그 소리 역시 무감각해진 내 감각들을 일깨우기 보다는 조바심을 더 부추긴다. 울상이 되어 자지러드는 압력추를 진정시키며 나는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앉는다. 한숨을 내쉬듯 압력밥솥이 안정을 찾자 집안에 적막이 깃들기 시작한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적막이 오히려 나를 위로 한다.
모니터를 켤까, 말까 망설이던 나는 모니터 대신 형광등 스위치를 누른다.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셔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 와중에도 나는 모니터를 의식한다. 전원을 켜면 마주하게 될 모니터 속의 내가 나는 그립다. 집착하는 내 자신이 당혹스러워 나는 허둥대기 시작한다. 압력밥솥의 압력추를 재껴 미쳐 빠지지 않은 증기를 빼낸다. 윤기 흐르는 밥을 보면서 나는 억지 식욕을 삼킨다. 포장 김치를 뜯어 국을 끓이는 동안에도 나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조급해진다.
식탁 위에는 밥과 국, 그리고 김치가 놓여진다. 식탁을 마주하고 앉은 나의 모습이 초라하기만 하다. 수저를 들어 밥을 먹으려다가 울컥 밀려나온 설움을 가까스로 참는다. 더 이상 입맛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만 수저를 내려놓는다. 멍하니 식탁을 내려다본다. 혼자라는 것이 서럽고 서글퍼서 코끝이 찡해진다.
나는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컴퓨터 본체의 전원을 차단하지 않은 탓에 나는 여전히 모니터 속에 존재한다. 모니터 속의 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나는 몸을 움츠린다.
외출하기 위해 현관 앞에 섰을 때의 불안함이 다시 나를 감싸기 시작한다. 나는 영영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멀미를 하는 걸까? 가슴이 울렁이기 시작한다. 울렁거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다가 멍하니 창밖의 세상을 짐작하고 상상한다. 자신이 없다. 창문에는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다. 창문을 언제 열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불현듯 창문을 연다는 것에 나는 겁부터 집어 먹는다. 맥이 풀려 침대 위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눈이 온다고 했던가? 지금도 눈이 오고 있을까? 하지만 궁금증은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니터 속의 나를 향해 푸념을 쏟아낸다. 모니터 속의 나는 그런 내 푸념을 상냥한 미소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 모든 것을 모니터 속의 내 탓으로 돌려버린다. 모니터 속의 나를 쏘아보면 그 나 역시 나를 쏘아본다. 그래도 별 수 없다.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은 나는 Restart 버튼을 클릭한다. 뒤이어 모니터 속 나의 고향이, 자궁이 나타난다. 그 안식처에서 나는 다시금 결심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영 모니터 속의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Delete 버튼을 클릭하면서 내 결심은 더욱 확고해진다. 모니터 속 나와의 첫 만남도 이렇게 내 손끝에서 시작되었었다.
30레벨 이상 캐릭터를 삭제하는 데는 7일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삭제대기 시간 중에는 취소가 가능합니다.
<외톨이>의 삭제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OK 버튼을 클릭한다.
9, 8, 7, 6, 5, 4, 3, 2, 1.
모니터 속의 내가 나를 향해 애원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고 만다. 급기야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탓에 나는 미련과 망설임 사이를 오가기 시작한다. 그사이 모니터 속의 나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눈앞이 막막해진다.
이제 나는 죽었다. 모니터 속에서 이제 나를 찾을 수 없다. 모니터 속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자살을 후회한다. 일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어진 것만 같다. 집 안이 텅 빈 것만 같다.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숨소리는 점차 어둠 속으로 자지러든다. 내가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도 나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없다. 나는 버릇처럼 수면제를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무능력해진 내가 침대에 눕는다. 모니터 속의 나는 자살을 했고 침대 위의 나는 자살을 꿈꾸고 있다. 긴 터널 어둠 속으로 나는 걸어간다. 그어둠의 끝에 나 아닌 내가 서 있기를 바라면서.
정신이 점점 더 맑아진다. 나의 내가 그리워진다. 전화벨이 울리지만 내게 전화벨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나의 생각은 온통 나에 의해 삭제된 모니터 속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잠든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내 자신과의 단절로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할지도 모른다.
-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세계라고 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만족감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어둠 속에서 스르르 눈을 뜬 나는 아무런 제약 없이 모니터 앞으로 다가간다. 익숙함이 느껴진다. 나는 철저하게 짓밟았던 나의 자궁을 복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복구시키기엔 상처가 너무도 크다. 그 상처는 끝내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나를 위해 결국 나를 부활시킨다. 사라졌던 모니터 속의 내 형체가 선명하게 윤각을 드러낸다. 모니터 속에서 나 자신을 만나는 순간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하다.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모니터 속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예전에 알아오던 모니터 속의 내가 아니다. 나는 등을 토닥여 그런 나를 위로한다. 나는 자궁 밖으로 손을 뻗는다.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린다. 접속하자마자 <외톨이1>의 귓속말이 시작된다.
<외톨이1 :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정말로 떠나버린 줄 알았어요. 설마 하면서도……. 당신을 기다렸어요. 3일 동안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당신도 내가 싫은 거였군요. 하지만 애써 피할 것까지는 없어요. 내가 당신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당신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아요. 언젠가 당신도 내가 그리워 질 거예요. 그땐 당신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예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마치 다른 공간에 위치한 사람처럼 <외톨이1>과는 대화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외톨이1>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리곤 소리 없이 되돌아간다. 그의 마지막 말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이번만은 예외다. 나는 서둘러 자판을 두드린다. 왠지 내가 그를 배신한 기분이다. 이대로 그를 떠나보낼 수는 없다. 그는 여자일 것이다. 그도 나처럼 자신의 자궁을 짓밟고, 생명을 짓밟을 것이다. 그 모든 책임을 이제는 내가 감수해야 한다.
<외톨이 : 거기에 있나요? 아마도 거기에 있겠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내 말을 듣고 있겠죠.>
아무런 대답이 없다. 거기에 있나요? <외톨이1>을 향한 물음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외톨이1>이 아닌 나에 대한 물음이다. 모니터 속의 또 다른 내가 나를 쏘아보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나를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만다.
나는 내 자신을 거부해야 한다. 또 다른 나와 그 또 다른 나의 나를 외면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다. 모니터 속의 나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 막막함을 감당하지 못한 채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린다. 창문을 연다. 바람이 상쾌하다.
<외톨이 : 당신도 그런가요? 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듣고 있는 건가요? 왜 대답이 없는 거죠?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나요? 난 두려워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듣고 있나요? 난 창문을 열었어요. 당신 말처럼 정말로 눈이 와요.>
**약력: 시집『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바쁘면 환절기에 만나자』 외. 에세이집 『내 머릿속의 또 다른 나』 외. 장편소설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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