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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계간평/백인덕/시간의 ‘순환循環’과 사물의 ‘재인再認’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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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백인덕
시간의 ‘순환循環’과 사물의 ‘재인再認’에 대한 변명
― 지난호 다시 읽기
어느덧 겨울호 원고를 쓰고 있다. 《아라문학》이 세상에 나올 때쯤이면 완연한 세밑 정취가 가득할 것이다. 세밑은 늘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오늘은 ‘야누스Janus’가 먼저 떠올랐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야누스는 성이나 저택을 지키는 신화의 인물(?)이다. 그의 특징은 얼굴이 두 개로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점인데, 현대적 경향은 이를 ‘성聖과 속俗’, ‘선과 악’, ‘가해와 피해’ 같은 이율배반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사용하려고 한다. 그 타당성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야누스’를 떠올린 것은 ‘지옥문을 지키는 사자使者’로서의 그의 역할의 상징성 때문이다. 지옥 문지기로서의 야누스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는 앞과 뒤를 동시에 지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옥은 아무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곳이므로 먼저 그는 들어오는 방향을 예의주시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지옥은 누구나 도망하고 싶어 하는 곳이므로 나가는 방향 역시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앞과 뒤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키고 선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야누스적 사고’가 필요하다면, 이는 비약해서 여기-지금이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깊숙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인식은 여러 구성 요소를 갖지만, 자체의 변화에 의해 제 요소들의 변화를 동시에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유용하다. 시적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지난 호에는(계절 탓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존재의 근거이자 현주소인 ‘시간-공간’을 사건과 거리distant의 감성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이 많았다.
1.
시간에 대한 담론을 시각적 모형으로 대체해 보면,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인 직선형과 공중에 매단 수레바퀴가 도는 형상이 순환형과 마치 용수철처럼 순환하면서 전진하는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무엇으로 자기 기준을 정할 것인가는 순전히 시인들 각자의 몫이므로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그려낸 시간의 모형을 통해, 어떤 감응과 인식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가가 중요할 뿐이다.
당신 마음에 머물지 못하고
누군가 떠나가네
당신도 누군가 마음에 머물지 못하고
먼 꽃나무처럼 피어가네
영동고속도로 갓 길에
나무토막처럼 누운 새끼고라니도
고이 묻지 못하고 간
서로가 차창 너머 바라보듯
사랑의 무덤도 되지 못한 채 스쳐가네
이 시대가 잃어버린 영혼의 보석
죄의식도 없이 달리기만 하네
― 신현림,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전문 (《리토피아》, 가을호)
시인은 비록 ‘죄의식도 없이 달리기만 하네’라고 이 시대의 ‘이별’의 현상을 담담하게 진술만 하고 있지만, 작품의 시제는 담담함 뒤의 막막함을 그려내고 있다. 1연에서 “누군가 떠나가네”가 현재형이라면 “당신 마음에 머물지 못”함은 이미 과거의 사건이 된다. 모든 인과형에서 ‘원인’에 선행하는 ‘결과’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연의 “먼 꽃나무처럼 피어가네”가 비록 미래형이지만, “당신도 누군가 마음에 머물지 못”함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가 된다. 이렇게 보면, 3연의 “사랑의 무덤‘이 과거의 사건을 상징하는 대표적 수사가 되고, ’스쳐가네‘만이 현재의 모습이 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성립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시는 진정으로 우리 시대의 사랑의 터무니없음을 성찰적으로 보여준다.
서로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햇빛살 반짝이이는 창가에서
삶은 계속되었지
뉘 부르는 이 없는 이 창가의 한 생
화려한 먼지의 춤이었나
낮에도 밤은 내리어 저 어둠 속에 반짝이는 걸
뉘 말해줄 수 있으리.
머물 수 없어 잠시 흔들리는 화려한 먼지의 춤을
단 한 번쯤은 말하리라 이 병든 슬픔
와락 너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그러나
표정도 없이
나는 돌아서고 세상은 부드러움 속으로
오늘도 무너지며 가라앉으리
노을도 시나브로 제 빛깔을 잃어버려
세상은 흑백으로 바래어
표정도 없이 장미꽃 흩뿌리는 거리로 나는 가네
― 장경기, 「화려한 먼지의 춤을 말하려 하네」 부분
앞의 인용시와 달리 장경기 시인의 이 작품은 현재, 현상의 표면을 표상하는데 집중한다. “뉘 부르는 이 없는 이 창가”는 쓸쓸한 ‘한 생’의 시적 배경으로 깔리지만, ‘창’이 빛의 출입구라는 일반적 이해에 근거해 ‘먼지의 춤’을 드러나게 하는 시적 구동 원리임을 알 수 있다. 실연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을 시인은 “낮에도 밤은 내리어 어둠 속에 반짝이는 걸”이라고 토로하지만, 이는 사실 바람希이 응축된 내면의 풍경이라기보다는 환시幻視에 가깝다. 그것은 ‘말해 줄 수 있으리’, ‘말하려 하네’처럼 언어, 즉 이미 의식에 각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얼핏 숟가락 같기도 하고 나이프 같기도 한 두루미
저건 빛이 그린 미래라고 말하면서 바닥을 굴러도
새는 꼼짝 안 하고 있다 최초로 지상에 착지하여 아침을 모르는 새 같다
새를 가져다 키워야겠다
내 안의 불 꺼진 집이 좀 가벼워질 것 같다 잠시 나갔다 들어오니
새가 없다
나는 두루미로 사과를 자르고
두루미로 밥을 뜨고
새 안에서 폭발한 밤을 활짝 펴서 반듯하게 다려놓았다
― 홍일표, 「미래의 새」 부분 (《리토피아》, 가을호)
홍일표 시인의 작품은 제목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 자체가 순수한 ‘미래’를, 다시 말해 현재로 소환되어 난도질당하는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동시에 질박한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첫 연에서 “커튼 사이로 흘러든 빛이 바닥에 새를 낳았다”고 밝히고 있다. 물리적 현상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앞세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물리적 사건에 대한, 아니 그것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지의 표명이 된다. 이어지는 연에서 시인은 그것을 ‘두루미 한 마리’로 명명하는데, 시적 인식으로서 미래라는 시간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3연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바닥과 새 사이가 보일 듯 말 듯/나는 자꾸 새 밖의 새를 보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일차적으로 ‘새 밖의 새’는 ‘커튼 사이로 흘러든 빛’이 빚어내는 형상이 가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시적 의미로 본다면 “새 박의 새를 보고 있었다”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인은 최초에 그 빛을 ‘두루미’라 명명했고, 미지의 형상이 우리의 언어체계로 그렇게 끌려 들어온 순간, 우리의 의식은 ‘숟가락’이나 ‘나이프’ 같은 다른 이름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미래의 새’와 함께, 즉 “두루미로 사과를 자르고/두루미로 밥을 뜨는” 언어놀이를 지속하는데, 이 정신은 ‘미래’의 순수성을 그대로 포월하려는 시적 전략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인은 결굴 마지막 연에서 “새를 완성한 바닥이 날아갔다 하늘의 고백이 많아질 것 같다”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빛’에 이름을 붙이는 놀이는 결국 미래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하는 길이라는 명제가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2.
시간에 대한 인식이 결국 ‘시제’에 의해 작품에 투영된다면,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사물(사건과 물질)에 의해 거리와 강도를 달리하면서, 시작을 전진시키기고 하고 늪지의 펄처럼 발목을 움켜쥐기도 한다.
지하철 안에서 사람은 사람대로 물건은 시렁 위에서 자기의 공간
을 좁혀가고 있을 때 객차의 공간을 느릿느릿 그러나 단호하게 손에
바구니를 들고 돌파하는 저 맹인의 움직임은 무엇인가
내가 눈을 감아야 저 사람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모든 사물이 정지하고 있을 때
소리와 움직임으로 공간을 깨는 사물들에 유의하라
움직이는 사물은 우리가 모르는 언어를 발산하고 있다
― 김광옥, 「사물이 움직일 때」 부분
김광옥 시인은 ‘지하철’, 정확하게는 객차 안이라는 일상적 공간 안에서 사물과 사물, 시적으로 좁히면 ‘주체와 대상’ 사이의 힘의 길항, 종국적으로는 의식의 투사投射에 따른 동일성의 강도에 주목하고 있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달릴 때, 밖에서 보면 이동하는 공간이지만, 안에서 느낄 땐 정지된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 속도감은 체험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시인은 다가오는 ‘맹인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눈을 감아야 저 사람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번역해낸다. “소리와 움직임으로 공간을 깨는 사물들에 유의하라”는 명제는 일상 체험에 덧댄 일반 명제처럼 들리지만, 시인의 눈과 귀, 아니 온 감각을 열었거나 열고자 하는 이에게 들려주는 잠언과 같다.
다리에 깁스를 한 그녀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다. 녹이 슨 그넷줄에 머리를 기댄 그녀가 휘파람을 분다. 그네를 타고 있는 이국여성의 휘파람이 멎은 골목을 흘러다닌다. 쓰러진 목발을 그네 곁에 세워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아이와 세워진 목발을 또다시 쓰러트리는 겨울바람이 오늘 그녀가 본 이국의 풍경이다. 이곳은 아플 때 휘파람을 불지 않아요. 부 디 호 흡 을 삼 가 해 주 세 요. 휘파람을 불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하얀 눈이 내린다. 석고가루처럼 휘날리다가 입술을 붙인다.
― 김보숙, 「사물의 멍」 전문
시인은 ‘사물성’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국의 풍경’으로 표상된 낯선 곳에서 존재 현현의 ‘터(시간-장소)’를 잃어버린, 그래서 ‘사물화’된 한 존재, ‘이국여성’에 주목하고 있다. 적막한 풍경에 대한 묘사는 시인이 관찰에 충실한 방법만으로 일관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입술에 하얀 눈이 내”리는데, “석고가루처럼 휘날리다가 입술”에 붙인다는 부분에서, 창밖의 대상(이국여성)과 창 안의 주체(화자)가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시인의 의지가 드러난다. 김보숙 시인의 기획은 명백하게 ‘세계의 자아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페이스북 메시지가 당시의 얼굴을 지우고 있어요
스무 살의 당신, 당신이 보이지 않는
그 곳으로 갈 수 없는 구름이 보인다면
당신의 발목을 잡아야겠어요
당신을 하나로 만든다는 그 말을 믿지요
레시피가 많아 요리를 할 수 없군요
당신의 크기가 커지고 있는 폰을 닫아야겠어요
이게 전부입니다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군요
벼랑 끝에 머리 맞대고 가야 하는
그 곳이 여기라는,
― 이덕주, 「당신의 크기」 부분
전자적으로 형성된, 그러므로 실제이긴 한데 실재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가상현실 공간에서 ‘인격personality’이 만들어지고 교환되는 세태에 대한 시인의 강한 비판의식이 시의 표면에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덕주 시인은 ‘당신의 크기’라는 표제를 통해, 팔로우의 수나, ’좋아요‘를 과시하면서 ‘개성individuality’적일 수 없는 현대인의 초상을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레시피가 많아 요리를 할 수 없군요”라는 현상 진단은 결국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군요”라는 인식적 판단으로 귀결한다. 공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다분히 고전적이지만, 우리가 가치의 최우선을 ‘인간성’에 맞춘다면, 과연 어느 쪽이 더 진정으로 절실하게 필요했는지는 곰곰 따져봐야 한다.
이번에는 좋은 시가 참 많았다. 《아라문학》과 《리토피아》가 참신한 시들로 풍부해진다는 것은 작게는 함께 하는 문인들, 좁게는 특정 지역을 넘어, 한국문학에도 득이면 득이지 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현상이 오래 지속되리라 염원하고 기대한다.
**약력:《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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