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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아라세계/신연수/1950년대 인천문학仁川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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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세계
신연수
1950년대 인천문학仁川文學
─ 문예동인지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
1908년11월 『소년少年』 창간호에 육당 최남선이 근대시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발표하고 이 땅에 신문학新文學이 도입된 이후 인천에 본격적인 현대문학활동이 전개된 것은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1927년2월 진종혁秦宗爀과 한형택韓亨澤이 문예지 『습작시대習作時代』를 낸 이후였다. 그 이전에도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와 제물포청년회에서 등사판 문예지를 발간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다. 이 같은 현상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
광복이 되자 인천문인들은 삼삼오오 각종 문학단체를 결성해 문예동인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단체 중 대표적인 것이 신문화협회新文化協會이며 여기서 만든 것이 『문예탑文藝塔』과 『동화세계童話世界』이다. 이중 문예탑은 광복 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로 알려져 있다. 또 1947년에는 『시詩와 산문散文』이 창간돼 6년간 모두 7집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역시 기억에 의한 기록일 뿐 정작 실물은 찾아볼 수 없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일제강점기에는 그나마 『습작시대』나 『월미月尾』 등의 동인지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당시 인천의 문학활동을 짐작할 수 있지만 광복이후 1950년, 한국전쟁까지는 김동석金東錫, 배인철裵仁哲, 함세덕咸世德, 현덕玄德 등 인천출신 문인들이 인천을 떠나 중앙에서 활동하면서 낸 작품집 몇 권 외에는 동인지 등의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인천문학사가 사실상 공백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2. 1950년대 문예동인지와 잡지들
광복 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 속에 이렇다 할 문단조직을 갖지 못한 인천문인들은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2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 인천지부를 결성한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문총 인천지부는 곧 그 명칭을 문총구국대 인천지대로 개칭하고 신문 등에 반공의식을 고취하는 문예작품을 연재하거나 시화전 및 문학강연회 등의 활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뿐 1951년 12월 13일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조직과 활동체계를 가진 문학단체가 결성된다. 한국문학가협회(약칭 문협) 인천지부가 그것으로 인천의 문인단체로서는 이것이 처음이다. 당시 한국문학가협회는 범 문단적이었기 때문에 인천문인들도 대부분 여기로 모였는데, 여기에 참여한 문인들은 다음과 같다.
고문 표양문表良文, 위원장 이인석李仁石, 부위원장 한상억韓相億조수일趙守逸, 사무국장 고봉인高鳳仁, 시분과위원장 임진수林鎭洙, 소설분과위원장 김찬도金賛道, 평론분과위원장 이경성李慶成, 아동문학분과위원장 유영희劉永熙, 수필문학분과위원장 김응태金應泰 이정훈李正勳, 외국문학분과위원장 김종대金鍾大 석진복石鎭復 등이다.
이 무렵 인천에도 비로소 문예동인지가 발간되는데, 그 처음은 1952년1월 신년벽두에 나온 『신진新進』이다. 이어 1952년에는『《노정路程』과 『초원草原』, 1954년에는 『사파砂波』, 1955년에는 『소택지대沼澤地帶』와 『벽璧』, 1956년에는 『인천문학仁川文學』, 1957년에는 『해협海峽』, 1959년에는 『표풍飄風』 등이 잇달아 창간된다. 그러나 이들 동인지 대부분은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었으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짧게는 2~3호, 길어도 10호를 넘지 못하고 결국 폐간하고 만다. 이는 모두 전쟁으로 인해 문학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예동인지는 아니지만 1953년 6월 1일 창간된 『북진北進』도 소설가 김창황이 편집하면서 많은 인천문인들에게 발표의 장을 마련해 주기도 했으며, 또 조병화趙炳華, 이인석李仁石, 한무학韓無學, 최병구崔炳九, 최성연崔聖淵, 최승렬崔承烈, 이광훈李廣薰, 이선종李善鍾, 이정태李鼎泰, 김진엽 등은 그동안 발표한 작품을 모아 개인 작품집을 내는 등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가. 신진新進
전쟁 후 인천에서 처음으로 나온 문예동인지가 『신진新進』이다. 『신진』은 1952년1월2일, 인천 신진사에서 창간했는데 판권을 보면 독자적인 발행이 아니라 당시 인천에서 발행되던 대한신문사大韓新聞社 부록으로 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행인은 시인 김광섭金珖燮이었으며, 이인석李仁石과 고봉인高鳳仁이 주간이었다.
창간사를 보면 “우리는 좀 더 전쟁을 알려야겠다. 좀 더 상이군인을 알려야겠다. 서로 위안하고 단합을 하여야겠다. 그리하여 전체가 싸우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이것이 본지를 발간하는 이유”라고 밝히고 있어, 이 동인지는 전쟁의 홍보와 상이군인들을 위해 창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런 이유로 실려 있는 글의 상당 부분이 전쟁과 관련되거나 군인 또는 상이군인이 필자라는 것이 큰 특징이다.
우선 창간 축사를 보면 경기도계엄민사부 민사부장인 육군중령과 경기지구 합동헌병대 헌병소령, 육군본부 헌병감실 경인분실 인천지부장 등이 인천시장, 경기도 경찰국장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일반적인 글에서도 상이군인회 인천분회장 등이 문인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 많이 보인다.
인천문인들은 시인 한상억韓相億이 「군인정신軍人精神과 문학정신文學精神」, 인천문총위원장인 표양문表良文이 「투쟁鬪爭과 경쟁競爭」, 문총 심의위원인 윤기영尹岐泳이 「전야戰野의 기록記錄」, 수필가 이경하李京夏가 「인생론노트」를 발표했다. 또 이인석李仁石이 시 「북진北進- 군용선 00호에서」 조수일趙守逸이 시 「마음」, 고봉인高鳳仁이 시 「우리의 선언宣言」을, 소설가 최태응崔泰應이 창작 「사랑하는 사람들」, 김찬도金賛道가 창작 「귀가歸家」를 각각 발표했다.
하지만 신진은 전쟁 중에 발간된 탓인지 실려 있는 시가 시라기보다는 구호에 가까운 글을 모아놓은 느낌이다. 전쟁시의 대부분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시가 아닌 다른 글들도 대부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전쟁의 비참함과 피폐함을 직접 겪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절절이 배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하겠다.
나. 노정路程
노정은 1952년10월11일 프린트본으로 발행된 본문 28면의 조그만 동인지다. 발행소는 인천시 신생동 28 노정 편집실이며, 발행자는 임진수林鎭洙와 김찬도金賛道 2인으로 되어 있다.
책은 처음 이인석의 서문이 있고, 이어 임진수의 머리말, 그리고 임진수의 시 「한가위」와 수필 「말주변」, 김찬도의 꽁트 「이런 처지處地」와 창작 「귀향첩歸鄕帖」으로 되어 있다.
이 동인지는 시인 임진수와 김찬도 2인이 낸 것으로, 임진수가 쓴 머리말을 보면 “우리는 이제 글을 쓰는 목적이 인간정신의 정화와 인간정신의 건강한 창조에 있다고 믿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개인의 유희가 아니고 사회에 작용하여 영향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혀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동인지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창간호로 그쳤다.
이 동인지에서 한 가지 기록할 사항은 먼저 제호題號를 시인 허이복許利福이 하고, 장정 및 컷은 김찬희金燦熙가 했다는 것이다. 허이복은 함경도 경성출신의 시인으로, 광복 전 고향에서 『무명초無名草』, 『박꽃』, 『탑塔』 등 3권의 시집을 발간한 바 있는데 그 후 월남해 인천에 정착해서는 시를 쓰지 않고 평생 의사로 살다 1982년에 작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으로 이주 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허이복이 1950년대 인천에서 나온 동인지의 제호를 쓴 것은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이 동인지의 장정과 컷을 그린 김찬희는 동인지 『신진』의 장정도 한 인천의 화가다.
다. 사파砂波
『사파砂波』는 1954년 창간되어 1957년 7집까지 발간된 인천의 장수 동인지의 하나이다. 하지만 현재 창간호를 확인할 수 없어 창간일이 언제이고, 또 창간동인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사파의 가장 빠른 호수는 제2집(2권1호)으로, 그 발행일이 1955년 7월로 되어 있어 창간호는 늦어도 1954년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늦은 호수는 제7집으로 1957년에 발간된 것이다.
먼저 신록집新綠輯이라고 표시된 사파 제2집은 가로 16cm, 세로 19.8cm의 얇은 등사판본이다. 이후에 나온 것도 모두 등사판이며 크기는 나올 때마다 일정하지 않고 약간씩 다르며, 면수는 따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2~5집까지는 표지까지 모두 같은 장정을 이용하고 있다.
동인들은 소설가 이정태李鼎泰와 시인 손재준孫載駿을 중심으로 김재화金在華, 안정심安正深, 최영일崔泳一, 차경택車京澤, 이관제李寬濟, 낭승만浪承萬 등이며, 이 중 이정태를 제외한 대부분은 시인이다.
라. 소택지대沼澤地帶
『소택지대沼澤地帶』는 1955년 4월 15일, 서울 산호장에서 발간한 30여 면에 불과한 작은 문예동인지이다.
동인은 인천중학교 교사인 김영달金泳達을 비롯하여 서울농대 학생인 김용배金容培, 이화여대 학생인 홍명희洪明姬, 동국대 학생인 조한길趙漢吉 등 4인으로, 이중 김영달을 제외한 3인은 모두 대학생이다.
『소택지대』는 비록 창간호로 단명했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인 장만영이 운영하는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에서 활판인쇄로 발행되었는가 하면, 한문으로 된 제자題字를 당시 인천에서 가장 존경받던 길영희吉瑛羲 인천중학교 교장이 써 눈길을 끌고 있다.
창간호에는 김영달과 함께 인천중학교에 근무하던 조병화 시인이 쓴 「소택지대」를 비롯해 김영달이 「야간열차夜間列車」, 「기항지寄港地」를, 김용배가 「전원엽서田園葉書」, 「나의 캠포와 둘이」를, 홍명희가 「생리生理의 약속約束」, 「어느 지점地點에서」’를, 조한길이 「파련破戀」을 발표, 총 8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발문격인 김영달의 「수변계절水邊季節」에 이어 소택지대 주민이라 하여 동인 네 사람의 이름으로 마무리했다.
특히 김영달과 홍명희는 소택지대를 발간하기 전 함께 2인시집 『아류亞流』를 펴내기도 했는데, 이 『아류』는 1950년대 인천에서 나온 최초의 시집으로 보인다. 현재 확인되는 실물은 앞뒤 표지와 판권지가 떨어져 정확한 발행일을 알 수 없지만 김영달이 쓴 후기가 4285년 11월 5일로 되어있어 적어도 1953년 이전에 발간된 것으로 보인다.
46판, 48면에 갈색 등사판인 아류에는 김영달이 「피곤疲困한 낙서落書」 제하에 시 8편을, 홍명희가 「황혼黃昏의 서신書信」 제하에 시 6편을 각각 발표하고 있다. 시집의 제자는 황기익黃箕益이 썼다.
마. 벽壁
『벽壁』은 1955년 12월 5일 삼맥동인三脈同人이 펴낸 등사판 동인지이다.
삼맥동인은 이중흡李重洽, 황원黃元, 김만길金萬吉, 윤중원尹重元, 최수진崔壽鎭, 장현기張玹基 등 6인으로, 이들이 발표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중흡 「사원寺院」, 「생명탑生命塔」, 「여인女人의 별」, 황원 「영靈」,「날개’, ‘실향失向」, 김만길 「추정秋情」, 「십자로十字路」, 윤중원 「어느 한 구석도」, 「황혼黃昏」, 「연기煙氣」 , 최수진 「낙서落書」, 「여인女人」, 「대수시간代數時間」, 장현기 「바다」, 「웃고 살아요」, 「나는 어부漁夫더라」 등 총 17편이다. 김만길만 2편이고 나머지 5명은 각각 3편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후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동인들을 보면 먼저 이중흡은 소설가로, 그 후 인천문협 회원으로 활동하며 개인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윤중원은 젊은 나이에 작고, 친우들이 유고시집을 낸 바 있다. 그리고 장현기는 현재까지 인천문협의 원로회원으로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하는 등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 황원, 김만길, 최수진은 그 후의 신상정보나 문학활동 여부 등을 알 수 없다.
바. 해협海峽
『해협海峽』은 1957년 3월 25일, 경기문화사에서 발행한 소설동인지이다. 소설동인회는 아주 드문 동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해협』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해협』은 현재 창간호와 2호 등 두 권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3호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호는 창간호와 같은 1957년 12월 1일에 나왔다.
동양화가 우문국禹文國이 장정을 하고, 검여 유희강柳熙綱이 제자題字와 컷을 그린 창간호는 57판, 52면으로 정가는 백환이다.
창간호에는 조수일趙守逸이 「암야暗夜」와 「계절풍季節風」을 김창흡(金昌洽, 필명은 金斗星)이 「역전풍경驛前風景」을, 김창황이 「의거전義擧戰」을 각각 발표했다. 그리고 2호에는 김창흡이 「목각木脚」을, 김창황이 「어느 위치位置」를, 조수일이 「포촌浦村 사람들」을 각각 발표하고 있다. 또 2호는 총 50면으로, 서양화가 박영성朴瑛星이 표지를 그렸다.
사. 표풍飄風
『표풍飄風』은 신흥동인新興同人이 1959년 9월 1일, 등사판으로 발간한 57판, 76면의 문예동인지이다. 하지만 표풍은 창간호 밖에 나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인은 이일우李一愚, 김병제金秉濟, 곽중신郭重信 등 3인이다.
창간호에 수록된 작품을 보면 조운준趙雲濬의 서문과 목차에 이어 이일우가 「자살자自殺者」 「최후最後의 증언證言」, 「체념諦念」, 「인간人間」, 「아쉬운 기도」 등 시 5편을. 김병제가 「바다가 있는 지표地標」, 「설중기雪中記」, 「제삼第三의 종鍾」, 「지표地標」, 「아이들」, 정靜」, 항구」, 「병수로並樹路」, 「종鍾소리」, 「수수밭」, 「코스모스의 서곡序曲」, 「일요일의 창」, 「새가 있는 대화對話」, 「촛불」 등 시 12편을. 그리고 곽중신이 수필 「깨어진 꿈」, 「제대」, 「종소리」, 「봄이 만든 일」, 「파도」, 「봄비와 합승」 등 5편과 후기를 썼다. 그리고 등사판인 표풍의 삽화는 한때 인천에서 교편을 잡은바 있는 동양화가 조평휘趙平彙가 그렸다.
3. 맺으면서
이로써 1950년대 인천에서 발간된 동인지를 통해 인천문학의 현주소를 대충 살펴보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동인지 중 1952년 창간된 『초원草原』과 1956년 12월 23일 창간돼 1980년대 후반까지 발행된 『인천문학仁川文學』등을 제외하고는 대충 살펴보았다. 이중 초원은 1953년에 발간된 3집이 남아 있으나 아직 실물을 확인하지 못해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으며, 인천문학은 별도의 장을 마련해 보다 자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에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 1953년 6월 1일 창간된 『북진北進』이 있는데, 이는 문예동인지가 아닐 뿐 아니라 발행처도 창간 때는 국제통신사가 ‘국제통신 부록’으로 냈지만 곧 서울의 북한피난민연맹 이름으로 나와 후에 기회가 닿으면 본격적으로 조사할 예정으로 이번에는 일단 제외시켰다.
그 밖에 1950년대 후반에는 동인지나 잡지 외에 최성연, 이광훈, 최승렬, 최병구 등이 시집을 발간하는가 하면 이정태는 창작집을, 김진엽은 희곡집을, 이선종은 수필집을 연달아 발간하는 등 인천문인들의 작품집 발간이 줄을 이었다. 이들과 작품집 및 수록 작품에 대해서도 역시 별도의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1950년대 인천문학은 실물이 확인이 되는 문예동인지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약력:시인.인천문협 회원,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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