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5호/단편소설/우상애/그곳으로 가는 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96회 작성일 20-01-23 19:01

본문

25호/단편소설/우상애/그곳으로 가는 길


우상애


그곳으로 가는 길



공항에 내리니 더운 열기가 훅하고 올라왔다. 다운 재킷을 벗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짐은 나오지 않았다. 카트를 끌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우리 나라의 시골 터미널보다 작고 허름한 공항이었다. 그는 말했었다. 우리 나라는 너희 나라보다 아주 가난하다고. 그건 공항에서 내리면 바로 느끼게 될 거라고. 한참을 기다려서 내 캐리어는 덜컹거리는 무빙벨트 위에서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오버차지를 부담하고 가지고 온 두개의 큰 캐리어를 카트에 싣고 밖으로 나갔다. 택시 승강장 너머로 한 사람이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내 또래의 동양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웃으며 그 종이를 흔들었다. 내가 손을 들자 그 남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가 가지고 온 벤에 내 캐리어를 실었다. 벤은 크지 않아 캐리어 두개를 실으니 꽉 찼다. 작은 것은 그렇다 치고 이십 년은 넘었을 것 같은 벤의 의자는 색이 바래고 터져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갔다. 창밖으로 차와 사람과 짐이 어지럽게 오고가는 도로가 보였다. 차선도 없고 교통질서도 없고 인도도 없이 뒤섞여있는 그 모습은 마치 아주 오래 전의 옛날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았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갈 수가 없어 그리워할 수도 없는,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곳이 바로 여기 같았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그리고 차가 뒤얽힌 거리는 먼지로 가득했다. 퇴근 시간의 영향을 받는 것은 여기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차가 도저히 움직일 줄 몰랐다. 30분 걸린다는 거리를 한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도착했다. 
숙소는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큰 도로에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서도 좌회전 우회전을 여러 번 반복하고서야 벤은 나와 내 짐을 숙소 마당에 내려놓았다. 한국인 사장은 나를 이층의 방으로 안내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네팔 남자가 내 짐을 방에다 옮겨주었다. 나는 그제야 이름을 물어보았다. 이름이 빠상이라고 했다. 빠상의 수줍어하는  옆모습과 흑인과 아시아인의 중간쯤 되는 피부색이 익숙해서, 돌린 고개를 다시 돌려 바라보았다. 팁을 주니 감사합니다. 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한국어를 할 줄 아시네요.
예 한국 가려고 한국어를 공부했어요. 지금은 한국 사람들 히말라야 트레킹 가이드 해줘요.
아 히말라야 트레킹요. 
나는 그제서야 이곳 네팔에 그 말고도 히말라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옷을 갈아입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갈아입을 티셔츠가 필요했다. 거기에는 네팔 여자와 한국여자 그리고 한국인 사장이 앉아 있었다. 타멜 거리에 가려고 하는데 빠상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싶다고 하자 사장은 빠상을 불렀다. 빠상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사장에게 나를 안내할 때의 주의사항을 들었다. 마치 상관에게 중요한 임무를 지시받는 훈련병 같았다. 짐이 없고 타멜거리가 복잡해서 벤은 무리였는지 택시를 타고 나가기로 했다. 전화로 부르자 오래 걸리지 않아 택시가  호텔 마당으로 들어왔다. 타멜은 호텔에서 걸어서 30분 걸리는 거리지만 택시로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빼곡한 골목길을 빵빵거리며 질주하는 택시 안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보며 빠상은 웃었다.
여긴 다 그래요. 지금은 외국분이시라 얌전하게 운전하는 거예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명동쯤 되는 번화가인 타멜도 먼지투성이였다. 먼지투성이 속에서 타멜이라는 거리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거리. 이유는 단 하나 히말라야라는 거대한 산 때문이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오고가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타멜은 유난히 등산에 관련된 가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먼지는 노점의 싱잉볼에도, 네팔 전통의상 위에도, 카페의 의자 위에도 심지어는 거리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에도 파고 들었다. 통이 넓은 인도풍의 바지를 들춰보다가 손에 하얗게 묻은 먼지 때문에 사는 것을 포기했다. 티셔츠를 사야 하는데 먼지 없는 가게로 데리고 가 달라고 말했더니 큰 슈퍼를 지나 우측의 작은 가게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가게의 주인이 권하는 티셔츠도 역시 먼지로 뒤덮인 비닐 봉투 속에 담겨있었다. 나는 1000루피를 주고 그 티셔츠를 사가지고 나왔다. 타멜 거리가 시작하는 2층 어디에 맛있는 커피집이 있다고 그가 말했었다. 네팔 사람들은 비싸서 거긴 특별한 날에만 간다는 커피숍이었다.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빠상은 선뜻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내가 들어오라고 하자 머뭇거리며 들어왔다. 아마도 사장이 손님이 먹거나 마실 때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빠상은 모카커피를 시켰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은 지금 추운 늦가을인데 여긴 에어컨이라니. 커피를 마시며 나는 빠상에게 그의 주소가 적힌 수첩을 보여주며 여기를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빠상은 이 곳은 히말라야 깊은 산속에 있는 마을이라 많이 걸어야 한다고 했다. 차를 타고 갈 수 없는 마을이냐고 했더니, 따또파니까지 버스를 타고 거기서 또 짚차를 타고 그리고 삼일을 더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버스 타고 짚차를 타는 시간만도 이틀은 잡아야 하고, 거기에 가려면 사장을 통해 자신을 고용해서 갈 수 있다는 말에 남은 커피를 두고 급히 일어나 택시를 불렀다.
내가 내민 주소를 사장은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여기를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나시겠어요? 빠상이 그쪽 지역을 잘 아니까 빠상을 가이드로 데리고 가시죠. 많이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걸을 수 있어요. 내일이라도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우연히 선택한 숙소는 한국에서 오는 히말라야 트레킹 객들을 위한 숙소였고, 히말라야 트레킹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대행해 주는 여행사이기도 했다. 사장은 빠상에게 버스를 예약해 오라고 지시했다. 빠상이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대문을 통해 달려 나갔다. 빠상이 달려 나간  문으로부터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빠상이 버스표를 가지고 오면 나는 그에게로 간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 여기 왔어요. 한참 후 빠상이 돌아왔다.
그쪽 지역에 며칠 전 때늦은 폭우가 내렸다고 합니다. 포카라까지는 별 이상이 없는데 나야풀에서 베니 가는 길에 도로가 무너져서 차량 통행이 되지 않고 있고, 베니에서 따또파니까지도 여러 군데 도로가 무너져 차가 다닐 수 없다고 해요.
그래? 그럼 좀솜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좀솜에서 따또파니로 가야겠군.
좀솜까지는 비행기로 갈 수가 있는데 좀솜에서 따또파니까지 가는 길도 여러 군데 무너졌어요. 길이 복구되는 데 일주일 걸린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심한 지진으로 온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졌다가 아직도 휘청거리는 나라, 카트만두 시내의 곳곳에서 복구되지 못한 지진의 흔적이 그대로 남겨져있는 나라가 네팔이었다. 그 때 입은 상처가 단단히 아물지 못했는지 조금만 비가 와도 도로가 유실된다고 했다. 사람이나 땅이나 심한 상처에 속절없이 무너져 오랫동안 제 자리를 못 찾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가 왔다고 도로가 무너져서 차량 통행을 일주일씩이나 못할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가 네팔의 카트만두만 보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사장은 복구될 때까지 기다리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가야할 곳이 있는 여행자에게 일주일은 길었다. 오후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 같은 모양새로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호텔 이름은 히말이었다. 네팔에 히말라야 호텔은 수십 개가 넘을 거였고 히말 호텔은 그 호텔들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서 줄임말로 썼다고 한다. 사장은 시력이 약한 듯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는 60 중반의 남자였는데 얼굴과는 다르게 체격도 좋고 몸매도 다부져보였다. 시간만 나면 배낭을 싸들고 히말라야로 들어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걸어 다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어느 산악회의 회장이었다가 친구따라 오게된 히말라야에 꽂혀서 카트만두에 눌러 살게 되었다. 카트만두에 집을 하나 얻어놓고 일년의 반 이상은 히말라야 산 속으로 들어가 트레킹을 하다가 한국에서 오는 지인들의 트레킹 안내를 시작한 것이 지금은 규모가 제법 큰 트레킹 에이전시를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층에는 식당과 사무실과 창고가 있었고, 2층에 5개 3층에 3개의 룸이 있는 이 건물은 호텔로서는 작은 곳이었다. 내가 묵고 있는 방은 더불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는 아주 큰 방이었지만 다른 방들은 도미토리 룸으로 꾸며져 있는 곳도 있었다. 20명 정도는 묵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오거나 소규모로 오면 이 호텔에서 잤지만 인원이 많은 단체 손님은 타멜에 있는 호텔에 별도로 숙박시설을 지정해주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식사 시간은 정확히 일곱시 반이었다. 주방에는 사장의 부인이라고 하는, 사장보다 스무살은 어려보이는 이쁘장한 한국여자가 주로 요리를 했고 그 옆에 팔마라는 뚱뚱한 네팔여자가 세살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출근해서 아침 준비하는 것을 거들었다. 팔마는 이 호텔의 창립멤버였다. 아가씨였을 때부터 이 호텔 주방 일을 시작했고 결혼하고 아기 낳고서도 여전히 여기에서 일을 했다. 팔마가 아기를 데리고까지 나와서 일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그녀의 한국말 솜씨와 한국 요리 실력이었다. 그녀만큼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요리를 잘하는 도우미를 네팔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또한 히말라야 매니아가 있어 단골로 오는 한국 손님들은 그녀에게 작은 선물까지 준비해 올 정도로 팔마는 인기가 있었다. 그들의 식성을 잘 알고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눈치껏 준비해서 식탁에 올려놓으면 한국 음식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팔마를 칭찬했다. 식당에는 10인용 식탁 테이블이 두개 있었는데 하나는 사장과 손님들이 식사를 했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가이드들이나 호텔에서 일하는 스텝들이 식사를 했다. 그런데 사장 부인이라고 하는 여자는 식사만 준비해주고 바로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사장의 집이 있었다. 같이 식사할 것을 권하면 나중에 먹겠다며 상냥하게 사양하곤 했지만 일주일 있는 동안에 그녀가 식사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호텔에는 장기 숙박 손님도 한 명 있어서 아침, 저녁으로 마주쳤다. 회사에서 파견 나온 6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한국 남자였다. 그는 정확히 출근했고, 정확히 퇴근했다. 밖에서 밥을 먹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밥도 정확히 반 공기를 먹었고, 식탁에서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사장과 딱 두 마디쯤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그를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트레킹 하러 오셨어요?  내게 물었고 내가 아니요. 라고 말한 것 외에는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가 다였다. 트레킹 하러 오지 않았다면 왜 오셨어요? 물을 만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트레킹 하러 오셨어요? 도 그 딴에는 최선의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말을 건넸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때 누군가 노크를 했다. 사장 부인이었다.
산책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20분쯤 걸어가면 공원이 있었다. 한국과 다를 거 없는 규모였지만 나무가 달랐고, 먼지 쌓인 나뭇잎들의 빛깔이 달랐다. 공원을 걷는데 백인 여자 두 명이 딱 붙은 레깅스에 배꼽이 다 보이는 탑을 입고 달려서 우리를 지나쳐갔다. 네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공원을 한 바퀴 걷는데 한 시간 반 쯤 걸렸다. 공원 출구 옆 작은 집에서 커피와 음료와 우리나라의 감자전이나 도토리 전같이 생긴 납작한 부침개를 팔고 있었다. 그녀가 늘 밥을 먹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저거 맛있어 보이는데 먹어보지 않을래요?
그녀는 예상외로 흔쾌히 먹겠다고 했다. 내 손바닥만한 전 세 개와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내가 돈을 냈다. 그녀는 두 개를 먹었고 나는 한 개를 먹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야외 의자를 공원의 나무를 향해 돌려놓고 숲을 바라보았다. 
네팔에 들어온 지 6개월 되었어요. 비자 때문에 왔다 갔다 해요. 한국에 가면 들어오기 싫은데 사장님이 난리를 치셔서 들어오곤 하죠.
그녀는 평소의 새침했던 모습과는 달리 말을 잘했다. 남편을 사장님이라 불렀다.
한국에서는 네팔 그리고 히말라야를 항상 그리워했어요. 그래서 사장님 따라 네팔에 들어왔는데 히말라야는 좋지만 네팔이라는 나라는 아직 낯설어요. 설거지 하다가 프라이팬을 닦을 때 기름이 둥둥 뜨잖아요. 그게 네팔에 있는 내 모습 같아서 멍해질 때가 있어요. 사장님도 잘해주시고 호텔 스텝들도 다 좋고 오시는 손님들도 이제는 정이 가는데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어요. 한국에 가면 이상하게 밥을 아주 잘 먹어요. 
좋은 사람 옆에 있어도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쓸쓸한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야채가게에 들러서 필요한 호박이며 오이며 파 같은 식재료를 몇 개 샀다. 짧은 영어로도 그들과 소통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 들고 골목을 걸어오는데 네팔 여자가 지나가며 나마스떼 인사를 했다. 호텔 옆에 사는 이웃이라고 했다. 그녀도 나마스떼 했다. 말없이 걸어오다가 저녁에 타멜에 사장님 등산바지를 사러 나가야 하는데 같이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무질서하고 먼지 가득 쌓인 그 거리가 생각나서 대답을 하지 않았더니 그녀가 웃었다.
너무 정신없어서 가기 싫은 거죠?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렇지만 몇번 가보면 타멜만의 매력이 있어요. 그 매력을 바로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호텔 마당가의 테이블에 앉아서 팔마의 세 살 난 아들이 마당을 걸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며 네팔의 한가로운 한낮을 보내기도 하고, 타멜에 나가 맥주를 마시고 오기도 하고, 스와얌부나트나 더르바르 광장에 다녀오기도 하다 보니 일주일이 갔다. 최대한 느긋해지기 위해 다급해지는 마음을 꾹꾹 누르는 방법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일 째 되는 날 나는 팔마에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먹으려면 삼겹살을 얼마나 사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1500루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돈을 주면서 삼겹살을 사오라고 말했다. 팔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팔 사람들은 삼겹살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1500루피면 한국의 2만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업고 시장을 보러 갔다. 한참 후에 팔마는 사장 부인과 같이 들어왔다. 사장 부인이 팔마의 아들을 안고 팔마는 시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시장에서 만났다고 했다. 둘은 고기를 손질하고 상추를 씻고 나는 팔마의 아들이랑 마당에서 놀았다. 네팔의 돼지고기는 기름기가 많아서 사장부인과 팔마는 열심히 그  기름을 다 떼어내고 있었다. 네팔 스텝들은 고기를 구우며 즐거운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 사람들 소득으로 삼겹살은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식이었다. 삼겹살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상추는 한국 상추보다 억셌지만 고소한 맛은 배추처럼 달짝지근하게 입에 오래 남았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사장 부인이 왔다. 물어볼 말이 있다고 했다.
팔마에게 삼겹살 사오라고 얼마를 주셨어요?
1500루피 주었어요.
내게는 1200루피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팔마가 돈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해요. 이번뿐만이 아니라서 제가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물어보러 왔어요.
잠깐만요. 제가 어쩌면 착각했을 수도 있어요. 1000루피를 준 다음 제가 잔돈을 세어서 주었기 때문에 제가 1200루피만 주었을 수도 있어요. 팔마가 겨우 300루피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사장 부인은 가끔 팔마가 그런다는 것을 한 번 더 말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1500루피와 1200루피 사이에서 헷갈렸다. 팔마와 사장 부인 사이처럼. 팔마와 사장 부인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팔마는 사장이 홀로 카트만두에 머문 십 여 년의 세월동안 이 호텔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었고 사장 부인은 한국에서 뒤늦게 네팔로 들어왔기 때문에 주방의 주도권을 쥐고 둘만의 은밀한 암투가 있을 법도 했다. 더군다나 팔마에 대한 사장의 신임은 거의 절대적이었으니 부인 입장에서는 팔마가 예쁘지는 않을 거였다. 부인이 한국으로 돌아가 있을 동안 팔마는 주방을 맘대로 휘두를 수 있었지만 부인이 한국에서 돌아오면 일일이 모든 것을 보고하고 시키는대로 해야하니 팔마의 입장에서도 부인이 편할 수는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내일 모레면 출발한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것은 깊이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냥 그가 있는 그곳으로 간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침을 먹은 후 사장이 빠상에게 전화를 했다. 버스표를 사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마당가 테이블에 앉아 빠상을 기다렸다. 한 시간 후에 대문을 열고 들어온 빠상은 버스표를 들고 있지 않았다. 아직도 길이 복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언제 복구될 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얼마나 무너졌길래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으며 복구되지 않으면 버스 같은 것은 아예 다니지 못한다는 것인가. 사장은 여기 사람들은 하루 이틀 열흘씩 걸어서 이동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다지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네팔이 원래 비스타리 비스타리 하다고… 비스타리? 그것은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라는 뜻이라고 했다.
내 절망은 그 비스타리에 휘둘려서 수 백 배로 커졌다. 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느냐는 말에 사장은 빠상을 쳐다봤고, 빠상은 네팔말로 사장에게 무어라 말했고, 사장은 기약이 없어요. 라고 했다. 그럼 거기에 가는 길이 모두 막혔다는 건가요? 말했더니 사장은 다시 빠상을 쳐다봤다. 빠상은 한국말로 내게 말했다.
지금 좀솜에서 따또파니 사이가 제일 먼저 공사가 끝날 것 같습니다. 거긴 좀솜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요. 그래도 15일은 더 걸릴 겁니다. 갈 수 있는 방법이 지금 딱 하나가 있어요.
빠상이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딱 하나의 방법은 베시사하르로 들어가 안나푸르나 서킷 길을 걸어서 올라가 토롱라를 넘어 묵티나트로 내려와 좀솜 따토파니로 가는 방법이었다. 지명이 헷갈려서 어리둥절해 있으니 지도를 그려서 보여주었다. 지도상으로는 여기서 포카라로 가서 베니를 거쳐 따또파니로 가는 것이나, 베시사하르로 가서 토롱라를 넘어 묵티나트 좀솜을 거쳐 따또파니로 가는 것이나 거리는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베시사하르로 가는 것은 참체나 탈까지 짚차를 타고 가서 열흘 이상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달랐다. 삼일은 걷겠지만 열흘 동안 걷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사장 부인이 커피를 타서 가져왔고 뒤따라 사장이 들어왔다.
왜 거기에 가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꼭 가야 하는 상황인 것만은 짐작하고 있어요. 그럼 일단 그곳으로 향하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으시고 히말라야를 걸어보시죠. 내가 왜 히말라야에 반해서 여기에 눌러 앉았는지 아세요. 히말라야는 그 무엇보다도 강한 중독성이 있어요. 마약과도 같은, 간절한 젊은 날의 사랑과도 같은 중독성이죠. 그 중독의 비밀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요. 히말라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절대적인지 한 번 가보세요. 나중에 제게 고맙다고 말씀하실 거예요. 지금의 상황에서 그 곳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구요.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이나 옷, 신발은 저희가 다 빌려드리겠습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려고 하니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세수만 하고 옷을 입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빠상과 그가 데리고 온 포터였다. 포터의 이름은 벤바라고 했다. 벤바는 사장이 빌려준 카고백에 챙겨 넣은 내 짐을 번쩍 들었다. 작은 체구에 그 무거운 짐을 가볍게 들다니. 벌써 택시가 마당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사장과 사장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빠상과 벤바를 데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어두컴컴한 카트만두 시내를 가로질러 가면서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는 불확실성 때문에 오는 혼돈은 없기를 빌었다. 우리는 베시사하르가는 버스를 탔다. 빠상은 좋은 자리에 나를 앉히고 벤바와 둘이 뒷자리에 앉았다. 어둠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고 예정시간이 훨씬 지났을 때에야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거의 비포장이었고, 내 몸은 끝없이 흔들렸고,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놓고 또 달렸다. 정체되어 있는 도로가 뚫린 듯이 시원한 기운이 목에서 가슴을 거쳐 뱃속을 한 바퀴 돌더니 배꼽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 길이 멀든 가깝든 그곳을 향해 출발하는 이 순간이 고마웠다. 네팔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웃었다. 반갑다는 표현일 것이었다. 나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느 정류장에서 빠상이 내리라고 손짓했다. 다 온 줄 알고 가방을 내리려는데 가방은 그냥 두고 내리라고 했다.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류장 식당의 메뉴는 딱 한가지였다. 네팔의 전통음식이었는데 그들은 맨손으로 그 밥을 먹고 있었다. 빠상이 내게는 수저와 포크를 가져다 주었다. 밥과 카레 비슷한 소스와 나물 두세 가지 그리고 콩 죽 같은 것을 큰 접시에 담은 식사는 그들의 손으로 먹는 풍경과는 달리 맛이 있었다. 그 음식의 이름은 달밧이었다. 내가 빠상과 벤바의 식사비를 내려고 하자 빠상이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자기네들이 먹는 음식의 비용과 외국인에게 받는 음식 값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내 음식 값만 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커피도 맥주도 내국인과 외국인의 가격이 달랐다. 나는 빠상이 내는 두 배 쯤의 돈을 내고 밥을 먹은 셈이다. 그러나 그 두 배라는 가격이 우리 돈으로 2000원이 채 되지 않았다.
베시사하르에 도착하니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참체까지 지프차를 타야 했다. 원래 차메라는 마을까지 갈 수는 있는데  참체에서 딸로 넘어가는 찻길이 아주 위험해서 우린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도착하고자 하는 그곳까지 가는 데 이틀이나 늦어진다. 차메까지 짚차로 가자고 고집을 피우다가 빠상이 위험하다고 강조하는 바람에 고집을 꺾고 이틀이란 시간을 내려놓았다. 참체까지 가는 지프차는 카트만두에서 베시사하르까지 오는 것의 열 배쯤 흔들렸다. 네팔이라는 나라는 갈수록 태산이었다. 공항에서 탄 벤에 놀라다가, 타멜을 달리는 택시에 더 놀라고, 베시사하르까지 오는 차안에서 더 놀라고, 참체까지 가는 지프차에서 최고점을 찍었다. 비포장도로의 산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는 쉴새없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네팔의 가요 같았다. 천장에 머리를 서너번쯤 부딪쳐가며 도착한 참체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있었다. 웃을 때의 눈매가 예쁜, 날씬한 아줌마가 운영하는 롯지로 들어갔다. 빠상이 저녁은 무엇을 먹겠냐며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무엇을 주문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주인 여자가 그림이 그려진 메뉴를 주었다. 만두처럼 생긴 모모라는 음식을 주문하고 씻고 내려오겠다며 올라가는데 계단이 삐걱거렸다. 방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닫히지 않아 문틈으로 모기며 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시골의 원두막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침낭이라는 이불 속에서 잠을 자는데 지퍼를 올리면 답답해져서 지퍼를 내리고 한쪽 발을 바깥으로 내밀고 잠이 들었다. 새벽녘쯤 잠이 깼다. 추워서기도 했고 화장실에 가고 싶기도 했다. 화장실은 문을 나가서 복도를 지나 바깥쪽에 있었다. 화장실에서 앉아 밖을 보니 온통 깜깜한 세상에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하늘의 별이었다. 아 이거였구나. 고향의 별을 그리워했던 남자. 그가 그리워했던 세상 속으로 비로소 들어왔구나.
이튿날 아침 빠상은 아침 식사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내 옆에 서서 오늘의 일정에 대해 설명을 했다. 탈이라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다라파니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탈은 아름다운 강과 폭포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벤바가 카고 백을 메고 출발하고나서, 나는 커피를 마시고 느긋하게 등산화 끈을 묶고 롯지 문을 나섰다. 저 멀리 보이는 설산. 히말라야였다. 어젯밤 어둠과 지프차의 심한 흔들림 때문에 보지 못한 히말라야 설산이 저기 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히말라야!!! 나는 작은 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히말라야의 신들이 아직은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있지만 그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라는 말을 했다. 지금 아니면 다음 세대에 누릴 수 있도록 반드시 네팔에 번영된 미래를 줄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너희도 티벳처럼 다음 세상 즉 내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내게 그는 네팔 사람은 지금의 빈곤을 불평하지 않고 힘들어하지도 않고 그냥 신의 뜻대로 살 뿐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말했었다.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다가 문득 나타난 탈이라는 마을은 깊은 산속에 홀로 펼쳐진 만찬처럼, 아름답고 풍요롭지만 어딘가 쓸쓸한 곳이었다. 마을 앞에는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은 좁은 계곡을 흘러내려오다가 갑자기 큰 세상을 만나 펼쳐지는 물결처럼 넓게 부채꼴처럼 퍼져 한참을 흐르다 다시 오므라들어 좁은 강으로 흘러갔다. 그  부채꼴의 크라이막스 지점에 탈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예쁜 꽃을 담벼락에 심어놓은 집들과 옆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 그리고 그것들을 의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설산이 있는 마을이었다. 포탈라 롯지에서 찐 감자랑 마늘 수프를 먹었다. 포탈라라는 이름과 마을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룽다와 타르초를 보며 이곳이 티벳 문화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벳의 사람들이 중국의 폭정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망명해서 히말라야의 품속에 그들의 고향을 다시 꾸렸을 것이었다. 폭포 아래서 한참 앉아서 쉬다가 다시 걸었다. 무조건 천천히 가라는 한국인 사장의 말처럼 나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이곳은 체력이 안되어서 트레킹을 포기하는 사람보다도 고산증 때문에 트레킹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고산증에 가장 좋은 예방약이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천천히 걸었고 빠상은 늘 항상 몇 발자국 뒤에서 나를 따라왔다. 벤바는 아침만 먹으면 짐을 들고 사라져서 점심 먹는 곳에서 만났고, 점심을 먹고서도 짐을 들고 사라져서 숙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트레커들이 걷는 길과 포터들이 가는 길은 다르다고 했다. 포터들은 더 쉽고 빠른 길로 간다는 말에 빠상에게 나는 빨리 가고 싶으니 벤바가 다니는 길로 가자고 했더니 거긴 빠르긴 하지만 고도차가 심해서 고산증에 적응되지 않은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의  아는 사람들도, 한국인 사장도 내게 묻지 않았던 말을 빠상이 물었다.
왜 거기엔 가려고 하세요? 누구 만나러 가세요?
예.
거기 한국사람 살고 있다는 말 없었어요.
한국사람 아니고 네팔사람이에요.
네팔사람이면 한국에서 만났던 사람이에요? 
예. 남편이에요.
빠상은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서울 영등포의 한 식당에서였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따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나 대신에 다른 여자에게서 딸을 얻었고, 내게 위자료 한 푼 주지 않고 떠났다. 이혼한 후에 나는 보란 듯이 남편 몰래 모아둔 돈으로 막대한 대출를 끼고  아파트를 한 채 장만했다. 남편에게 나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어 교사 수업으로 그 아파트의 이자를 내면 남는 돈이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저녁때 근처 돼지 갈비 집에서 일을 했다. 막일을 해 본 적이 없어 실수가 많았다. 손님 앞에 그릇을 놓다가 떨어뜨리기도 하고 돼지 갈비를 잘못 써빙해서 2인분을 4인분 테이블에 5인분을 3인분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그때마다 안타깝게 바라보던 누군가가 있었다. 일이 끝나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를 만났다. 난 열시 퇴근이었고 그는 가게 문이 닫는 열두시에 일을 끝내고 가게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지내기 때문에 그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퇴근하세요? 그가  물었다. 나는 그가 한국말을 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한국에 들어온 지 오래 되었느냐고 물었다. 네팔에서 한국에 들어오려면 한국어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오기 전에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는 오늘 네팔 사람들 모임이 있는데 늦게라도 참석하기 위해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가는 중이었다. 한국어 강사라는 나의 직업에 그는 놀라워하며 반가워했다. 다문화 가족의 여인들, 한국 사람과 결혼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네팔인은 처음이었다.  그는 내가 가르치는 다른 외국인들보다 한국어를 잘했다. 그래도 아직은 어눌한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식당에서 실수가 잦은 나를 그는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했고,  나는 그런 그의 눈빛이 좋았다. 쉬는 날이면 나는 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났고, 수업이 끝난 후 근처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그의 이름은 다지였다. 다지는 삼겹살을 좋아했다. 상추에 된장 찍은 삼겹살을 올려놓은 그는 삼겹살을 먹을 때는 한국 사람 같았다. 그가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 네팔에 가족은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나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냥 한국어를 가르치고 밥을 먹고 그리고 네팔어를 몇 마디 배우며 발음이 어색하다며 웃었다. 웃을 수 있어서 좋았고 웃게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우리 둘 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 아니라서 식당 주변이나 집 주변의 공원엘 주로 다녔다. 여행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다지는 틈만 나면 네팔 이야기를 해주었다. 카트만두 이야기며 포카라 이야기며 룸비니 이야기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부처의 사리가 묻혀있는 람그람이란 곳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었다. 람그람은 언젠가는 꼭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 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다. 히말라야 설산을 바라보며 태어났고. 그 설산 속에서 살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눈이 먼 곳을 향해 있었고 미지의 어느 세상에서 온 그가 나는 점점 좋아졌다. 다지가 된장찌개를 먹어 보자고 했다. 된장은 먹겠는데 된장 찌개만은 도저히 못 먹겠다던 그였다. 오월인데도 이른 더위로 실내가 후덥지근했다. 벽에선 쉴 새 없이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주인이 손님 없는 가게가 민망했던지 티브이를 켰다. 짧은 단발머리의 여자 아나운서가 이른 날씨의 원인에 대해 전문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 뉴스는 네팔 이주 노동자가 울산 어디에서 대형 김치 냉장고를 청소하다가 질식사해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다지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굳이 네팔 노동자의 죽음을 화제삼고 싶지 않아서 그의 눈빛을 모른 척했다. 그도 나를 의식하고 이내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두려움인지 분노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네팔의 주식은 뭐예요? 달밧을 먹어요. 달 과 밧으로 만든 네팔 음식이 있어요.
나는 다지에게 달밧은 150루피 한국 돈으로는 1500원 정도이고, 삼겹살은 1000루피가 넘으니 10000원이 넘는다는 이야기며,  네팔에서 그는 아주 큰 식당의 매니저로 일을 했다는것이며, 그때 그가 받았던 돈은 50000루피, 한국의 물가로 보면 엄청 작은 돈이지만 네팔의 공무원 초임이 20000루피 정도라고 하니 그가  받았던 임금이 적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들었다. 한번도 가보지도 못하고 지구상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는 네팔이라는 나라가 그토록 못사는 나라라니. 몇 번 티브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방영해주던 히말라야의 멋진 산을 중심으로 찍은 화면이 내가 네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고,  그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지 못 사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내가 가르치는 다문화 가정의 여자들 중에서도 네팔에서 온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식당의 작은 방에서 태국에서 온 주방보조랑 같이 생활했던 다지는 그 생활을 많이 불편해했다. 작은 방을 얻겠다는 다지에게  내 집의 남는 방 하나를 쓰게 했다. 다지는 커다란 캐리어와 배낭 하나를 들고 내 집으로 들어왔다. 다지가 들어오면서 어두컴컴하고 우울했던 내 집이 비로소 살아있는 그 무언가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퇴근해서 지쳐서 돌아올 다지를 위해 생과일 주스나 간단한 샐러드를 만들어 놓으면  다지는 너무 행복해하며 그것을 먹었다. 쉬는 날 그가 좋아하는 불고기를 만들어주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어린애처럼 울먹이기도 했다. 더운 날 계곡에 가서 돗자리 펴놓고 발을 담그고 낮잠을 자는 일상들을 그는 꿈처럼 여겼다. 한국에 와서 나를 만나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했다. 내가 굳이 한국어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지의 한국어 실력은 금방 늘어났다. 다지는 내게 친구를 만난다면서 식당에 휴가를 받아 이삼일씩 지방에 다녀오곤 했는데 누구를 만났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네팔에서 같이 들어온 사람들을 만나겠거니 신경쓰지 않았다. 가끔은 아주 진지하게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내가 들어오면 서둘러 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필요한 옷가지 몇 개와 여권 신분증만 가지고 나갔다.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휴대전화는 끊겨 있었다. 그의 소지품을 뒤져 그의 네팔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 영광의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그의 친구는 다지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알만한 다른 사람들을 알려달라는 말에 머뭇거리다 알려준 주소는 서울의 한 사무실 전화번호였다. 김실장을 찾아가면 알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당장 서울로 올라와 그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 사무실 벽에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 인권 위원회라고 씌어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거기서 나는 다지가 불법 체류자였다는 것과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노출되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지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 인권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인권은 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 다지의 사진이 사무실 벽에 붙어 있었다. 부당하게 힘든 일을 하다가 죽은 외국인 노동자의 뉴스를 보며 심하게 흔들렸던 다지의 눈빛을 이제서야 이해할 것 같았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는 100만이 넘고, 불법 체류자도 20만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동안 그가 혼자 겪어왔을 불안감과 고립감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다지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광의 친구가 다지의 짐을 가지러 와서 다지는 네팔로 추방되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물어보지 않았다. 언젠가 다지에게 들을 생각이니까. 그의 네팔인 친구는 네팔의 주소를 하나 건네주었다. 다지의 네팔 부모님 집주소라고 했다. 그 주소로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는 네팔로 가기로 결정했다. 네팔에 가서 그를 데리고 당당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다라파니의 롯지는 정갈한 이층집이었다. 표정이 없는 여주인과 어여쁜 열 몇 살쯤 되어 보이는 두 딸이 있는 집이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달라고 하니 작은 딸이 뒷문을 열고 나가더니 푸른 잎 몇 개를 따와서 찻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나에게 주었다. 작은 딸의 양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빠상은 이곳의 차라며 몸에 좋은 것이라고 했다. 방금 꺾여진 잎은 연한 빛으로 물을 물들이며 물에 떠 있었다. 빛은 연했지만 향기는 강했다. 마르샹디 강을 따라 나는 올라가고 있고, 아름다운 강을 따라 아름다운 마을이 이어졌다. 눈을 올리면 하늘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강과 하늘 사이에는 설산이 있었으며 타르쵸가 그 설산을 배경으로 바람에 유유히 흩날리고 있었다. 마을의 노인 세 명이 짚으로 새끼를 꼬고 있었다. 강과 설산을 따라 찻잎을 넣어 차를 끓여주는 열 대 여섯 살의 소녀가 살고 있었고, 계곡 물을 먹고 자라난 식물들을 가지고 생필품을 만드는 지혜로운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과 섞여 다지와 함께 히말라야 기슭에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건 다라파니를 지나 차메라는 마을에 도착한 날이었다. 종일 걸었던 길들이 여운을 길게 늘이며 남아 있는 날이었다. 아름다운 것과는 달라. 그래 달랐다. 아름다움보다는 신성함이 존재하는 곳, 신성하면서도 아름다운 곳 그곳이 이곳이었다. 차메에는 온천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아직 해가 지기 전에 마을의 끝에 있는 온천으로 나갔다. 고산 때문에 온천욕은 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다. 온천은 두개로 나뉘어져 있어서 하나는 현지 여인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남자 여자 섞여서 옷을 입은 채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온천의 뜨거운 수증기를 따라 허공을 휘휘 맴돌고 있는 그 모습은 아주 오래전의 고향 마을의 개울가처럼 아련하게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곳이 히말라야였구나. 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에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과 풍경들과 길들을 생각하니 그를 처음 만날 때처럼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우상애 2017년 《한국소설》로 등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