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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특집/ 시인과의 한담, 강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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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78회 작성일 20-01-2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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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특집/ 시인과의 한담, 강우식


일시 : 2019년 11월 9일  오후 5시
장소 : 안양 '산채촌'
참가자 : 장종권, 정미소, 박하리, 천선자, 이외현, 정치산, 김선순, 송창현 외
기록 : 고나연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모처럼 선생님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모셨습니다.


요즘 뭐 할 얘기도 없다. 늙은이가 할 얘기 뭐 있나. 안 하는 게 제일 좋다.


시 샘이라고 할까요, 시에 대한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지금 사는 동네가 샘 마을이라 시 샘이 있지. 시 쓰는데 시를 모르면 어떻게 되나. 시는 그냥 쓰는 거지. 시를 배워서 쓴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누구에게 시를 배운 적도 없고 가르쳐준 적도 없어. 그냥 시골에서 구르다가 문학을 해야 되겠다, 시를 써야 되겠다, 한 것이지. 굳이 얘기를 한다면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3대 요소가 있어. 지역, 환경, 성장과정 이런 것들인데. 그것을 떠나 소설이나 시 등 진정한 문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어릴 때부터 성장했던 어떤 과정들과 경험들 뭐 이런 것들이지. 진정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어떤 지역적인 국토에 대한 생각이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지.


『개미』라는 작품을 쓰신 분은 글을 쓸 때 직장 근무를 하듯 아침 8시에 시작해서 8시간글을 쓴대요. 선생님은 하루 중 언제가 가장 글이 잘 나오는 시간인가요?


그 사람은 소설가지. 소설가는 절대적으로 노동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그런 작업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시는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아. 최근 나는 요즘 시도 많이 쓰지 못해. 늙어가면서 이제 쓰고 싶을 때 쓰는 것이지, 쓰고 싶지 않으면 뭐 더 쓰고 싶은 것도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이상하게 생기는 현상이 있어. 주로 새벽에 반은 잠이고 반은 선잠 같은 상태인데, 밤에 꿈 비슷하기도 하고 이야기 비슷하기도 한 것들이 잡혀. 그걸 가지고 시를 쓰는 경우가 많아. 희한하게 그런 현상이 오는 거야. 내 일생 중 어떤 지나간 경험이나 추억이나 이런 것들이 오기도 하는 거야. (그 시간에요?) 응. 그 오는 것을 깨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 그 상태에서 이야기를 이어 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뭐 깬 상태가 되는데 대부분 지나치고 마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이거 한 편 써야 되겠다, 하는 경우도 있게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 일어나서 한 편 쓰고 그러는 거지.


글을 쓸 때 보통은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잖아요. 선생님도 새벽에 컴퓨터로 작업을 하시나요, 아니면 일단 메모지에 적어놓으시나요?


그냥 컴퓨터를 사용하긴 하지. 사실 난 기계치라서 아직까지 자동차 운전도 할 줄 모르고, 핸드폰도 잘 할 줄 모르고, 또 이상한 기계는 만지면 만질수록 잘 모르겠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뭐 컴퓨터도 잘 할 줄 몰라.


그런데 어떻게 컴퓨터를 켜서 바로 하실 수 있는지.


컴퓨터를 배운 것 자체도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야. 컴퓨터를 근무했던 학교에서 설치해 주긴 하니까 자판도 모를 때 학생들이 와서 이렇게 해보라 하고 누르라 해서 그렇게 해서 조금 익힌 거야. 일생 원고지에 직접 썼던 사람이 컴퓨터에 자기감정을 이입시킨다는 것은 힘든 거지. 그 힘들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일종의 자기 습관인 거야. 기계를 사용해서 시도 쓰고 시집도 만들고 하다보니까 그게 오히려 담배 한 대를 피울 수도 있고 해서 훨씬 편하더라. 기계라는 것이 참 우스운 것들이긴 한데.


시를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써오셨는지요.


얘기를 하다보니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네. 내가 시를 이렇게 공부할 때 나는 거의 생래적이거나 자연적인 것과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어. 내가 배우거나 내 시 자체의 창작법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적인 엘리엇 같은 사람들의 것으로서 서구 시를 배웠던 거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이상하게 서구적인 것보다 동양적인 쪽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어. 그 생각은 내가 지금 생각해도 별로 나쁘지 않아. 발생적으로 따지면 서구도 오래 됐고 동양도 그만큼 오래 됐지. 오히려 동양이 더 길 런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배우기로는 서구 시의 영향이 있어서 나뿐 아니라 내 전대의 사람들도 그렇게 배우고 그랬지. 그런데 난 좀 다른 것이 생업인 출판사를 다니면서 관심을 가지고 읽은 책들이 동양적인 책들이 많았어. 시 쪽도 뭐 그런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나 싶네. 이제 생각해보면 내가 걸었던 쪽이 그래도 잘 걸었던 쪽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 요즘도 한국인이고 동양인이면서도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매달려있는 쪽은 극히 드물어. 그 길로 가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


요즘 시 쓰는 사람들도 그런가요?


막말로 요즘 서정시를 쓰는 스타일도 마찬가지야. 동양인이면서 동양인적인 생각을 읽는다는 것도 중요한 것인데, 내가 앞에도 얘기했지만 문학의 3대 요소 중 자기 성장과정이라든지 향토라든지를 많은 시인들이 망각해서 서구적인 것만 쫓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몇몇은 남의 시 비슷한 것들도 많이 쓰지. 그게 자기취향이니까 뭐라고 할 순 없지. 내가 동양의 시 쪽이라고 해서 남의 시가 어쨌다는 것은 아니야. 내가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은 남의 시라고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던 사람들이니까, 또 그런 시로 인해서 빠졌던 삶이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에는 서구적인 영향을 받지만 그걸로 일생 가는 법은 없거든. 자기가 가야 될 길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있어. 내가 이런 방향으로 시를 썼지만 이게 좋으면 그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고, 그 방향에서 다른 세계로 가고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만 시를 쓰면서도 내가 살아온 환경, 국토, 이런 것을 아니까 그것을 떠나서 문학의 진정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동양적인 쪽의 줄을 대고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있는 것이지.


요즘 시단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요?


이런 얘길 하고 싶었던 적이 있어. 나도 요즘 문단 돌아가는 판을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적고 늙어갈수록 자기 외골수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게 되는데, 이제 자기가 시를 쓰는 하나의 써클, 문단이라면 문단, 리토피아라면 리토피아, 더 나아가 한국시단이면 한국시단, 한국문단이라면 한국문다에 자기의식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인식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거야. 리토피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한국시단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한국문단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그런 판단이있어야 자기가 갈 시의 길을 정할 수가 있다는 거야. 무조건 내가 이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보는 거지. 전체적인 상황파악 같은 것이 있어야 내가 갈 길을 고집스럽게 가든 안가든 어쨌거나 가야할 길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찾아가기에는 좀 힘에 겨울 것 같습니다.


내 경우를 따지면 난 스승을 잘 만났지. 미당이라고 하는 스승이 등단 전부터 내가 그 문하에 들어갔고 그 분이 나를 부추겼어. 내 시집 『사행시초』를 많이들 이야기 하는데 그가 나에게 사행시초를 쓰라고 했지. 스승이 쓰라고 했으니 ‘사행시초’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지만 썼어. ‘사행시초’가 뭔지 알 수도 없었고 그냥 넉줄짜리 시를 쓰면 ‘사행시초’라고 해서 썼지. 그걸 미당이 잘 봐줬으니까 그래서 시단에 나왔던 사람이니까. 나는 스승을 잘 만났지만 대한민국의 현시점에서 누군가 자기의 가는 길을 깨우쳐주는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지. 내 갈 길을 스스로 찾건 도움 받아 찾건 그런 위치를 알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내 스스로를 비춰보면 문학 하는 사람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자기 고집이야. 누가 뭐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갈 수밖에 없지. 남의 눈치 보고 문단 눈치 보고 남이 어떻게 쓰나 잘 쓰나 못쓰나 봐서는 자기 길을 찾을 수 없어.


시를 쓰시면서 시를 쓰기 이전이나 일생 중에 인생에 전환점이 됐던 시가 있나요.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전혀 없어.


선생님이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시나 시집은요?


서정주 시집이지. 고등학교 때 서정주 시집을 처음 들었는데 그걸 읽으면서 서정주 시가 좋은 시인 줄 난 몰랐어. 누가 가르쳐줘야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 알지. 아 이렇게 쓰나보다 했어. 나보다 두 해 선배가 있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그 책을 사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이야길 하는데 기가 막힌 시라고 하는 거야. 그 사람이 기가 막힌 시라고 하니까 나도 다시 보니깐 기가 막힌 것 같더라고. 내가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 어떻게 알아. 난 뭐 시가 뭔지 어떻게 시를 쓰는지 모르고 시를 쓰고 했던 사람이니까. 좋은 시, 나쁜 시, 그런 감각이 없었어.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는 시립고등학교잖아. 강원도의 하나밖에 없는 수산계통의 학교인데 거기 선생도 시가 뭔지 모르는 선생이 와서 가르치고 있었지. 나는 아나? 나도 모르고 앉아있고 마찬가지였지. 개나 똥이나 마찬가지였어.


선생님 형제 밑에 동생도 있고, 형님도 있고  아들만 쭉 많이 있었는데 주문진 초등학교에서부터 둘이서 애들 때리고, 형이 때리면 동생이 와서 같이 편들어 때리고, 학교 전체에서 유명한 형제였다면서요.


맞아. 형제는 용감했다지. 그런 스토리로 학교에서 어떤 놈이 와가지고 나발 불고(?) 돈 받아간 놈도 있었어. 주문진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바다 옆에 조금 올라가면 밭이 있었어. 농사짓는 시골 동네인데 춘천고등학교 3학년 놈이 있었어. 나쁜 짓 하고 왔다 갔다 할 때인데 밤에 이 놈 걸리지 않나 하고 살폈지. 시비 걸고 때려줄라고 했지. 이 놈 만나자마자 급하니까 제 집에 들어가 삽을 가지고 나오더라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내가 고등학교 때니까 그 날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오는 거야.


강원도 주문진은 지금도 시골인데 초중고 다닐 때는 얼마나 더 시골이었겠어요?


시골 아니야. 부둣가라도 바닷가는 부자들이 많아. 사나운 깡패들도 많았고. 오징어잡이 철에는 남발이라고 했어. 팔도에서 모여들었어. 별 잡놈들이 오징어 잡으려고 그 조그만 항구에 다 몰려들었어.


서정주 선생님하고의 인연에 대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 중고등학교 때 사생대회 같은 거 있어 나가면 장원도 하고 하셨는데 심사를 서정주 선생님께서 하셨다면서요.


그 얘기 하니까 말인데, 내가 ‘동보성’에서 행사 할 때마다 ‘강우식 출판 기념회’라 안하고 ‘강 수영 우식 시인 출판기념회’ 했던 것이 우리 아버지한테 배웠던 거야. 내가 고2 때인가 고3 때인가, 시인이 되고 싶었지. 미당이 그때는 추천을 막 시켰어. 미당학교라고 있었지. 시인 되고 싶으니까 시를 쓰고 봉투를 써야 하는데 내 필체로 유치찬란하게 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겉봉투를 아버지더러 좀 써달라고 한 거야. 시 쓰는 유명하신 분인데 보낼 거니까 써달라고 했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딱 쓰셨는데, ‘서 미당 정주 선생’, 겉봉투에 이렇게 쓰시더라고. 내가 거기서 배워가지고 그렇게 쓰고 하는 걸 아는 놈들이 없어. 그걸 내가 왜 그렇게 쓰는지 나도 참 희한한 거야.


나중에 시인 되시고 서정주 선생님 제자가 되시면서 아버님께서 봉투 써서 응모하시고 한 거 얘기해 보셨어요?


안했어 그걸 왜 얘기해. 전국문예작품공모인데 이런 거야. 고3때 되니까 대학을 가야하는데 문예작품 당선이 되면 대학을 보내준다고 하더라고. 현상모집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매일 나쁜 짓만 하고 다니던 놈이 문학 한다 하면서 투고를 했는데 운 좋게도 평론 3석 시 3석이 된 거야. 강원도 주문진에서 말도 같지 않은 소리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교부에서 낸 기관지에 낸 평론 가작이 당선된 적이 있어. 3등도 아니고 가작이 됐는데도 아침 조회시간에 전교생이 있는데서 강우식 딱 나오라고 하드만. 상을 주는 거야. 이게 뭐 상도 아니고 가작인데도 문교부장관상이야. 장관상이니까 전교생 모인데서 주는 거지. 웃겨가지고. 문교부장관 이름도 안 잊어버려. 최제우라고.


그때 처음으로 효도하신 거예요?


야 그 효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 효도 얘기 하니까 말이네, 시 3등 평론 3등을 한 거야. 참 웃기는 일이지. 평론 3등이 뭔가 하면, 서정주 시선집을 읽고 쓰는 것인데 참 바보 같지. 그럴 듯한 제목을 달아 평론 3등이 된 거야. 시는 ‘노을’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도 안 잊어버리는 건데, 노을이라는 것은 내가 시집 속에도 고쳐 쓴 거 같아. 태백산맥 밑이니까 태백산맥에 노을이 타는 것을 무슨 잔치 때문에 화려한 불길이 오른 것을 본 얘기를 시로 쓴 거야. 그게 노을이야. 이게 3등이었지. 근데 참 놀랍지. 내가 국학대학이라는 데를 간 거야. 지금 고려대학교가 됐는데, 가니까 그때 인천에 있는 태동철이 있잖아. 내 제자 된 이 사람이 날 보고 박석준이를 아시냐는 거야. 그 애가 전국 문예작품에 2등이 된 애야. 잘 안다고 했더니 박석준이하고 제가 인천고등학교 동깁니다. 하는 거야. 박석준이 나보다 나이가 많지. 인연이라는 게 참 더럽다고 했지. 박석준이라는 친구가 옛날에 잡지사 주간을 했어. 라디오 드라마도 쓰고 그러면서 밥 벌어먹고 살았지. 아직도 살아있다고 그러더라고. 작년에 떠났지만. 석준이라는 친구가 옛날에 만든 ‘여학생’지가 잘 팔렸어. 날 보고 시 나부랭이 쓴다고 수필연재를 하라고 하는 거야. 한 일년 간 연재를 했더니 수필은 더 이상 못쓰겠더라. 이게 뭘 아는 소리를 해야 되겠는데 삼십 되는 놈이 괜히 아는 소리 하려니까 못 배기겠는 거야. 그래서 하다하다 못해서 일 년하고 더 안한다고 끊어버렸어. 박석준이하고 그런 추억이 있었지.


선생님 국학대학 오시기 전에 주문진 수고에서 문예작품에 응모해 상품으로 시계를 받으셨다죠. 그 시계를 아버님이 머리맡에 놓으시고 정성들여 닦고는 하셨다면서요?


사실 아버님께서 시를 쓰고 싶었는데 먹고 살아야 하니까 꿈을 이루지 못하셨지. 내가 시를 써서 받아온 시계를, 독일젠가 그래. 못 이룬 꿈을 닦듯이 그렇게 닦으셨어.


어머니 말씀은 평소 잘 안하시던데요?


우리 어머니야 내가 뭐 속일 거 없는 사람이야.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돈 주고 사온 여자야.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서 얼마 못 살고 죽게 될 거였지만, 아버지 집은 잘 살았어. 어머니는 예산 오형제 고개 밑에 무슨 마을에 살았는데, 나중에 거기에 가봤지만 다 잊어버렸지. 어머니의 집이 아버지가 그 박물장수를 하시면서  장돌뱅이처럼 박물장사, 엿 장사, 같은 박물장사를 하시면서 알게 되었지.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인 거야. 온양에서부터 예산 넘어오는 고갠데 맨 도둑놈만 출몰하는 고개야. 아무나 못가고 떼로 넘어가야 하는 고개인데 그 밑에 살았어. 강하기 이를 데 없으니 우리 어머니가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맏딸이야. 근데 우리 아버지 집이 온양에서 잘 사는 집이었지.


아버지가 온양에서 사셨어요?


아버지가 장돌뱅이로 전국 팔도를 다 돌아다녔는데 망해가지고 두 형이 있었는데 형들이 뭐 도박 계집질 하고 그랬어. 아버진 막낸데 돈도 만져보지 못하고 우리 어머니 일자무식으로 돈으로 사와서 살다가 다 망해버렸으니 끝이지.


우리나라에 문학이 들어오고 시가 들어와서 문학 담론을 끌어가시는 분들이 그 시대에 끝났잖아요. 평론가들 얘기가 주로 나오고 시들이 나오고 영향을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순수 참여 여기까진 담론을 끌어가더니 그 이후에는 담론이 한쪽으로만 획일화 되어서 사라져 버렸거든요. 요즘엔 평론가도 대접을 못 받을 것 같아요.


그렇진 않아.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 이런 것일 순 있어. 가령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한쪽을 선택을 해야 할 사람들은 아닌지. 개인적으로 못 정할 때도 많아. 가령 나 같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어느 한쪽을 정하라고 사회 전체가 나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강요든 아니든. 그렇게 흐르고 있는 쪽에 일생을 난 그렇게 산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맞는지 안 맞는 진 몰라도 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내가 창비에 들어갔다가 창비에서 시집도 내고 했는데 창비에서 나온 원인이 있어. 창비 초창기에 들어갔었지. 내가 어디에서 한 얘기인데 창비시선에 내가 뭐 실수로 따지면 열세 번째인가 그래. 그것도 늦게 들어가서 열세 번째야. 그렇지 않으면 열 번 안에 들어갔을 거야. 대학교 때 민주화운동이 거셀 때 내가 학생들에게 얘기를 했어. 난 데모 반대인 사람이고 문학의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공산당 서열로 따지면 13위다. 그런데 나는 그냥 문학은 문학으로 하는 사람이지. 창비에서 그런 쪽으로 흐르니까 이건 문학이 아니라 해서 나온 사람이고, 일생을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일이 있었어. 어떻게 생각하면 그때 같이 어울려 갔으면 아마 내가 고은보다 더 유명해졌을지도 몰라. 내 스스로가 안했을 뿐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동아일보 광고 안줄 때 백삼일 운동까지가 마지막이야. 어쨌든 그런 것은 내가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고 내가 문학을 하는 내 고집이었지. 난 뭐 시만 쓴다고 했는데 그 시 쓰는 것 자체가 정말 대한민국에선 힘든 거야. 무슨 광장 예를 들자면 이런 쪽의 어느 한쪽으로도 갈 수 없는 지식인의 좌절감 같은 것을 잘 나타낸 것의 하나였지.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아닌 좌우 양편으로 갈린 쪽은 지금까지도 계속 그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참 힘든 세월이지. 소위 지식인이 비겁한 일면도 있겠지만 선택을 하라고 하는데 못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걸 뭐 난 중도파라고 얘기를 하고 있지.


어머니가 물감장사를 하셨는데 그 돈 통 안에 돈이 많았을 거 아니에요?


뭐 내가 훔쳤다는 거냐? 유치하게 그거 안 훔친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어머니가 아시면서도 모른 척 해주신 거죠?


어른들이 모르겠냐? 다 알지. 그렇지. 속아 넘어가 줬지.


(이 뒤로는 많이 취하시고 우리도 취해서 기록이 어렵다.)





*강우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행시초』, 『고려의 눈보라』,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 『물의 혼』, 『설연집』, 『어머니의 물감상자』, 『바보산수』, 『바보산수 가을 봄』, 『마추픽추』, 『사행시초2』, 『꽁치』,『하늘 사람人 땅』, 『가을 인생』, 『바이칼』발간.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펜클럽 문학상 시 부문, 성균문학상, 월탄문학상, 김만중문학상 수상.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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