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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김인자/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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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65회 작성일 17-01-0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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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

김인자






세계여해에서 만난 사람들



#15. 레이첼, 우울한 재회
레이첼은 2005년 7월 아프리카 트럭여행 중 말라위 호숫가 칸데비치 마을에서 만난 말라위 여자다. 그녀를 특별히 눈여겨 본 건 고갱의 연인 테후라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나오미 캠벨을 닮은 것 외 설명 불가한 원시적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18살인 그녀는 결혼했고 출생 20일된 아들(Balson banda)을 둔 풋풋한 여자였다. 남편의 사랑은 뜨겁다 했고 아들을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자신감과 행복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떤 날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옷으로 갈아입고 망고나무 아래에서 포즈를 취했고, 또 어떤 날은 호숫가에서 반라로 천진하게 웃었다. 헤어지던 날, 우린 뜨겁게 포옹했고 다시 만나자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 약속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4년 2개월이 지난 2009년 9월, 여기서 내가 레이첼을 만나러 갔던 그 길의 어려움은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는 다시 그 먼 말라위로 날아갔다. 물론 레이첼과 그의 가족사진을 여러 장 인화해 배낭 깊은 곳에 넣고서. 그녀는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을까? 4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깔깔댈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 행복했다. 집을 떠난 지 2주쯤 지난 어느 오후 레이첼과 마주섰다. 우린 서로를 기억하고 알아보는데 아무 장애도 없었다. 헤어질 때보다 더 깊은 포옹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고 22살이 된 그녀 곁에는 새로 태어난 아가가 있었다. 둘째 딸아이(Sarah banda)였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녀는 고갱의 연인 테후라를 상상하던 도도함과 냉소적이기까지 했던 아름다운 레이첼이 아니었다. 풋풋하던 미소도 그때의 미소가 아니었다. 4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녀는 삶에 찌들어 생기를 잃은 평범한 아줌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불행을 직감했고 가슴이 몹시 아팠다. 그건 남편의 외도와 빈곤이 원인이었는데 할 수만 있다면 4년 전 레이첼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 마음은 내가 레이첼 같은 딸을 둔 엄마거나 같은 여자라는 이유만은 아닌 건 분명했다.
재회라는 단어가 행복의 상징일 수만은 없다는 거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그런데 나는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아프리카 하면, 원시적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던 레이첼과 내 품에 안겨 눈물을 삼키던 또 다른 레이첼을 잊을 수가 없다. <<아프리카 말라위

#16. 보는 것보다 만지고 느끼는 것이 더 행복
많은 여자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유독 그녀만 귓속말로 머리를 만지고 싶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녀가 내 머리칼을 더듬는 감촉은 보통 사람과 조금 달랐는데 뭐랄까 결이 느껴지고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하달까. 그런데 느닷없이 그녀가 빗을 꺼내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빗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게 재밌는지 킥킥 웃을 땐 뭔가에 당첨이라도 된 듯 주변 여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참 후 빗질이 멎어 뒤를 돌아보는 순간 황급히 나를 피하던 그녀. 후에 알았지만 한쪽 시력을 잃은 지는 오래되었고 나머지 한쪽도 빠르게 나빠지고 있지만 아직은 별 문제가 없단다. 그런데 내 머리는 왜 만졌느냐 하니 “세상은 보는 것보다 만지고 느끼는 게 더 행복하잖아요.”란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가 빨리 걷지는 못해도 높이 날아오를 수는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상이 명료하지 않을 때 감각은 발달할 수밖에 없겠지만 절반의 시력으로 산다는 건 삶의 균형을 잃기보다 밝은 영을 소유하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머리 조금 더 만져도 되나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보는 것보단 만지고 더듬고 느끼는 게 행복이긴 했다. 그녀가 내 머리칼을 만지는 동안 어릴 때 친구와 하던 소꿉놀이처럼 잠시라도 나를 느끼고 행복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인도 푸리



#17. 차밭 노동자
차밭 노동자인 이 노인은 하루 10시간 뙤약볕 아래에서 일한 대가로 1달러 정도를 받는단다. 집에 갈 때 버스를 타면 차비가 약 750원, 그래서 종일 차잎을 따주고 번 1달러를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가려면 꼬박 서너 시간 이상 걸어 출퇴근을 해야 한다고. 점심은 익힌 카사바 한 덩이, 식사는 허기를 면할 정도지만 차는 맘껏 마실 수 있으니 괜찮다고, 사는 거 다 그런 거 아니냐며 시종 웃음으로 답했다. “파파, 패션이 멋져요” 했더니 “내가 좀 그렇지!” 하시며 파안대소 하셨다. 언제 신발을 신어봤는지 기억이 없다던, 나이는 들었지만 노동으로 다져진 몸과 검게 그을린 얼굴이 건강해 보였다. 잉여를 탐하지 않아서인지 가진 자의 웃음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아프리카 말라위 퉁가


#18. 어떤 프로포즈
붉디붉은 황톳길에 태양이 양동이로 내리퍼붓는 오후, 한 번도 닦지 않은 듯한 새까만 주전자를 걸어놓고 장작을 지핀다. 그렇게 끓인 차를 낡은 스텐컵으로 홀짝홀짝 마시며 나는 차밭가에 앉아있었다. 차잎을 따는 동안 어떤 사내는 내가 모르는 언어로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내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고 그런 일상에서 동양여자의 출현은 차잎을 따는 남자들에게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처음부터 한 남자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는 걸 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어디서나 노래를 부르고 어디서나 춤을 추는 찢어진 가난을 이기는 아프리카인들의 낙천성, 아프리카 남자들은 왜 그리 웃음이 많은지, 저 만치 있던 현장감독이라는 남자가 한 손을 뒤로 감춘 채 내 앞에 나타났다. 누군가 박수를 치자 모두들 실실 웃기만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 할 때 남자가 불쑥 꽃을 내밀었다.
“사랑합니다. 마담!” 나는 귀를 의심했다. 신이 꽃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상의 연인들은 무엇으로 사랑을 고백했을까. 가장 빠르게 여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무기로 꽃 말고 무엇이 있는지 몰랐던 나는 바보처럼 호호호 웃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걸 들키지 않으려고 잠시 하늘을 봤다. 꽃밖에 줄 수 없어 미안해하는 그가 싫지 않았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찾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그래서요?” 그가 다시 말했다. “마담, 내 사랑을 받아주세요!” “그럼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줄 수 있죠?” “이렇게 꽃을 따줄 수 있고 녹차를 맘껏 마시게 해 줄 게요.” 어쩌면 좋은가, 이런 프로포즈가 처음은 아닌데 조크가 조크로 들리지 않으니,
감독이라서 그럴까. 옷도 말끔하고 모자에 빛나는 ‘BMW’ 마크에 잠시 마음이 휘청했다면 웃으려나. 그나저나 얼떨결에 그가 주는 꽃을 받고 말았으니, 이제 나는 이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멀리 있는 친구로부터 산책길에 만났다는 들장미가 도착한 날 아침, 아프리카 사진첩에서 이 남자를 발견하고 혼자 웃음이 터졌다. 여행과 추억은 참으로 힘이 세다. <<아프리카 말라위






**약력:《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 떼와 놀던 어린 시절』 등. 산문집 『그대, 마르지 않는 사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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