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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산문/정무현/대마도, 그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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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35회 작성일 17-01-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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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산문

정무현






대마도, 그 첫 만남



   ‘대마도’,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세종실록에 조선땅으로 되어있으며 1750년대 해동지도에 ‘호남의 제주와 영남의 대마를 양발로 삼는다’라고 하여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였고 풍신수길이 1592년 조선침략 이전에 그린 왜의 지도에도 조선땅으로 되어있는데 강제침탈하고 뺏어간 지 어언 400년이 흘렀는데도 이 땅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독도는 일본과 아무 관련이 없고 그들이 부르는 대로 다케시마(대나무 섬)라 하면 대나무 하나 없는 섬이니 분명 이건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죽도竹島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독도에 갖다 붙이고 자기네 땅이라고 생떼를 쓰는데도 우리는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한국땅인 대마도를 한국땅이라 한마디 못하고 남의 일인 양 흘려보내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당연히 반환되어야 할 포츠담선언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여행하는 기분을 갖는 게 현명한 처신이다. 이번 여행의 일행은 모두 19명으로 부천에서 5월 28일(목) 밤 11시에 출발하였다. 여행계획은 부산까지는 버스를 타고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배를 이용하는 것으로서 대마도 일정을 소화하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동해 쪽으로 해서 부천으로 돌아오는 2박 4일 여정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잠을 자야 할 시간이지만 버스로 이동하는 중이라 잠을 청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물론 최대한 여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리무진 버스를 이용하였지만 버스에서의 잠은 자는 둥 마는 둥이라 이런 선잠은 뻔하지 않는가. 다행히 우리 일행은 경주가 고향인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이미 길게는 수십 년간 다져진 우정으로 서로 간에 서먹함에 따른 고통이 없는 것이 그나마 푸근하게 하였다. 남으로 향하면서 고속도로 휴게실을 두 번에 걸쳐 이용하였으나 부산에 도착하니 새벽 4시로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오전 9시가 되어야 출항하는 배를 탈 수 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모두가 버스 속에서 날이 밝기까지 잠으로 때우기로 들어갔다. 새벽 6시가 되자 우리는 근처의 자갈치시장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시장기는 별로 없었지만 간단하게 국물이 있는 식사를 일종의 의무인양 먹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난밤에 부천에서 먹은 술기운이 여전히 남은 탓도 있었다. 식사를 마쳤는데도 시간은 1시간을 채 채우지 못했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메우기 위해 용두산공원을 들르기로 했다. 용두산공원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이곳은 부산시민들의 애환이 가지가지 얽힌 곳이다. 특히 6.25전쟁 당시에는 해병대가 진지를 구축함으로써 나라의 명운을 지키기도 하였다. 주차장은 현재 몇 대의 여유 주차대수가 남았다는 전자게시판이 붉은 글씨로 보여주고 있었으며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전망대는 개방되지 않았다. 주위를 돌며 간단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우린 시간을 보내다가 국제여객선터미널로 향했다.
   8시 45분에 우리는 모두 승선하였다. 작은 들뜸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배는 9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약 1시간의 운항이란다. 10시가 되어 다소 아쉬울 즈음 대마도의 전경이 드러났다. 아주 잘 다듬어진 고향동네와 같이 산과 집들이 바다와 함께 깨어나는 모습이다. 10시 반경에 우리는 입국심사를 마치고 히타카츠항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일본인들은 양손 지문과 얼굴사진을 찍도록 눈으로 강요를 하였다. 괜한 심통이 나 터미널을 나서는데 역시 ‘쪽발이구먼’ 하며 나 자신도 작은 키로 반죽떨었다. 대마도는 현재 인구가 33,000여 명으로 주민은 그리 많지 않으며 주로 어업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단다. 물론 현재는 한국관광객이 주말이면 2,000~3,000명이 방문함으로써 1년에 약 15만 명이 다녀간다고 하니 관광을 통한 수입도 상당하다 하겠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자기소개를 간략하게 하고 1박2일간 함께 잘 모시겠다는 말을 깎듯하게 남기고 일정설명과 함께 제1행선지로 출발하였다. 11시 10분이 좀 지나 미우다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이 해수욕장은 자연경관과 맑은 물로 일본해안 100선에 선정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역시 깨끗한 물과 고운 백사장은 나무랄 데 없었다. 다만 백사장 규모가 작았지만 상징물인 양 해안가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단층집만 한 암석이 자리 잡고 그 바위를 품으로 하여 나무와 풀들이 자라는 것에 역시 생명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변 옆으로는 간이 방갈로도 있어 야영도 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차량을 이용한 매점이 딱 한 곳이 있어 아이스크림, 커피 등을 팔고 있었는데 햇볕을 피하려고 미니봉고 같은 차량에 지붕을 이층구조로 개조한 것이 아주 앙증맞아 보였다. 
    미우다해수욕장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히타카츠항이 있는 곳으로 점심식사를 위해 돌아왔다. 대마도는 상도와 하도로 구분되는데 상도에 있는 이곳 항구는 국제항구라고 하기엔 왜소했다. 시가지 또한 면사무소 소재지 정도로 발전이 더딘 곳이다. 그곳에서 멀지않은 골목길에 있는 간학干鶴이라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우린 스끼와 우동을 먹었다. 대체로 한국에서의 우동보다 맛이 낫다고는 볼 수 없었다. 이곳 대마도는 원래 향토요리가 이시야끼와 이리야끼가 유명하고 로쿠베라는 음식도 있단다. 이시야끼는 각종 해산물을 돌에 구워먹는 요리로 여기에 생선회, 전복이 더해진다. 이리야끼는 냄비전골요리로 해산물을 잘 이용한 음식이며 로쿠베는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국수요리라고 한다. 어쨌든 먹어보지는 못해서 그 맛을 표현할 수 없어 아쉽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12시 반경 한국전망대에 도착했다. 이날따라 궂은 날씨에 바다 끝이 뿌연 안갯속에 묻혀 있어 부산은 쑥스러운 듯 아예 얼굴을 내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전망대 우측으로는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朝鮮國譯官使殉難之碑가 어두운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는데 재단에는 정성스레 꽃송이가 놓여있었다. 그래, 이곳이 얼마나 우리와 함께 했던 곳이냐. 소리치면 형님, 누이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이곳에 우리는 형제애를 갖고 철마다 때마다 내왕을 하며 정을 나누지 않았더냐. 섬나라 해적 근성을 버리지 못한 일본인 때문에 이들은 살기 위해 정을 두는 곳 달리하고 인사하는 곳 달리했으니 이곳 사람 대부분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하였으며 역관 대부분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숙종29년 음력 2월 5일 이날은 특별히 3대 대마도주 요시마사의 장례와 5대 도주 요시미치의 승계를 축하하는 날이라 조선에서는 성의를 다하여 조선역관을 보내었고 대마도에서 4명이 조선으로 마중을 나와 모두 3척의 배를 타고 대마도에 닿기 직전 와니우라 앞바다에서 난데없는 기상이변으로 거센 풍랑을 만나 112명 전원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기념비다. 죽은 이의 신분과 이름이 다 밝혀진 건 그나마 대마도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얼마나 조선과의 교류를 중요히 여겼길래 이토록 빠짐없이 기록했단 말인가. 애잔한 마음을 거두고 다시 일정을 이어 아소만의 풍광을 볼 수 있는 에보시타케전망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이었다. 바다와 바다 사이가 섬들로 채워져 있어 대마도가 109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실감나는 광경이다.
    이곳에서 차로 약 10분을 내려오니 일본 최고의 해궁신사라고 자랑하는 와타츠미신사가 우리를 맞이한다. 신사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토리이가 있고 하늘 천天 모양이다. 모두 5개가 있는데 3개는 바다에 있다. 예전에는 모두 바닷속에 있어 배를 타고 와야만 했다 한다. 원래 일본의 토리이는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곳 토리이만 서쪽을 향해 있다. 이는 한반도 남단 김해를 가리키는데 이곳 신화가 단군신화와 흡사한 점과 더불어 그 의미를 곱씹어 볼 만하다. 토리이에는 금줄을 걸어놓았으며 금줄에는 구름모양, 땅모양, 사람모양 종이들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토리이 위로는 돌들이 쌓여있는데 이것은 소원을 비는 것이라 했다. 토리이를 들어서니 신사에는 본전과 배전이 자리 잡고 있다. 본전은 일반인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곳이었다. 배전에서 소원을 빌기 위해서 절을 하고 배전 끝에 매달려 있는 종을 치거나 손뼉을 치는데 이것은 신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라 한다. 대마도에는 불상을 두 번이나 한국인에게 도난을 당한 적이 있다 하는데 첫 번째는 도난당한 불상을 한국정부에서 찾아 반환하려고 하였으나 우리나라 서산 부석사에서 원래의 소유주임을 내세워 결국 한국에 남게 되었다. 일본 문화재 불상 대부분이 원래 약탈해간 한국 문화재이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이동이 시작되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우리는 아시아 역사를 바꿔놓는 계기가 된 만관교에 도착했다. 대마도는 원래 상도와 하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섬이었는데 일본군이 이곳을 뚫어 섬을 나누어버린 것이다. 폭25m(현재는 40m)정도의 이곳에서 역사를 뒤흔든 일이 벌어지고 만다.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육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러시아의 막강한 해군력을 제압하기는 무리였다. 이때 세계최고의 러시아 발트함대가 1905년 5월 27일 새벽 블라디보스토크항으로 가기 위해 대한해협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정보를 접하자 일본군은 주력부대가 진해만에서 나가 기습공격을 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대마도 주변에서 해전을 준비한 일본해군은 아소만과 이곳 수로에 숨어있다가 측면과 후면을 기습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한 후 정면으로 주력함대가 발트함대를 가로막고 화력을 퍼부어 몰살을 시킨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 시작된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러일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대륙진출 발판을 굳혔다. 이에 따라 당시 러시아와의 외교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조선왕조는 결국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이때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일본사령관은 도고헤이하치로로서 발트함대를 물리치고 난 후 영국언론과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한 기자가 ‘당신은 영국의 넬슨제독과 비견할만한 분이십니다.’라고 하자 ‘넬슨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비슷한 수의 함대로 물리쳤지만 나는 3분의 1정도의 함대로 승리했다.’ 하며 넬슨보다 우위에 있음을 은근히 표명했다. ‘그러면 조선의 이순신과는 어떻습니까’ 라고 하자 그는 ‘나를 이순신제독과 비교하지 마라. 내가 그 휘하에 있었으면 하사관도 못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나의 시대에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전 세계를 재패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나와 넬슨은 몇 차례의 승리를 했지만 그분은 수십 차례의 전투를 전부 승리로 이끌었으며 식량과 군수물자를 직접 조달하면서 전쟁을 치른 데에 더 큰 위대함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일본을 방문한 미국 해사 생도가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이순신’이라고 답하면서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라며 말을 막았다 한다. 역시 아무리 미운 일본인이라도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인 모양이다. 
    만관교의 바다는 아직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있기나 했었냐는 듯 좁은 해로를 타고 흐르고 있다. 다만 그날의 핏자국인양 붉게 칠해진 다리만이 선명하게 얹혀있다. 오늘의 여행은 여기까지다. 우리가 숙박할 장소는 대마도의 유일한 호텔인 대마호텔이다. 오후 5시가 넘어 우리는 호텔에 당도하였다. 2인실로 된 객실은 정말 좁았다. 배낭을 바닥에 놓으면 방안이 꽉 찼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래도 가장 나은 숙박시설이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저녁은 인근 식당에서 해산물바비큐를 먹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마도의 각종 해물과 삼겹살, 소고기, 버섯을 로스터에 굽고 여기에 소주를 곁들이니 먹는 즐거움을 넘어 감사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도 식당에서 술은 파는지라 기본적으로 각 테이블별로 이곳 맥주 한 병씩은 시키는 예의는 거스르지 않았다.
   이곳 이즈하라시는 대마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호텔과 티아라쇼핑센터, 면세점, 거기다 1000냥점까지 있어 거의 불편함이 없었다. 시가지가 크지는 않지만 잘 정돈되어 있고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루종일 다녀도 잘 보이지 않던 현지인들도 이곳에서는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리와 다른 차량의 좌측통행과 우측운전대도 나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차들은 길을 건너는 사람을 기다리고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소로의 하수도 뚜껑은 길 가운데로 스틸그레이팅을 두어 물이 잘 빠지게 하고 각종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잘 제거하기 위해 받침판을 두어 수시로 청소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꼼꼼한 일본인의 습관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또한 사당 같은 것이 눈에 잘 띄었으며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와 수선사도 볼 수 있었는데 수선사는 한국인이 지은 불사라 했다. 불사라 해봐야 가정집보다 조금 큰 목조건물에 한국 범종을 매달아 놓았으며 주지는 아침 다른 곳으로 출근하고 저녁에 와서 절을 관리하는 겹벌이 생활을 하는 정도였다. 주 수입원은 불사 왼쪽에 납골묘가 있어 이를 유치하는 비용과 관리비용을 받아 재정을 만들고 있었다.
    아침 6시 30분에 기상하여 간단하게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고 금석성 유적을 방문하였다. 이곳은 원래 대마도주가 사는 성이었으나 지금은 성터만 남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곳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비운의 여인 덕혜옹주의 결혼봉축비가 나온다. 비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씨왕가 대마백작~’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본시 대마도는 조선의 한 도에 해당하였으니 신하관계의 나라와 혼인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왕가라 하여 단순히 토호 집안의 가문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분명 당시 대한제국이기에 황족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진대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던가. 일본은 의도적으로 황족을 신하가문과 동등하게 격을 낮추고 일본의 신민국臣民國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삶은 또한 얼마나 아팠던가. 고종은 애지중지하며 사랑을 준 공주를 일본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키려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고종마저 의문인 채로 승하하신다. 소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갖은 수모를 다 당하신다. 결국 그토록 원하지 않던 일본인과 결혼을 해야만 했으니 나라 없는 공주의 불행은 예견된 일이었다. 많은 밤을 그리움에 묻혀 지내야만 했고 지나간 행복했던 시절은 파도에 실려 날아가 버렸으니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게 고통의 연속이었으리라. 결국 공주는 조울증을 앓고 급기야는 외부현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환각, 망상, 환청 등 정신병인 조발성치매에 걸리고 만다. 단 하나 얻은 딸 정혜(일본명 : 소 마사에)는 명석하여 와세다대학을 나왔으나 그녀 또한 자신의 불행을 어머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 부모 곁을 떠난다는 글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공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는 소문으로는 나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림 솜씨가 좋아 대마역사자료관에는 그의 그림이 남아있고 시에도 능해 카미자카전망대에는 그의 생각이 아직도 남아 한적하게 여행객과 마주하고 있다. 한마디로 예술적 소양이 뛰어나고 도쿄대를 나온 수재였으며 인물도 훤칠하였다 한다. 그의 공주에 대한 사랑은 파혼에 대하여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으나 한 번도 공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한다.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응당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을 텐데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선으로 공주는 노후에 한국에 오게 되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산다. 그에 반해 다케유키는 재혼을 하고 평범한 결혼생활로 들어갔으나 중년이 되어 한국으로 와 공주를 찾는다. 그러나 공주가 거부하여 재회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주의 피눈물은 대마도가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 비로소 맺힌 한이 풀리지 않을까.
    카미자카전망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리아스식 해안의 표본을 보여주듯 올망졸망 섬들이 젖가슴처럼 솟아있다. 숲속을 걷는 힐링 시간도 괜찮았다. 이곳 전망대에서 멀리 시라다키산과 아리아키산이 보인다. 이곳 대마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3~4시간의 등산코스로도 좋단다. 짧은 여정 탓에 어느덧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산을 내려와 이즈하라시내를 쇼핑 겸 둘러보았다. 이곳 술로는 시라다께와 야마네코가 유명하단다. 정종이 먼저 떠올라 느낌이 없다. 먹는 것으로는 카스마키빵이 유명하단다. 130년의 전통이란다. 우리 일행은 오후 3시에 이즈하라항에 도착하였다. 바깥은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곧 승선을 하여 부산으로 갈 것이다. 올 때와 달리 가는 시간은 2시간이다. 항구가 한국의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돌아서 가야 하는 까닭이다. 이후로도 우리는 부천에 당도하기까지 여정을 보내야 하고 우선적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해운대바닷가의 숙박지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해운대의 밤은 대마도와 달리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추억을 만들 것이다. 동해안을 돌아 맛있는 홍게와 물회를 먹을 것이다.
   1년에 15만 명의 한국인이 방문하는 땅, 왜 일본인이 이곳에서 살고 있는지, 우리는 독도보다 더욱 명백하게 우리 땅인 것을 우리 땅이라고 하지 못하는지, 포츠담회담에서 선언된 뺏긴 땅의 반환은 언제 이루어지는지, 역사를 바로 교육하여 지나간 잘못은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바로 잡아 나가야 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이 필요하다. 대마도에서 벌어지는 아리랑축제는 이즈하라항축제로 바뀌고 대마도의 방문환영인사는 쓰시마방문환영인사로 바뀌고 대마도의 우리역사는 사라지고 일본의 역사만 남게 하는, 이렇게 일본이 우공이산으로 가고 있다. 착잡한 마음을 시로 달랜다.




대마도



부산에서 빤히 보이는 땅
호남의 제주와 양발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 장정 징용으로
한국인의 씨를 말리려 했던 곳,
이승만의 반환요구는 6.25전쟁에 묻히고
세종의 조선령은 아직도 화석처럼 굳어있다.
8월의 아리랑축제는 한을 풀어놓고
대마도주 소宗 씨는 한국인 송宋 씨라고 동래부지東萊府誌는 밝히니
신라인이 머물고 고려인이 머물렀다.
풍신수길이 공격해야만 했던 땅
도민들은 맞서 싸웠고 동경박물관에서 비석이 되어 증언한다.
1871년에 이즈하라번, 1876년에는 나가사키현
강제편입 당하고 일본인이 들이닥치니 
포츠담선언은 기억상실이다. 
리아스식 해안은 올망졸망 님을 기다리고
덕혜옹주의 눈물은 감아 돌며 출렁이는데
독도를 시비하니 잊히고 있다.







**약력:《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풀은 제멋대로야 』.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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