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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백인덕/협로狹路 -‘시인의 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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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백인덕
협로狹路 -‘시인의 길’에 대한 단상
― 지난호 다시 읽기
가을에는 감상적인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 ‘감상’이 ‘Sentimental’과 ‘Aesthetic’을 동시에 포섭할 수 있는가 일 뿐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전자는 감각적 인지가 기억의 저장고에서 무수한 유사 계열의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을 지칭한다. 반면에 후자의 의미는 감각적 인지를 미적 인식으로 분해, 재결합하면서 기억의 내용물들을 재구再構, 재정의再定義하는 것까지 확장된다. 시인들은 당연히 미학적 인식에 예민한 존재들이므로 후자에 가까운 감상에 젖어들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어쨌든 감상적인 기분aura에 휩싸여 ‘시인의 길’에 대한 생각 한 꾸러미를 풀어헤친다. ‘협로’, 시인의 길이 ‘좁고 험한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이견異見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숱하게 들어 온 강론으로 우리들은 이미 그렇게 세뇌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의식이든 세뇌의 결과이든 지금 이 순간에도 시인의 길은 그다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여러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협로’의 비유로 시작했으므로 그에 맞춰 보려 한다. 생성 원인을 생각해 보면 ‘융기隆起와 침식浸蝕’을 들 수 있다. 좌우의 지형이 어떤 영향에 의해 치솟았을 때 그 경계점에서 힘이 상쇄되면서 상대적으로 낮은 고도에 형성된 협곡이 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평탄했던 지면이 어떤 외부적 힘, 가령 비나 바람, 빙하와 같은 요인에 의해 침식되면서 상대적으로 가파르게 형성된 골짜기 또한 협로라 할 수 있다.
엉성하게 협로를 언급했지만 ‘시인의 길’ 또한 이 ‘융기와 침식’이라는 두 작용의 인간적 버전으로 좁고 가파르게, 심지어는 위태롭게 정의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호에는 이와 관련할 수 있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
1.
모든 인생이 그렇겠지만. 시인에게 ‘삶과 죽음’만큼 영원한 테마이면서 한계 조건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을이므로, 이 일반적인 서술에 의문을 가져보기로 한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죽음’을 경험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경험 이전에 선취된 것이므로, 사실 명목상의 고비일 뿐이고 모든 영광과 질곡은 ‘삶’으로 쏟아지고 삶에서 뿜어져 나간다.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사유는 곧바로 삶에 대한 사유일 수밖에 없으며, 죽음의 예찬은 삶의 개선에 대한 의지의 반어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너무 가혹해요
성미 급한 사람들은 오래 전에 벌써 다 죽었는데
찬송가 493장을 펼치고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보이지 않아
비탄의 금잔화 한 다발을 사들고 오늘도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파리행 티켓은 너무 비싸고 아득해요
죽음이 간절해질수록 삶은 더욱 쓸쓸해지고
죽음의 형식 또한 마지막 잎새처럼 갈수록 초라해져요
이곳에도 자살가게를 만들어줘요
― 김상미, 「파리의 자살가게」 부분
시인이 정말 ‘파리에는 자살가게’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자꾸 파리를 부르는 것은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슈퍼나 마켓이 아닌 ‘가게’라는 별로 예스럽지도 않은 어휘가 시의 매력을 더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반어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이 간절할수록 삶은 더욱 쓸쓸해지고/죽음의 형식 또한 마지막 잎새처럼 갈수록 초라해”진다는 것은 뒤집어 읽으면 삶에 간절할수록 죽음은 따뜻해지고 그 형식마저 당당한 진다는 것이다. 무슨 보험 광고처럼 뒤만 생각하지 말고, 오늘의 나를 당당하게 세우라는 시인의 전언이 들린다.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의 후반부, “삶이란 얼마나 잔인한 은총인가요?/매일매일 알프스산맥을 넘는 꿈을 꾸다보면/언제가는 나도 파리에 도착하게 되겠지요”라는 부분이다. 시인은 행동, 아닌 시인은 꿈꾸는 자임을 이 몇 행을 통해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파리에 가려는 이유가 “누구보다도 빠르게,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누구보다도 절망적으로/마침내. 드디어 죽”기 위해서일지라도 시인의 길은 이에 대한 ‘꿈꾸기’를 멈춰서는 안 됨을 차분하게 역설하고 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조건으로 선취되었음을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른 경우의 험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니, 불가항력으로 우리의 존재를 조건지우는 ‘마비痲痹’,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술적 낙관의 마비 상황을 곤란의 한 가운데로 끌어올 수 있다.
푸르스름한 안개를 두른 거리를 낯선 사람들이 표정 없이 돌아다
녀, 그들 가슴에는 파란 나선이 길게 자라고 있고 그들은 목소리를
잃은지 오래야. 어제도 오늘도 그들은 길게 자라는 파란 나선을 확
인하고는 안심해. 내 몸의 구멍은 아직 아물지 않고 환청 속에 친구
의 목소리가 갇혀 있어. 내색할 수 없는 진통이 가슴을 조여 와. 그
때마다 점점 마음벽에서 투명하고 가느다란 나선이 자라고 그 나선
끝으로 깜박깜박 파란 불이 들어와. 다른 누군가가 나의 정보를 읽
고는 정보창에 물음표를 띄워. 투명한 회색빛 얼굴들이 알 수 없는
정보들을 빠르게 폐기하고 있어. 이야기가 삭제된 그들의 눈동자들
이 의미 없이 깜박이자 문뜩 몸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어. 그들
은 가느다란 나선으로 나의 정보를 분석하고 있어. 금세 내 안에 새
회로들이 교체되고 있어.
― 권섬, 「고립, 혹은 자유·4-영혼이 새어나가다」 부분
삶과 죽음을 운명의 가시적인 양 봉우리로 두고 협로를 따라 걸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한결 고통의 강도가 완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현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는 이런 자연적 경계를 거부한다. 아니 그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 삶에 대한 감각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마비시키면서 ‘현재’의 잉여적 자기 확인에 생의 에너지 전부를 소모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권섬 시인은 이를 ‘몸’에 생기는 ‘구멍’으로, ‘영혼’이 빠져나가는 ‘틈’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영혼이 빠져나간 가족들이 책을 읽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영혼이 없는 얼굴로 하늘을 향해 향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행위와 그 행위를 구속하는 체계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문제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시인은 이 지점에서 ‘고립 혹은 자유’를 생각한다. 인용부분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낯선 사람과 아무 이유 없이 동일시되는 현상 속에서 어쩌면 시는 시인이 취할 수 있는, ‘고립을 통한 자유’, 또는 ‘자유를 위한 고립’의 한 전략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험로이며 각기 다른 ‘회로’를 내장한 시인들과의 격렬한 투쟁의 길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숨겨진 요인, 또는 배후로서 자연의 작용은 인간적 현실의 표면 아래로 깊이 내려앉은 지 오래다. 사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다 알고 있지만, 오늘 나를 괴롭히고 심지어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은 주차시비거나 층간 소음과 같은 일상의 곤란들일 뿐이다.
단잠 자는 영혼을 깨운 것은
피아노 치듯 하는 장맛비도 아니고
잠꼬대하다 가위눌려 일어난 것도 아니다
사기꾼 세상에 무슨 사기 당해 억울해서 저러나
한 다발 선물해준 애인이 이별하자고 했나
메르스가 목덜미와 겨드랑이까지 올라왔나
가뭄에 내리는 장맛비가 좋아서 그럴까
귀신들의 중얼거림처럼 들리는 곡哭
거북이처럼 종족 퍼뜨리고 싶어서
암컷이 수, 수컷이 암을 찾는 메타포인가
행복빌라와 끔의 빌라를 흔드는 저 우렁한 소리
두 손 모아 기도하듯 사랑초, 토끼풀이 잠든 밤
불면증 환자를 만드는 두꺼비, 황소개구리인가
그것을 듣고 뒤척이는 달팽이관인가
― 김다솜, 「곡哭」 전문
시인은 어느 날의 ‘불면’의 원인을 찾는다. ‘단잠 자는 영혼’이라는 표현은 낯설게 시인이 어쩌면 여러 분리의 극심한 고통 속에 가로놓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어쨌든 시인은 ‘타자’로부터 오는 불면의 요소를 혼자 상상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것을 듣고 뒤척이는 달팽이관인가”라고 자신의 엷은 귀를 탓하고 만다.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거나 동참하는 데 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시인은 자연이 우리에게 역경의 운명을 주었고, 또한 시대와 문명이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여러 기제를 장치했다면,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을 시적으로 알고 있다. 긍정하고 내면화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사실에 대한 이해는 시인이라는 험한 길을 쉼없이 걸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자질 중 하나이다.
2.
시인의 길이 협로인 이유를 단편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는데, 너무 무거운 어조로 글이 교란되고 말았다. 어쨌든 시인의 시적 인식이 날카로워지면 날카로워질수록 그의 길이 어렵고 힘들게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굳이 이를 가져다 붙인다면 융기로 인한 협로를 걸을 때 발생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침식에 의해 시인의 길이 외롭거나 위태롭게 보이는 경우는 시인이 무소불위의 존재가 아니라 언어의 정의와 기능에 구속되는, 즉 말의 ‘쓰임’에 결박된 존재라는 데서 그 일차적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갈 곳이 없습니다. 당신은 마지막 사람 속에 의자를 놓고 구원처럼 간절히 앉기를 청합니다. 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다는 사실은 의자에 먼저 앉아버린 말 때문입니다 당신은 말의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합니다. 뾰족한 말의 심장을 어루만지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이 말에 닿을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시간의 옹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의자는 옹이 안에서 다리를 지웁니다. 갈 곳이 없는, 옆 사람의 흐느낌이 들립니다. 커다란 구멍이 보입니다. 구멍에서 목소리가 흘러 넘칩니다. 의자의 못 자국으로 아픈 말을 덮습니다. 당신은 투명한 통각痛覺의 힘으로 옆 사람의 구멍을 막아주었습니다. 열두 개의 다리가 쉴 수 있는 별자리는 오갈 곳이 없었던 당신이었습니다. 하늘을 못 박고 있는 별처럼
― 정지우, 「반흔瘢痕」 전문
경험적 사실이 배제된, 아니 사상된 이 작품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작품을 형성하는 언어, 자체의 상징과 구조적인 결합에서 발생하는, 아니 찰나적으로 번뜩이는 의미의 기운일 뿐이다. 해롤드 블품은 ‘시적 영향’에 대한 연구에서 강한 선배 시인을 가진 약한 후배 시인의 성장 단계를 밝힌 바 있다.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둘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다는 사실은 의자에 먼저 앉아버린 말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을 이를 충분히 연상시킨다. 방향이 좀 빗나가겠지만, “당신은 투명한 통각의 힘으로 옆 사람의 구멍을 막아주었습니다”라는 부분은 언뜻 앞의 서술과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인의 길이란 아니 모든 길이란 길 아닌 곳에서 길을 만드는 것이라면, 기존의 길이란 얼마나 안전한 안내자가 되는가? 난 이 길로 갔다. 넌 네 길을 찾아. 그렇다면 분명 그가 간 길 아닌 어딘가에 길이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지기 때문이다. 추수하지 않고, 훼절하지 않는 한 방법일 수도 있다.
시인의 길은 쉬워 보이고, 또 그처럼 쉽기도 하고 시인인 척이 아니라 시인으로 살고자 하면 한 없이 어렵고, 괴롭고, 보장도 없는 길일 지도 모른다.
그냥 편하게 살게 할 걸
괜히 시를 쓰게 했다며
세상을 앓게 했다며
여든이 다 되신 은사님은
술김에 울먹이셨다.
아니 선생님 덕분에 행복합니다라고 했지만
나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씀드리지도 못했다.
― 백우선, 「괜히」 부분
시인들은 ‘괜히’, 좁고 가파르고 험하고 쓸쓸하고 보상도 없는 헛것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그게 아쉽고 억울해서 억지로 견강부회로 자신의 길을 ‘인류 최고의 광영’(김종삼)으로 과장하는 것일까?
가을 단상 한 자락을 풀어놓으려 했는데, ‘괜히’ 울컥하고 말았다. 《아라문학》이 오늘도 좁고 험한 길을 택한 시인들에게 허름하지만 향기롭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오롯이 서로 건넬 수 있는 길가 작은 찻집이었으면 좋겠다.
**약력:《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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