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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포럼/윤석산/문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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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88회 작성일 17-01-02 19:37

본문

아라포럼

윤석산






문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일시 : 2015년 6월 27일(토) 오후 5시
장소 : 아라아트홀





1.
우리는 흔히 어떠한 존재를 인식할 때, 그 존재 자체가 지닌 본질을 보기보다는 어떠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인식함이 일반이다. 즉 합리적 주체로서 그 존재를 인식하기보다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바라보고 또 인식을 한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나’라는 존재는 타자에 따라 수없이 다른 모습이 된다. 나의 아이들이 나를 볼 때에 ‘나’는 ‘아버지’이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볼 때에 ‘나’는 ‘선생’이다. 또 길에서 만난 사람은 나를 ‘아저씨’로 볼 것이고, 슈퍼주인은 나를 ‘고객’으로 본다. 이렇듯 ‘나’는 타자라는 대상에 따라 다르다.
‘문학’도 어느 의미에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학을 한답시고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술이나 마시고, 담배나 피워대고, 골방에 들어앉아 글을 쓴다고 하면, 이 사람의 부모나 부인에게 문학은 원수 아닌 웬수일 것이다. 또 모든 행위를 현실적인 이익 창출에 그 기준을 두는 사람에게 있어, 문학은 아무 소용이 없는 감정의 유희일 뿐이다. 문학이 밥이 나오냐, 빵이 나오냐, 집이 나오냐, 아무러한 이익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반면에 감수성이 풍부하고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있어 문학은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현실적인 명예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에게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주는 ‘장식’에 불과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시인, 소설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이 문학을 자신을 드러내는 장신구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많다.
부정적인 면, 긍정적인 면 모두가 종합되고 분석될 때 그 본질이 드러나듯이, 이렇듯 다양한 모습의 ‘나’, 아버지, 선생, 아저씨, 고객 등 다양한 모습의 ‘내’가 종합될 때에 내가 지닌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여러 긍정적, 부정적인 것이 종합되고 다시 분석이 될 때 그 ‘본질적인 무엇’이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2.
인류의 문명, 그 이전부터 문학은 오늘까지 인류의 사랑을 받으며 존속되어 왔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존속되어 온 모든 것이 긍정적인 것들만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오늘까지 존속되어 왔고, 그러므로 그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무엇이 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문학이 지닌, 그 ‘무엇’은 무엇일까. 몇 편의 문학 작품을 실례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어린 시절 읽은 소설을 한편 예로 들고자 한다. 이 소설은 나의 어린 시절 꿈과 용기를 주었던 작품이다. 영국의 시인인 알프레드 데니슨(1809-1892)이 쓴 장편 서사시의 형식을 띤 이녹 아텐Enoch Arden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바닷가 어촌이다. 주인공 이녹은 어부의 아들이고, 이녹의 어린 시절 친구인 필립은 방앗간 집 아들이다. 또 같은 또래의 귀엽고 예쁜 애니라는 소녀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흔히 어린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이들 세 소년 소녀는 소꿉놀이를 하며 논다. 한 아이는 아버지가 되고, 한 아이는 엄마가 되고, 나머지 한 아이는 아들이 되는 소꿉놀이이다. 여자 아이가 하나이기 때문에 애니는 하루는 이녹의 아내가 되고, 다음 날에는 필립의 아내가 되어 놀이를 한다. 그러나 힘이 센 이녹이 연거푸 애니의 남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녹과 필립은 애니를 놓고 서로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씨 착은 애니는 “나는 너희 둘의 똑같은 아내이니, 제발 싸우지 말라.”고 하며 말리곤 했다.
이들이 성장하여 이녹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부가 되었고, 필립은 집안의 방앗간을 도와주며 살게 되었다. 성장한 이녹은 애니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래서 둘은 세 아이의 부모가 된다.
어느 날 이녹은 중국 상선을 타고 더 먼 바다로 나갈 결심을 한다. 세 아이들을 자신과 같이 가난하게 살아가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러한 결심을 하게 한 것이다. 아내인 애니가 반대를 했지만, 이녹은 애니를 설득하여 가진 것 모두를 털어 애니에게 식료품 가게를 내주고는 중국 상선을 타고 먼 바다로 떠난다. 떠나는 날 갓 태어난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을 품에 간직하고 떠났다.
먼 바다로 떠난 이녹은 항해 중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남태평양에서 풍랑을 만나 무인도에 가 표류하게 되다. 이녹은 무인도에서 여러 해를 산다. 나이가 들어 머리칼도 은빛으로 바뀌고, 언어마저 잊는 고통을 겪는다.
그 간 마을에는 이녹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하고, 애니는 그러나 남편을 기다리며 일에 전념을 한다. 여성이 혼자 아이 셋을 키우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필립이 와서는 도와주곤 했다. 이렇듯 세월이 지나다가, 이제 이녹이 죽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애니는 필립과 결혼을 한다.
무인도에 표류하여 살던 이녹은 지나가던 배에 구조가 되어 15년 만에 자신의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나이도 이제는 들었고, 무인도에서 고생을 해서, 마을의 누구도 그가 그 옛날 잘 생기고 씩씩한 이녹인 줄을 알아보지 못한다. 고향마을로 돌아온 이녹은 마을 입구에 있는 허름한 선술집에 묵는다. 선술집 주인에게 이녹은 아내 애니와 자신에 대하여 묻는다. 주인의 말이 이녹은 배를 타고나갔다가 죽었고, 그 아내 애니는 친구인 필립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필립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번민의 시간을 보내던 이녹은 그 날 저녁 친구 필립의 방앗간을 찾아간다. 불빛이 환하게 새어나오는 필립의 창 안 방, 따뜻한 난로가 타고 있는 옆, 조금은 뚱뚱해진 필립은 사랑하는 아내 애니와 함께 어린아이를 어르고 있고, 젊은 시절의 애니를 그대로 빼닮은 큰딸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는 화목하고 따뜻한 한 가정이 그 방에는 있는 것이 아닌가. 이녹에게는 이러한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또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이녹은 차마 그 집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는, 다시 자신이 묵고 있는 선술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이녹은 선술집 주인에게 “아직도 애니는 전남편인 이녹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을까?” 라고 묻는다. 선술집 주인이 “사실 애니는 그것을 두려워한다.”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누군가 그녀에게 이녹의 죽음을 알려준다면 오히려 위안이 될 지도 모른다.”라고 답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이녹은 선술집 주인에게 자신이 바로 이녹임을 밝히고, 이녹이 죽은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고 전해 달라고 당부를 한다. 일종의 유언을 한 것이다. 다음 날 선술집에는 어느 낮선 사내의 시체가 한 구 발견이 된다.
선술집 주인으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이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야 한다. 필립의 문을 두드리고 집으로 들어가 사랑하는, 그 토록 보고 싶었던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나타나면 그 행복한 가정이 이내 깨질 것을 잘 아는 이녹. 그래서 이녹은 차마 그 문을 두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당연히 이녹은 문을 두드려야 했고,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만났어야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필립과 결투를 했어야 했다. 이것이 곧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이 오랫동안 희구해 왔던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녹은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의 가족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 하나를 포기하고, 가족의 행복을 지킨다는, 그러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녹의 생각과 선택은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그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소설은, 문학이라는 예술은 우리에게 ‘감동’이라는 ‘울림’을 준다. 이 ‘감동과 울림’을 통해 ‘우리 삶에 있어 과연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하고, 또 일깨워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때때로 얼마나 아름다우며 또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이와 같이 소설은, 문학은 설명이 아닌, ‘감동’으로 우리를 흔들어 준다. 어떤 교시적인 것으로 ‘삶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다만 교시적인 가르침은 어느 의미에서 이를 받는 사람에게 전인적인 영향을 주지를 못한다. 그러나 ‘감동’을 통한 일깨움은 그 사람에게 크나큰 영향을 줄 수가 있다.
문학은 바로 이렇듯 우리에게 감동을 주므로,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을 깨닫게 해준다. 흔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홀히 하고 또 잊어버리기 쉬운 그러한 소중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3.
「자전거 여행」이라는 수필집을 쓴 김훈 소설가의 사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그 속에 담긴 사유는 매우 아름답다. 흔히 많은 평론가들이 김훈의 문장이 아름답다. 라고 말한다. 왜 아름다운 것인가. 이는 그 문장의 안에 다양한 시각과 사유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즉 김훈이라는 작가는 다양한 시각과 사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동시에 언어를 매우 잘 다루는 사람이다.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언어는 그 언어마다 지시적 기능만이 아니라, 다양한 그 언어 고유의 정서를 담고 있다. 이러한 언어가 지닌 특성을 매우 잘 인지하고 또 다루어 적절한 문장을 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훈의 문장이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김훈은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소설을 써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김훈이 쓴 소설 「남한산성」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 때의 이야기이다. 병자호란은 청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정묘호란(1627년) 이후 10년 뒤에 다시 청으로부터 침략을 받고 치욕적인 항복을 한 전쟁이다.
인조 임금은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강화도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은 다리를 건너지만, 그때는 다리도 없고 건너기가 만만하지를 않았다고 한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로는 염하鹽河라는 물이 흐른다. 간만의 차이가 높아 물살이 매우 빠르다고 한다. 또한 비록 육지와 강화도의 사이가 좁기는 해도, 강화도 쪽에는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없을 정도로 아주 험한 바위로 되어 있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고의 침략 때에도 고려 왕궁이 강화도롤 피난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청나라가 다시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기를 놓쳐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왕자들이라든가 대신들 일부는 강화도로 피난을 했다. 이중환이라는 조선조 실학자가 쓴 『택리지』에 의하면,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강화도 맞은편 통진의 문수산에 올라가 강화도를 내려다보니, 손바닥만한 섬이었다고 한다. 문수산에서 강화도를 정찰하고는 이내 민가 한 채를 뜯어서 배를 만들어 타고는 강화도로 들어가 일시에 섬을 점령해버렸다.”고 한다. 청나라는 10년 전 정묘호란 때와는 달라졌다. 이미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해전의 경력을 쌓았고, 강화된 수군의 경력으로 일시에 강화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강화도가 점령을 당하자, 강화도에 있던 많은 대신들이 자결을 한다. 특히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감상헌의 형인 김상용은 성루에 화약을 놓고 자폭하여 장렬한 자결을 했다. 이어 용골대는 주력부대를 돌려 남한산성을 에워싸고는 전투를 벌였다. 남한산성에의 전투는 우리나라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때는 겨울이었고, 성에는 먹을 식량도 넉넉하지가 않았다.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것은 어떠한 계획 속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강화도로 피난 가다가 시기가 늦어 발길을 돌려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식량 등 그 준비가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대신들 중에는 청나라에 항복을 하고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가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흔히 주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최명길은 역적이고,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은 충신으로 이야기된다. 또는 주화파는 외교력을 지닌 사람이고, 척화파는 완고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이분화시킨 시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소설 「남한산성」은 국가의 존망이라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 서 있던 역사적 인물 최명길과 김상헌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절대의 위기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떠한 모습을 했는가. 이들이 보여준 고뇌를 통해 삶의 깊이를 우리는 읽을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삶의 진지함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메시지를 이 소설에서 받는다. 소설 「남한산성」은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인가를,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을 통해, 즉 사건과 인물이 지닌 성격 등의 전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유를 보다 깊게 해주고 있으며, 그러므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할 수 있는 계기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문학은 보다 질 높은 삶을 구가할 수 있는 ‘무엇’ 아닐 수 없다. 즉 문학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무엇이 된다고 하겠다. 이렇듯 문학은 흔히 현실적인 욕망과 세속에 의하여 척박해지기 쉬운 우리의 삶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다.


4.
앞에서 언급한 문학이 지닌 이러한 한 예로 윤동주의 유명한 시작품인 「서시」를 들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는 삶의 현실적인 욕망, 그 욕망만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특히 산업사회에 있어서 욕망은 부富와 귀貴로 표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의 상징인 ‘돈’을 위하여 부끄러운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다보면, 이 부끄러움에 대하여 무감각해 진다. 옛날 우리 어렸을 때 징검다리라는 것이 있었다. 처음 그 다리를 건널 때 발을 적시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며 돌과 돌을 디디며 건넌다. 그러다가 실수라도 하여 발이 물에 빠지면, 빠진 김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온 발을 물에 적시며 텀벙거리며 건너게 됨이 일반이다. 우리의 의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차츰 없어지고, 심지어는 그 부끄러움에 정당성까지 부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윤동주의 「서시」는 이런 면에서 그 가치를 지닌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시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하므로 일깨워주고 있다. 이렇듯 문학은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삶의 질을 높여준다.
윤동주의 「서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맹자의 ‘군자지삼락君子之三樂’이다. 맹자는 일찍이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父母俱存 兄弟無故’을 첫 번째 낙으로 이야기했다. 또 ‘우러러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내려다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을 두 번째의 기쁨으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敎育之’을 세 번째 낙으로 삼았다. 이 중 두 번째인 ‘우러러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내려다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이라는 이 부분이 윤동주가 보여준 시의 세계와 아주 같다. 그러나 맹자의 이 교훈적인 말씀은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의 자세가 요구되고 또 필요하다. 이에 비하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는 순수한 염원을 시의 화자는 마음으로 빌며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토로하듯이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섬세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잔잔한 파도를 던져준다. 다시 말해 감동의 물결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교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맹자의 군자삼락의 가르침과는 다른 차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와 같음이 문학은 우리에게 주는 크나큰 ‘무엇’이다. 이러함이 곧 문학이 ‘우리에게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이끄는 ‘가치관’은 다양하다. 특히 현대사회가 지닌 다양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양한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는 사회 속을 살아가고 있다. 다음은 장정일이라는 시인의 시이다.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외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이 장정일의 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패러디한 것이다. 김춘수의 「꽃」을 보기로 하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한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시는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고,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고 노래한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고 노래한다. 이에 비하여 장정일은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고, 우리는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고 노래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라고 노래한다. 오늘이라는 현대를 잘 떠올릴 수 있는, 매우 풍자적인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상 이렇듯 노래하고 있는 장정일의 시의 속내에는 모든 것이 자동화, 기계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의 감정마저도 기계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담겨져 있다. 마치 찰리 채프린이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현대에의 풍자코미디와도 같이,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며 하루 종일 공장에서 몽키스파나를 들고 나사를 조이는 일을 반복하다가, 집에 돌아와서도 모든 것이 나사로 보여, 몽키스파나로 조이는 행동을 기계적으로 보이는 풍자적인 장면을 떠올린다. 즉 장정일의 시는 이와 같이 현대사회의 모습을 매우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역의 방향에서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그러는 한편, 라디오와 같은 끄면 이내 꺼지고, 켜면 이내 켜지는 사랑 또한 어떤 면에서 희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이 이 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이 되기도 한다. 장정일의 시를 읽으며, 이와 같은 새로운 사랑의 모습에, 우리는 “아하 그렇구나.”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랑법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그 경이감을 나타낼 수도 있다.


5.
   시나 소설이라는 문학은 이와 같이 간접경험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박민규라는 젊은 작가가 쓴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펜클럽」이라는 소설은 이런 면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경쟁사회와 자본주의에 대한 유쾌한 풍자를 보여주고 있다. 1983년을 제외하고는 만년 꼴찌에 머물고 있는 삼미 슈퍼 스타즈라는 야구단의 이야기이다. 자본주의가 팽배된 오늘이라는 사회는 경쟁을 통해 이기는 자만이 추대되는 사회이다. 경쟁 속에서 이긴 자만이 추대를 받고 찬양을 받는 것은 오늘이라는 현대를 풍미하는 중요한 가치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 기존의 가치관을 비판하고 전복시킨다. 풍자를 통하여. 그러므로 경쟁 사회가 지닌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고, 이 이기고자 하는 속물적인 근성이 마냥 팽배가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기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이기고자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영일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소설은 이와 같은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유쾌하게 비판하므로 새로운 가치관을 일깨워준다.
프로 야구, 이 ‘프로’라는 말은 말 그대로 전문가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프로 야구의 타자는 칠 수 없는 볼을 쳐야만 하고, 또 투수는 타자가 칠 수 없는 볼을 던져야 한다. 이가 바로 프로이다. 그러니 칠 수 없이 날라 오는 볼을 쳐야 이기고, 선수가 칠 수 없는 볼을 던져야 만이 이길 수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칠 수 없는 볼을 치고, 칠 수 없는 볼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늘 이기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야 하고, 이 경쟁 사회 속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하여 아등바등 살아가야만 한다. 어찌 보면 가여운 인간상이 아닐 수 없다.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펜클럽은 칠 수 있는 볼도 안치고, 칠 수 없는 볼도 던지지 않는 것을 팀의 신조로 삼는다. 삼미 슈퍼 스타즈가 만년 꼴찌가 된 것은 바로 이 경쟁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인생이라는 큰 판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로는 의미 있는 경쟁을 하기도 하면서 그 판을 즐기면 된다. 이 소설은 이러함을 통해 오늘이라는 현대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삶의 한 면을 매우 재미있게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현대라는 이 각박한 삶 속에서 어떠한 것이 진정한 가치이며, 가치 있는 삶인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문학은 이렇듯 자못 욕망, 경쟁 등으로 비루해지기 쉬운 우리의 삶을, 욕망만을 위하여 달리는 단조롭고 또 획일적인 우리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그러므로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가치관에 눈 뜨게 해준다. 나아가 우리에게 다양한 지평을 열어주고, 그 다양하게 열린 지평으로 우리의 삶을 스스로 걸어가게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를 활짝 열어주고, 우리 삶의 질을 한 단계 높여준다. 이렇듯 문학은 우리 삶에서 참으로 가치가 있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을 진정으로 향유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의 길을 가는, 그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력: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74년 <경향신문>에 시 당선.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바다 속의 램프』, 『온달의 꿈』, 『처용의 노래』, 『용달 가는 길』, 『밥 나이, 잠 나이』 등.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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