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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근작조명/김영덕/녹음방초 낙목한천이요, 공산야월에 만목소연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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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17회 작성일 17-01-03 17:57

본문

근작조명

김영덕




녹음방초 낙목한천이요, 공산야월에 만목소연이라

ㅡ서춘자 시세계 



1.
너의 토굴
천삼백도 불가마
한 세월 들어앉아 좌선삼매
다비 끝나니
한 알 사리
한 점 티끌 없는
빈 몸
그 몸에 삼천대천
드나드나니
지나던 달 품어


                                           ― 「백자무문달항아리·3」 전문


   서춘자 시인은 「백자무문달항아리·3」에서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자신의 불교적 우주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흙으로 빚은 토기를 굽는 과정을 입적한 선승의 다비식에 비유를 한다. 항아리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 시의 매력은 거기서 맨숭맨숭 끝나지 않고 또 다시 그 다비의 과정을 마치 그 고승이 천 삼백 도 불가마 찜질방에 들어 앉아 좌선삼매경에 빠졌던 것으로 대담하게 묘사를 했다는 점이다.
   도자기를 굽는데 요즘은 프로그램에 따라 온도가 자동 컨트롤되는 전기나 가스 가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대부분 구들 고래 형태의 불가마가 사용되었다. 시인은 그것을 토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고승이 다비를 끝내고 ‘한 알 사리/한 점 티끌 없는/빈몸’이 됨으로써 즉, 자신을 온전히 비움으로써 ‘그 몸에 삼천대천’ 말하자면 소천, 중천, 대천의 천세계와 광대무변의 온 우주가 드나들도록 허용하다가 마침 ‘지나던 달을 품’은 모양새를 ‘백자무문달항아리’라고 그윽하게 명명했다. 아름답다.


2.

나 없는 빈 창에


그대 쓰고 간 내 이름
몇 점 성에들이 안고 있었네


창문 앞에서 되돌아간
그대 발자국
눈 위에 압화로 찍혀 있었네


그 압화 위에 새로 내리는
깃털눈
오래 서서 바라보네


                                      ― 「겨울날」 전문


   시인은 ‘겨울날’에서 인연이라는 오래된 화두를 다시 꺼내들었다. 첫 번째 연에서 시인은 ‘나 없는 빈 창에/그대 쓰고 간 내 이름/몇 점 성에들이 안고 있었네’라고 노래함으로써 ‘그대’와의 근접probable한 인연을 암시한다. 여기서 ‘창’은 소통일 수도 있고 인연의 구체적 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2연에서 마침 내가 부재함으로써 인연의 창이, 기회의 창이 열려 있지 않았을 때 찾아와 ‘눈 위에 압화로 찍혀 있’는 ‘되돌아간/그대 발자국’을 통해 엇갈린 운명임을 드러내다가 세 번째 연에서 ‘그 압화 위에 새로 내리는/깃털눈/오래 서서 바라보네’라고 노래하며 맺어지지 않은 인연의 아쉬움과 그 흔적까지 지우는 세월의 덧없음을 찬찬히 음미하고 있다.


3.
   ‘봄날은 간다’라는 옛 대중가요가 있다. 손로원이 노랫말을 짓고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로 1953년에 발표된 노래다. 노랫말은 작사가 손로원이 부산피난 시절 용두산 판잣집에 불이 나면서 벽에 걸어두었던 ‘연분홍 치마에 흰 저고리’입은 어머니 사진이 소실되어 황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써내려갔다는 ‘시’이다. 6. 25 한국전쟁이라는 국가적 변란을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별의 아픔과 여인의 ‘한’ 정서를 어루만져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대중가요는 1절에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로 시작되어, 2절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로 이어지고 3절은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로 끝난다. 감정에 호소emotional하는 매우 서정적인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2003년 이 땅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중가요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춘자는 이 대중가요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지었는데, 매우 독특하고 참신하다. 시인은 제1절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와 2절의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그리고 3절의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를 인용하여 한 편의 새로운 시를 완성했다. 한 곡의 흘러간 대중가요에 관심을 가져 몰입하고 이를 심화, 확장하여 흐드러진 봄날 정서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었다. 


공중에서 내려오는 비단을
둘로 가른다는 검
그 검에 베입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비단수건을 가를 뿐만 아니라
돌덩이에도 부러지지 않는다는 검
그 낭창한 날에 스치입니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저 흔해 빠진 밤하늘의 별에도 눈 베입니다
같이 보고 같이 세던 실없던 손가락 끝


길도 없이 까마득한 허공 너머로

열아홉 시절이 울컥 해금 가락 타고 와
명치를 찌르면


난자당한 가슴 급소마다 치명상인데

진통제는 그래도 봄꽃뿐
꽃마다 찾아가 베인 자리 문질러


꽃피 지혈할 뿐

치료제는 그래도 봄볕뿐
볕마다 찾아가 베인 자리 쪼이며
지나가는 봄날 지나가게 할 뿐


                                                            ― 「대중가요」 전문


   슬프거나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적인 욕구를 넘어서서 얻는 큰 기쁨과 즐거움인 열락悅樂에서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봄의 견딜 수 없는 열락에 시인의 감수성은 베인다. 슬픔과 기쁨은 이제 한 통속이다.
   시인은 봄날의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공중에서 내려오는 비단을 둘로 가른다는’ ‘그 검에 베’인다. 그리고 문득 눈을 떠보니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고 했다. ‘그 낭창한 날에 스치어’ ‘새파란 풀잎’도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고 했다. ‘열아홈 시절에 울컥 해금 가락 타고 와/명치를 찌르면/난자당한 가슴 급소마다 치명상인데’ ‘진통제는 그래도 봄꽃뿐’이고  ‘치료제는 그래도 봄볕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봄이 지천이다. 천지사방에 봄이 가득하다.
 
4.

하늘이 왜 파란가 물어도 대답 없소
해는 왜 그렇게 타는가 물어도 대답 안 하오


삶은 이유 없이 시작되어 이유 모르게 흘러가는 터
다만 탈 뿐이오


재가 되면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터
재가 되어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터


세상의 모든 불꽃들에게 경의를
세상의 모든 불쏘시개들에게 경의를


작은북 큰북 동원하여 재를 올린다
기타 시켜 염불 올린다 
그립다는 말 태워 분향한다


잘 타고 남은 재
그 가벼움
세상의 모든 재들에게 경의를


                                                                ― 「탈의」 전문


   죽은 이의 시신을 태워 그 유골을 거두는 불교의 장례 의식인 다비식을 그린 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지만, 화장을 하면 남는 것은 ‘잘 타고 남은 재’밖에 없다. 세상사 온갖 욕심도 체면도 가식도 집착도 억울함과 분노도 아쉬움도 슬픔도 기쁨도 희망과 절망도, 회한도 꿈도 사랑도 ‘그립다는 말’도 ‘재가 되면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터/재가 되어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불꽃들에게 경의를/세상의 불꽃들에게 경의를’보낸다고 했다. ‘삶은 이유 없이 시작되어 이유 모르게 흘러가는 터/다만 탈 뿐’이기 때문이리라.
   첫 번 째 연을 ‘하늘이 왜 파란가 물어도 대답 없소/해는 왜 그렇게 타는가 물어도 대답 안 하오’라고 시작했는데, 인간의 알량한 지식이라는 것이, 이성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건 매한가지. 알려고 하는 것 역시 부질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살라버리고 재로 만드는 불꽃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탈의」라고 한 이유다.

 

5.

그것도 괜찮겠다
봄볕 몇 섬 쏟아져 내리고 새소리는 웃기로 얹힐 것이다
앞 논두렁 고부라질 때쯤 삼복이 오겠지만
다북쑥 아래 서늘한 땅기운이나 즐기면 될 일이다
누가 묻혔거나 말거나 가을이 오고
갈잎 구른다고 덩달아 뗏장도 무너지겠지만
백설이 소복이 기워주는 날도 있을 것이다


백설에 싸여 봉긋한 나
쏟아지는 달빛 봉긋이 불러 앉혀
지나가는 북풍 시켜 퉁소 한 가락 불게 하면
공산야월 만목소연 왕릉 못지않을 것이다

그러저러 겨울 지난 또 봄이 오겠지만
녹음방초 낙목한천 제 아무리 왔다 가도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구를 미워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누구의 애비였는지 누구의 에미였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어느 가객이 노래를 불러줄지도 모른다
뒷산의 이름 없는 무덤
그것도 괜찮겠다


                                     ― 「계획」 전문


   무계획이 계획이란다. ‘뒷산의 이름 없는 무덤’으로 남겠다는 것이 화자speaker 의 계획 아닌 계획이니 말이다. 필부의 무덤이 아닌 왕후장상의 무덤이라고 도대체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언감생심, 죽은 자들의 유택이 산 자들을 위한 주택이 될 수는 없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영웅호걸이 몇 몇이며/절세가인이 그 누구냐’고 장탄식을 하는 우리의 서사무가敍事巫歌이자 민요인 ‘성주풀이’도 있지 않은가? 비석에 시호諡號를 밝히고 생전의 치적을 자랑하듯 무수히 적어 놓은들 한 번 간 인생 달라질 게 무엇인가? 부질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시의 화자는 계획을 세운다.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자연의 섭리, 우주의 섭리에 맡긴다는 계획을, 무계획이라는 계획을 말이다.
어릴 적 내 고향 마을 뒷산 자락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곳을 ‘곡장지’라고 불렀는데, 마치 고원highlands처럼 평평했다. 풀은 무성했지만, 나무 한 그루 없었다. 그곳에서 가끔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회의가 소집되었고,  6.25 전쟁 중에는 ‘인민재판’도 열렸다고 한다. 그 가운데 쯤 소담스러운 무덤 몇 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가족묘였을 것이다. 동네 아이들은 사철 그 무덤가에서 놀았다. ‘봄볕 몇 섬 쏟아져 내리’면 봉분에서 미끄럼을 타고 씨름을 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공도 차고 ‘자치기’도 했다. ‘앞 논두렁 고부라질 때쯤 삼복이 오’면 아이들은 달작지근한 풀뿌리 씹으며 사성莎城에서 뒹굴었다. ‘갈잎 구른다고 덩달아 뗏장도 무너지’는 가을이 와도 아이들은 봉분에 기대어 말타기 놀이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백설이 난분분한 ‘낙목한천’에는 그곳이 연날리기의 명소가 되었다.
그 ‘뒷산의 이름 없는 무덤’ 주인공들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죽어서도 심심하거나 외로울 틈이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살아생전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구를 미워했는지’, ‘누구의 애비였는지 누구의 에미였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6.
한 섬지기 메밀밭에 석 섬 달빛 쏟아진다
꽃범벅 가슴이 달빛범벅으로 달려간다


풀벌레 울어 초가지붕은 너울대고
달이 잠긴 그대 두 눈 밤새 들여다본다


먼 산 다가와 석 섬 달빛 거두어가도
달 잠긴 여울에 함께 잠겨 밤은 흐르고


장날마다 허공에 등 기대어
그대 어깨에 달빛 수북하구나


                                                                               ―「봉평 기행」 전문


   봉평 기행에 나선 화자speaker가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장면을 4행의 짧은 시로 새롭게 구현해냈다. 교교한 달밤, 중늙은이 장돌뱅이인 허생원이 동이와 함께 드나들던 충주집과 가산공원, 장터를 둘러본 화자는 흥정천 섶다리를 지나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메밀밭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에 접하며 ‘한 섬지기 메밀밭에 석 섬 달빛 쏟아진다’고 첫 행을 시작했다.
   두 번째 연에서는 허생원이 메밀꽃 핀 개울가 물레방앗간에 당도하여 울고 있던 성서방네 처녀를 만나 하룻밤 인연을 맺는 장면을 그린다. 시인은 이 대목을 ‘풀벌레 울어 초가지붕은 너울대고/달이 잠긴 그대 두 눈 밤새 들여다본다’고 표현했다. 그 달콤한 첫사랑의 기억 때문에 허생원은 20년째 매년 봉평장에 들르는 것이다.   
세 번째 연, 걷는 도중 냇가를 만나게 되는데 일행인 조선달과 나귀는 먼저 무사히 건너가지만 늙은 허생원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다. 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구해준다. 이 대목을 시인은 ‘달 잠긴 여울에 함께 잠겨 밤은 흐르고’라며 지극히 몽환적으로 묘사했다. 이 때 허생원은 동이가 자기의 아들임을 확신한다. 허생원은 아비 없는 동이를 낳고 진천에서 쫓겨나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헤어져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동이와 같이 가기로 하고 새벽길을 걸어간다.
   네 번째 연, 동이와 함께 밤길을 걷는 허생원의 가슴 설레고 흐뭇한 심경을 시인은 ‘장날마다 허공에 등 기대어/그대 어깨에 달빛 수북하구나’라고 표현했다. 한 편의 소설 속 아름다운 장면들에 감정을 이입하여 단아한 시로 전환해내는 서춘자 시인의 능력이 돋보인다.
 
7.

어느 님이 오시기에
백 개 등을 달아 거리거리 밝히느냐


벙글어 터지는 회포 시나브로 풀 일이다
오던 님 눈부시어 오다 말까 저어하다


                                                                     ―「백목련」 전문  


   목련은 봄의 전령이다. 춥고 삭막했던 긴 겨울을 지나 이른 봄 가장 먼저 피어나 임박한 봄을 알리는 꽃이 목련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환호한다. 마침내 봄이 왔다고.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지나친 감정의 표현을 삼가고 경계했던 우리의 전통적 여인상을 잘 그려냈다. ‘벙글어 터지는 회포 시나브로 풀 일이’라면서 ‘오던 님 눈부시어 오다 말까 저어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님’은 봄이다.







**약력:《리토피아》로 등단. 아라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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