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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신작특선/양진기/내방, 내 방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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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76회 작성일 17-01-0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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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양진기





내방, 내 방



이번에 내리실 역은 내방역입니다, 내방
7호선 고속버스터미널 가기 직전 역
내 방이 여기 있으니 어디론가 고속으로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내리실 문은 왼쪽이라고
여기서 내리면 따뜻한 내 방이
나를 기다릴 것만 같은데
 
단칸방에서 온가족이 오글거릴 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내 방
윗목의 앉은뱅이책상을 가로지르는 커튼
열었다 닫으면 생겼다 사라지는 방
형제들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쓸쓸한 방 한 칸 갖게 되었네
 
문이 열렸다 닫히고
고요한 방 외로운 방
환승이 불가능한 직진의 시간을 타고
나는 내 방을 지나 내방역을 통과하네







이발사 김씨



   빙글거리는 삼색등을 따라 지하 계단을 내려간다. 작은 새시문을 열면 17인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왕왕거린다. 두 사람 앉을 수 있는 소파 옆 책꽂이에는 너덜거리는 만화책들이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까치와 엄지는 아직도 지하 이발관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비통해하고 강토는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발의자 서너 개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거울 위 낡은 벽시계 초침이 멈칫거리며 지체된 시공간을 돈다. 텔레비전에는 종북주의자들을 몰아내자는 종편방송이 번성한다. 귀밑머리를 다듬는 동안 시사토크 진행자와 정치평론가는 무상보육과 무상급식의 부조리함을 무한 재생한다. 공짜를 바라면 나라가 망한다고 애국심에 가득 찬 이발사 김씨는 눈 감은 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지하 이발소 구석에는 일 나간 딸이 맡긴 손녀가 혼자 놀고 있다. 가끔씩 가위질을 멈추고 손녀의 투정을 들어주며 과자를 챙겨주는 자상한 할아버지 이발사 김씨는 아침에 무상으로 전철을 타고 이발소로 출근한다. 이발을 마치고 만원 한 장을 내밀자 돈통에서 꼬깃거리는 천원 세 장을 거슬러주며 선하게 웃는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김씨는 머리칼과 비듬먼지가 쌓인 탁자를 후후 불고는 신문지를 깐다. 흰 커튼 뒤 냉장고를 열고 노인복지관에서 가져다 준 김치며 반찬을 꺼내 식은 밥과 함께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천장에는 낮달 같은 형광등이 파리하게 떠서 흰 가운 걸친 김씨의 얼굴이 푸르스름하다.






足家




횟집이 망한 자리 족발집 개업했다
개업축하 화분이 도열해 손님을 맞는다
돈나무에 매달린 리본 하나
돈 세다 잠드소서, 족가
돈豚으로 돈 벌어 돈 세다 죽으라구
악담이 드높게 펄럭이는 세상, 족가
댕강 잘린 발들의 무덤
허기진 발들이 걸어 들어와
돈의 발을 주문하는 곳
돼지 정강이뼈를 핥으며
오늘 밤 돼지꿈이나 꾸어볼까
목숨과 돈을 바꾸는 세상, 족가






화해




이어폰 줄이 엉켜 있다
한 몸에서 갈라진 두 머리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드잡이 한다
달래가며 멱살 쥔 손을 떼어놓고 또 떼어 놓는다
응어리진 매듭 몇 개는 풀어지지 않는다
울컥, 갑갑증에 던져버렸다가
제 몸 하나 어쩌지 못하고 친친 감긴 것을 
다시 주워들고 귀에 가져간다
줄이 짧아져 양쪽 귀에 꽂을 수 없다
왼쪽 귀에 꽂으면 왼쪽 소리가 왕왕거리고
오른쪽 귀에 꽂으면 오른쪽 소리가 번성한다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매듭을 둥글고 넓게 편다
윽박지르거나 몰아세우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춰 굽은 등 아래를 통과한다
둥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보낸다
서로의 굽은 등을 통과하며 뒤틀렸던 척추가 펴진다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한 몸에서 나온 두 개의 줄을 타고 음악이 흐른다
왼 소리와 오른 소리가 합쳐져 완성되는 스테레오 사운드


온몸이 들썩거린다









감나무 엄마




햇볕에 탄 피부가 갈라졌다
다산의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다
아이들이 있는 한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자식들을 높은 곳에 올리려고 안간힘이다
바람이 전하는 생존의 비법을
온몸으로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있다
밤에도 아이들의 기척에 푸른 귀를 쫑긋,
선잠을 잔다
저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다 키우나
주렁주렁 매달린 무게에 허리가 휘었다
축 늘어진 젖까지 쪽쪽 빨려 주름이 깊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의 붉은 얼굴을
앙상한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감나무 엄마        








<시작메모>




   거미가 그물을 펼치고 있다. 허공에 지은 그물은 흔들거리기는 하지만 찢어지지 않는다. 날개 있는 것들이 걸려들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 온몸의 감각을 열어 미세한 진동도 놓치지 않는다. 걸려드는 순간 먹잇감의 내부를 녹여 핵심을 빨아들인다. 빨아들인 생명은 영롱한 실이 되어 허공에 걸린다.

    좋은 시를 건져 올리기를 갈망한다. 허공에서 떠도는 단어들을 붙잡기 위하여 오랫동안 잠복하고 있다. 드디어 몇 개의 낱말이 그물망에 걸려들어 파닥인다. 단어들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얼개 속에서 더 큰 파문으로 번지도록 이리저리 몰아간다. 아직은 서투른 어부라 몇 개의 단어는 놓쳐버리고 그물은 찢어지기 일쑤다. 가끔은 건져 올린 언어가 살아서 지면을 힘차게 헤엄친다. 잡은 언어가 비실대지 않고 세상 밖으로 헤엄쳐 나갈 때 언어의 어부는 희열을 느낀다.











**약력: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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