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근작읽기/정미소/지난 여름의 조각들
페이지 정보

본문
근작읽기
정미소
지난 여름의 조각들
―느티나무에게
카페 ‘몽마르트’에 앉아서 너를 바라본다
몸 하나로 수직의 하늘을 건너고 있는
우직한 어깨 너머로 오후 네 시의 햇살이 순하다
티스푼으로 홍차의 티백을 꾹꾹 누르며
봇물 터지는 너의 잎 매무새에 귀 기울인다
너의 계절에도 황소바람은 불어와
심장에 네 개의 스턴트를 박고, 벼락 맞은 봄
품에 앉았던 황조롱이도 일가를 이루어 떠나고
딱 지금이야, 죽고 싶어
합병증이 도사리는 뿔테안경 너머 동공이 출렁거리다
사라지는 오후 네 시의 몽마르트
긁히고, 멍들고, 깁스로 이은 쇳조각을 따라
일몰이 들어서다 멈칫 물러서는 카페
혼자 비 맞고 혼자 눈 맞으며 단단해지면
혼자를 즐길 수 있다고, 고백 같은
덤덤한 웃음을 바라보며 내 가슴이 아프다, 미어진다.
지난 여름의 조각들
―곰배령
점봉산 배꼽들이 수런거리는 신 새벽,
집밥이 대세라는
민박집 아주머니가 닭벼슬을 풀어
잡동사니 꿈을 밀어내네
오줌보 터트리네
숫 매미 자지러지게 목청 뽑는 오동나무 평상
초록밥상이 한 상 차려지네
고사리, 참나물, 떡취, 곤드레, 각시원추리,
집나온 이방인들이 빙 둘러 앉아 주둥이를 비비네
동침한 밤을 비비네
민박집 아주머니 후식으로
곰배령 얼레지에 넋 빠진 검은테떠들썩팔랑나비
녹화 동영상을 차려내네
꽃잎에 더듬이를 묻고 죽은 듯 정지한 화면
침이 꼴깍들 넘어가네
밥값을 셈하려니 손사래가 먼저 나오네
묵어가는 길손 잘 대접하면
집나간 아들 끼니 굶지 않을 거라고
닭의장풀 닮은 손사래가 차려낸 밥상
어머니의 기도였네.
지난 여름의 조각들
―황새바위 성지
빛의 길을 따라 들어선 성모 동산
예수의 시신을 껴안은
통곡의 성모자상
불볕더위를 온몸으로 입으셨다
어미의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흐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목숨을 부둥켜안고
걸음을 떼지 못하여
울고만 있다
누군가 성모자상을 위로하려고
십자가 묵주를 선물하였다
한 개, 두 개, 열 개, 오십 개,
위로를 세다가 주머니를 뒤져보니
손수건 한 장
성모님, 그만 눈물을 거두세요
빛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셔야지요
너무 큰 슬픔 앞에서 말문이 막혀버린
유두절의 황새바위성지.
지난 여름의 조각들
―매미가 울다
창밖에서 매미가 운다
맴맴맴 운다
세 살바기의 귀가 둥그래진다
손으로 매미의 울음을 가리킨다
내가 묻는다
매미가 어떻게 우니?
잉잉잉
아니, 매미는 맴맴맴 울잖니
아니, 매미가 잉잉잉
손등으로 우는 흉내를 낸다.
지난 여름의 조각들
―나뭇잎은 나무의 입이다
해질녘, 2층 방 창문을 두드리는 먹감나무의 두툼한 입술에 귀 기울인다 말이 하고 싶어 내 창을 기웃거리는 안색이 붉은 나뭇잎, 달싹거리는 잎을 따라 줄기와 몸통에 고인 말들의 문이 내 문을 두드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랫입술을 도르르 말았다가 펴는 입, 말매미의 울음과 고추잠자리 쉬어간 자국마다 실주름이 진다 빈 감꼭지가 풋풋한 여름으로 차오르는 소리를 듣는다 천둥과 장맛비와 긴 가뭄이 가두었던 먹감나무의 깊은 그늘이,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고 있다 나무의 입이 무거운 속내를 열고 있다.
**약력: 2011년 《문학과창작》으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광배』.
- 이전글근작읽기/박하리/아롱다롱한 무지개 17.01.02
- 다음글특집/오늘의 시인/김유석/달팽이 외 4편/신작시 /잡설/ 17.01.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