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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강시현/나는 나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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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강시현
나는 나
비를 긋고도
태양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둠에 대한 나의 매달림!
어둠의 처연한 속도速度
어둠은 튼튼한 아침에 갇혀 있다
언어를 버리면 말에서 자유다
너를 버리면 그대로부터 자유다
왜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반복해서 울먹이려 하는가
그대는 그대,
나는 나,
내 속에 그대도, 언어도, 나도, 없다
어떤 배우의 연기
납빛 여우털 같은 하늘이 내려앉던 날
파르스름히 머리 깎고
파리한 전全 생生 짊어지고
대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보지만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
뱃가죽엔 힘이 없고
무대가 질식시켜버린 달셋방의 사상思想
자본의 논리 앞에 불어터진 라면발 앞에서
나의 연기 주식株式은 연일 하종가
밧줄을 매는 실제연기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먹혔다
이상理想은 그렇게 겨우 정리되었다
판타지 없는 세월의 주름
불 꺼진 판타지의 방문을 삐걱거리는 기다림으로 열어요
길었던 하루는 세금고지서 위로 휙 지나갔어요
불치의 종양보다 깊은 후안무치한 이익의 무게가
박애의 분장을 하고 TV 뉴스 속에서 뛰쳐나와요
앙상한 내 가슴으로 허락도 없이 막 들어와요
오늘도 하얀 막대기 같은 목숨들 많이들 속이고 많이들 죽어요
부족한 사랑은 말랑말랑한 보석으로 완치돼요
그 와중에 허약한 내 시간들은 불안한 임금에 조종돼요
어떤 기준인지 동의할 수 없지만 책장에 몇 권의 위인전기가
어둠 속에서 날 보고 히죽히죽 웃어요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고,
중동中東에서만 전쟁이 나고 사람이 죽는 게 아니었어요
쪼들림과 살면서 돈을 셀 줄 몰라요
차라리 가면을 사서 써야 해요
대들어보니 만만치 않아요, 각자 신神을 불러서 면담이나 해볼까요
그럴 때마다 주름이 생겨요
짐승보다 오래 살다보면 역한 냄새가 나고 추해진대요
원하는 것들은 무엇이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려요
소중한 것들은 무엇이나 단명해요
바늘귀도 어둡고 잔글씨도 미간을 찌푸려야 하는 날이 오지요
아침에 다짐한 말을 숯검댕이처럼 잊었다가
일을 그르치고 난 다음에도 아지랑이같이 가물가물한 날이 오지요
혈육이라도 영영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영원의 신화조차 금이 간 밥주발이었단 걸 알게 되지요
옷을 정갈히 장만해 다림질하고 나서는 날이 다반사일까요
넥타이를 풀어요
가족은 따뜻하기만 하고
친구의 맹세는 믿어도 되는 걸까요
지진이 땅위에 올려놓은 사람의 집들을 흔들어 허물 듯
세월은 삶에 세워놓은 지붕을 예고 없이 날려버려요
이제 떠나요, 즐거운 여행이 아닐지라도,
햇살이 사라지고 꽃잎이 잠깐의 화려함 뒤로 숨듯
당신도 나도 세월의 무한한 병풍 속으로 숨어버려요
세상의 허방다리에 빠지고 빠져도 여기까지 애닯게 걸어왔으니
이제 팔폭 병풍 뒤 서늘한 곳에 누워 껄껄껄 세상웃음 소리나 들어보아요
음력 오월 초하루
콩이파리도 배를 뒤집는다
아침부터 동창東窓에 햇살 따갑더니
버찌는 가문 흙 바닥에 검붉은 피 쏟아내고,
일거리 없는 병약한 사내들 가르마 타고
세상의 혈관으로 흐르려
약속 없이 문밖을 나선다
7자로 꼬부라진 벽촌 노인 오일장 보고
버스 기다리는 사이
두어 대 타기도 전에 지난 세월처럼 휘잉 가버린다
잡지도 못한 버스
애원을 뿌리치는 차가운 손처럼 디젤 연기만 시커멓게 싸질러 놓고
안방 벽 액자에 이태를 소식조차 없는 아들이 걸려서
하얀 이 드러내며 웃고,
일소牛 만한 근심이 쪼그라든 어깨에 출렁인다
술 취한 마른 바람, 가슴팍에 젊은 날 서툰 애인처럼 끈적대고
생담배가 바들거리며 때 낀 안경 속으로 타들어간다
손톱
자고 나면 귀신처럼 자라난 손톱이 있었네
죽어서도 당분간 길어진다는 손톱의 유전자가
단심재판의 판결문같이 암호로 해독될 때,
속살이 도난당해 껍질만 남은 낱말이 유일한 웅변이었을 때,
어두운 신비로 감싸진 것이었네
하늘에서 빗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곳으로
슬픔의 단어들을 찾아 헤매었으나
세상의 아픔을 방어하기엔 너무 나약한 너의 무기,
해체만이 살길이다
허공의 혈관을 건져내기 위해
발톱이 거세된 직립보행의 삶은
탕진의 숲으로 걸어가고 있었네
앞발의 슬픔 위로 쏟아지던 별들
손톱으로 긁어보았네
죽어서 저 빈 곳의 별이 된다는 위로의 말들
손톱에 낀 때라고 믿었네
뼈가 죽은 음악은
아무도 건져보지 못한 어둠 위에 검은 건반으로 내리고,
육지 끝보다 더 단단한 낭떠러지를 잡고
통행금지된 기억은 손톱으로 자라 울먹였네
매니큐어에 봉인된 범죄의 흔적 뒤로 오늘도 손톱이 자랐네
**약력: 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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