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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최일화/소년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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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최일화
소년과 할아버지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 할아버지와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소년은 할아버지의 수염과 물꼬 보러 나가시는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바람에 안기는 나팔꽃처럼 할아버지,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드리면 꽃잎을 어루만지는 바람처럼 할아버지는 기뻐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깎고 다듬어 조롱을 만들고 소년은 그 조롱에 종달새 새끼와 어린 때까치를 키웠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든 방패연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솟구쳤지요. 가장 높이 나는 방패연을 동무들은 부러워했습니다. 소년에겐 아득한 날에 멀리 떠난 아버지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들렀다가 떠나가곤 했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잠깐 들러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떠나가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그네처럼 잠깐 들러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떠나갔습니다. 먼 곳에서 산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소년은 흙담집 아궁이 청솔가지 연기처럼 가난했지요. 가난하게만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아들도 들판을 쏘다니며 가난하게만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이제 세상엔 잠깐 들러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떠나가던 늙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새장에 종달새를 키우던 소년만 남았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아들, 할아버지의 손자일 뿐 잠깐 들러 물 한 모금 마시고는 구름처럼 떠나가던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엔 아버지의 옥쇄를 물려받은 또 다른 아들이 황금 왕관을 쓰고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잠깐 들렀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던 아버지의 옥좌에 앉아 이미 늙은 아버지마저 축출하고 만 까닭입니다.
굴러들어온 돌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서 따끈따끈한 신작 시집을 나누어 주었다. 금의환향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고 치열했던 산전수전과 그 패전의 기록을 선물한 것이다.
평생을 순박하게 농사짓는 친구들에게 늘그막에 시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 심심할 때 한 번 읽어보라고 기부금처럼 내놓은 것이다.
난생 처음 시집을 쥐어본 친구들은 어떻게 저 물건을 처분해야 할지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반장과 시집의 상관관계를 따져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도 같았다. 논에서 피사리를 하듯 시가 자라난 마음밭을 살피며 옛날에 괜히 반장으로 뽑아줬다고 후회하는 것도 같았다. 반장도 별 거 아니네 하고 팽개치는 것 같았다.
기껏 시인이나 되었다는 걸 나는 사과하고 싶었고 친구들은 용서한다는 듯 너그럽게 술을 권했다. 소주가 자꾸 들어가 얼굴에 철판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사과도 용서도 다 없어지고 술판만 남긴 했지만,
그날, 얼큰하게 술에 취해 돌아오면서 친구들이 나를 고향 밖으로 쫓아내지나 않을지 자꾸 내가 고향에 굴러들어온 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도 백석 시인처럼 좋은 시를 써야겠다고 다짐하며 풀섶에 오줌을 누고 있는데 그때, 환한 보름달이 빙그레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력:1991년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 『시간의 빛깔』외. 인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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