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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백인덕/시의 무늬 -한 ‘얼굴’의 두 ‘표정’을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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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1,979회 작성일 15-07-0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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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시의 무늬

- 얼굴의 두 표정을 읽는 법

 

 

아픈 일이 많았던 2014년을 돌아본다. 범주와 방향에 따라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떠오르고 다시 얽힌다. 가로지르기, 뒤섞기, 잘라 붙이기 등등은 자기 사유를, 혹은 미감을 구체적 대상물로, 즉 텍스트로 외화(外化)하는 첨단 혹은 날카로운 방법으로 어김없이 각광받았지만, 그 성과와 한계는 분명하다. 미시적으로 이 땅의 수많은 시인들이 산출한 작품들이 시대적이거나 미적이거나, 혹은 문단의 역학 관계상 그 의미를 검증받지 못해 작은 파문으로 동력을 다해야 했던 것 또한 그와 같다. 멀리 간 것과 가까이 머문 것의 차이를 필자는 느끼지도, 이해할 수도 없다. 어쩌면 시는 궁극성보다는 개인적 사태의 진리,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을 꿈꾸었기에 생성된 것일 지도 모른다.

 

1.

삶은, 시작은 통증을 수반한다. 이 명제는 곧 수정된다. 수반이란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 거느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통증이 나를 원초적으로 조건지우거나 재구(再構)한다는 생각에 가 닿기 때문이다. 독일 시인 하이네는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통증보다 견디기 쉽다. 악한 양심과 치통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 세상에 치통보다 끔찍한 것이 어디 있으랴라고 고백했다. 일종의 고통 예찬이라 할 수 있는데, 하이네의 이 구절은 밀란 쿤데라가 불멸에서 인용함으로 인해 유명세를 탔다. 이를 옮겨 적은 노트에는 ‘1950325이라는 알 수 없는 제목 아래, 체자르 파베세의 유언이 적혀 있다. “우리는 한 여인을 위한 사랑 때문에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간에 사랑이 우리의 비곤함, 우리의 비참함, 우리의 무방비 상태, 우리의 허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라고 울먹이고 있다. 이 비극의 와중에서 우리는 시를 쓰고, 그래도 얼마만큼은 그 시를 통해 한 조각 햇살이 우리의 얼굴에 비춰지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화백 운보는 말년에 바보산수를 그려

마침내 사람이 가야 할

한 길을 보여주었고

성직자 김 추기경은 바보 자화상을 그려

세상만사 깨끗이 놓아 버린 이의

진짜 무심상을 보여주었다

 

자칭 타칭 바보라 불린 어떤 정치인은

정말 바보같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낭떠러지에 내동댕이쳐 박살내버렸지만

 

보고도 안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뒤집힌 세상에서 덩달아 뒤집혀 사는

길 찾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같잖은 나

-이상호, 진짜 바보전문

 

사족이 필요 없는 명확한 전언을 가진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이상호 시인은 새삼스레 김기창 화백과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을 소환하고 있다. 이렇게 호명된 이들은 예술, 종교, 정치 등 그들의 평생의 업() 천양지차지만 방법론은 하나 같이 바보스러움’, 원칙에 충실했다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원칙을 개인적 욕망이나 욕구로 슬쩍 바꿔 말하려는 경향이 우리 시단에 분명이 상존한다. 이 자리에서 힘주어 말하지만, ‘원칙행위, 영향이 타자에게 직접적으로 관여되는 주체의 의지적 상관물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이니 본능이니, 시대적 경향이니 따위의 변명을 앞세우고자 한다면, 그런 작품을 산출하는 시인들은 최소한 원칙이라는 말 앞에서는 한 걸음 비껴서야만 한다. 이상호 시인은 덩달아 뒤집혀 사는/길 찾겠다고 길길이 날뛰는이라는 자조를 토로한다. 눈 밝은 독자들이야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이상호 시인과 필자는 안산에 소재한 한양대 에리카캠퍼스에서 강의하고 있다. , 여름 그리고 가을 지나 폭설이 두 차례나 캠퍼스를 뒤덮었지만 아직도 노란 멍울들이 곳곳에 남아 흐린 하늘을 더 어둡게 한다. 자라 예술가나 성직자나 우직한 정치인이 되고도 남았을 우리의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소천할 때, 아 이 지상의 어른으로, 시인으로, 선생으로 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 시인은 진짜 바보가 필요한 이 시대를, 우리 사회를 힘껏 꾹 눌러본다.

 

시집을 낼 때마다 꼬박꼬박

축하한다는 말을 잊지 않던 그가

 

내 것은 고사하고 지금껏

시집 한 권 사 읽은 적 없다는 걸

알게 된 날

 

술 한 잔 하자는 그를

애써 거절해버린 나를

 

서둘러 용서했다는 걸

오늘에서야 털어놓는

 

이런 아픈 날,

부디 용서하지 마시압!

-박완호, 시집 후기전문

 

시인 축구단 글발의 회원이거나 한 차례 이상 술자리에 동석했던 문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농담이지만, 평택에 사는 박후기 시인이 썼을 법한 시를 박완호 시인이 선수 치고 나와 버렸다. 사실 그는 수비형 미드필던데 자기가 공격형이라고 착각해서 상대 진영 골문 근처에서 어슬렁대는 하이에나 같은 습성을 갖고 있다. 어쨌든 시인은 귀한 걸(시집) 너무나 당연시하며 천대하는(‘시집 한 권 사 읽은 적 없다’) 세태를 조롱하면서, 나아가 그런 세태를 쉬 용서해야만 하는 자신의 입지를 자조하면서 우리 모두를 한 판 광대극의 등장인물로 희화화하고 있는데, 그의 질책이 어쩐지 싫지 않은 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 혹은 마력(魔力)일 것이다. 마지막 행, “부디 용서하지 마시압!”을 보라, ‘부디라는 간곡한 청유형 어휘가 마시압이라는 게다가 강조의 의지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느낌표(!)‘를 꽉 찍은 종결 어미가 호응 되는가? 이 부조화 속에서 박완호 시인은 세태와 세태의 자연스러움을 고발하고 있다.

이상호 시인과 박완호 시인의 작품은 쉽게 읽히지만, 어렵게 고민해야 하는 시대적, 문화적 핵심 주제를 연말 이 복잡한 머리에, 가슴에, 손과 발목 위에 슬며시 얹어 놓는다. 무겁지만, 우리가 시인이라면 딴청 부리며 마냥 비켜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2.

육체적 고통의 즉각성과 직접성을 마치 예찬이라도 하는 듯이 글을 시작해 놓고, 실상은 진짜 바보를 필요로 하는 세태와 이 시대를 지나가는 시인의 위악적인 포즈를 강조하고 말았다. 하이네는 아우슈비츠의 희생자가 아니지만, 그는 히틀러의 정치적 부상과 최첨단, 일류에 대한 도덕적 사유가 결여된 열망이 빚어낼 전 인류적 재앙을, 그 전조(前兆)를 온 몸으로 감지한 시인이다. 파울 첼란이나 귄터 아이히처럼 고통이 육체에 각인 되었을 수밖에 없었다면, 다른 시 세계가 펼쳐졌을 것이다. 휠덜린에서 시작된 독일시에 대한 내 집착은 어디쯤에서 끝날 것인가?

 

변기에 앉아 변의 줄기를 가늠한다.

 

강골이던 사촌이 대장에 문제가 생기자

맥없이 무너졌다.

이까짓 것 하고 버텼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배 시인 한 분도 변줄기가 수상해

병원을 찾았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변의 줄기가, 변의 굵기가

이제 시보다 중요하다.

명예보다, 돈보다, 더 중요하다.

 

변기에 앉으면 세상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

시원하게 변을 보는 일만이

사는 일이다.

-장종권, 공포의 정체·1전문

 

시인의 반어적 선언, “시원하게 변을 보는 일만이/사는 일이다는 유쾌, 통쾌, 상쾌하면서 동시에 슬프다. 일순간 읽는 이를 처연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이 아이러니의 효과이고, 우리가 굳이 시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잔변(殘便)이 남은 것처럼 못내 찝찝하고, 맘 한 구석이 찔린다. ‘변기에 앉아인생의 이법을 통달하고 있는 시인의 자세가 사뭇 익살스러우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다. 사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는 지독한 치질로 변기 위에 앉아 이른바 검은 제복의 행진을 구상했단다. 그는 우리는 모두 폭력을 예찬한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 가차 없는 직접성이다라고 선언하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결국 독재자는 변기 위에서 실제적인 공포를 낳았고, 시인은 명예보다, 돈보다심지어 시보다중요한 사는 일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모든 계기가 한 결과로 귀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장종권 시인이 느끼는 공포의 정체는 앞으로 더, 깊이 철저하게 탘구되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인다.

 

실종은 왜 언제나 벽보 안에서 사실화 되는가,

누군가의 손을 놓친 그 순간은 왜 항상 희미한 걸까,

길을 잃고 헤매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도록

세상은 그 순간에 관심이 없다.

그저 전속력으로 질주할 뿐.

 

아이들은 언제나 지하철 출입문 옆에 붙어 있고,

어느 공기업은 그들 덕분에 사회공헌을 하고,

그들은 웃고 있는 건 당연한 사실이 된다.

벽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고 출입문으로 다가선다.

문이 열린다.

-권 순, 코드 아담부분

 

시인의 안내에 따르자면, ‘코드 아담은 미국의 실종아동 수색 프로그램의 암호명이라고 한다. 필자처럼 일 없이 TV 케이블 채널을 전전하는 인사들은 ‘FBI 실종수사대라는 미국 드라마쯤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변기 위에서 무심한, 혹은 냉담한 길거리와 지하철역 같은, 즉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너무나 공적인 개방된 공간으로 도발적 전이(轉移)가 이루어졌지만, 이 두 공간과 이야기의 층위를 가로질러 공포가 드리워져 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권순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사실 시인이란, 아니 스스로 시인으로 인생을 정위한 존재란 결국 세계와 운명 앞의 미아가 아닌가? 스스로 부모와 집과 고향을 떠나 하이데거 식으로 아니라 에서 자기를 회복하려는 위대한, 무모한 꿈을 펼치는 여행자, 이방인, 무적자가 아닌가? 이 현대성을 낭만성으로 치부해버리려 하는 것이 한국 현대시의 병폐중에 병폐다. 어쩌면 시인은 스스로 을 놓친 존재일 뿐이다. 사건들에 대한 시적 관심은 마땅히 칭송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사건에 대한 감수성 자체가 시적 고민과 인식의 깊이를 담보해주지 않는다.

이래저래 아픈 기억들로 점철된 2014년이 저물어간다. 한국 시단은 김종철 선생과 박남철 선배를 잃었지만, 다른 앳된 수 없는 젊은 피들이 수혈됨으로 인해 더 강건하고, 활기 차 졌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아라문학도 그 속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쁘다. 감사드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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