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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유현아/당고내역 2번 출구 쪽으로 나오세요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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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당고개역 2번 출구 쪽으로 나오세요 외 1편
간신히 살아있는 골목에는 실눈을 뜨고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
새벽 공공근로 나가는 여자의 뒷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남자의 흐느끼는 눈빛이나
더 멀리 진격하기 위해 앞발을 모아 힘을 당기는 그림자의 긴 발톱이라거나
누군가 물을 주고 있을 숨은 곰팡이에 대한 내력이라던가
일렬로, 일렬로
그 골목은 펼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비가 오면 우산을 펼 수 없어 실망에 겨운 당신이 지나칠 수가 없어
마주 오는 사람의 어깨를 펼 수 없어 감정의 나비들이 날아갈 수가 없어
몰래 문자를 보낼 수도 없어 도착한 바람들을 펼 수 없어
심심한 저녁이 몰려드는 그곳은 불안한 과거가 먼지처럼 날리고 있어
지탱할 수 있는 건 골목을 에워싸고 있는 낮은 이야기들
그마저도 지켜낼 수 있는 지루한 이야기들은 이제 많지 않아
손바닥만 한 창문에 붙어있는 절망을 함께 안아줄 수도 없어
월동 준비를 하는 비닐들의 속삭임도 들어줄 수 없어
이리저리 차이는 한낮의 햇빛들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다만, 다만 그 골목을 지나고 나면 지붕들 위로 전철이 다니고 있다는 거야
나의 단골 슈퍼마켓 캐셔
가끔 노랑머리 휘날리며 배달도 한다 가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매장 정리도 한다 가끔 치켜뜬 눈초리로 고기도 썬다 가끔 기다란 손가락들로 채소도 다듬는다
가끔 사장 몰래 외상도 해준다 기록도 하지 않고 외운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가장 우쭐대는 장소는 계산대였다
물건 값을 재빠르게 계산하는 동안 슈퍼마켓이 경매로 넘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을까
아니, 그전에 동네 사람들이 길 건너 대형마트로 옮겨갈 때부터 알았을까
갑자기 그의 손때가 묻은 진열되어 있던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
캐셔가 천직임을 믿어 의심치 않던, 손가락 마디에 바코드가 찍힌 것처럼 으스대던
그의 매섭던 눈동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선 인형처럼 흐늘거렸다
내 허락은 구하지 않았으나 나에 대한 예의는 지키느라
단 3일간의 세일을 하고는 계산대도 사라지고 캐셔도 사라졌다
늦은 저녁 올려다 본 하늘에는 눈치 빠른 캐셔가 계산했던
콩나물이 두부가 고등어가 돼지고기가 새우깡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그의 계산대를 찾는 먹먹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웃 동네 슈퍼마켓으로 고작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찻길을 건너야 하는데
싹싹하고 친절하고 말 없던 우리 동네 슈퍼마켓 캐셔 청년, 서른도 안 된
또 어디에서 슈퍼마켓 캐셔를 하고 있을까 몰라
유현아 - 2006년 전태일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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