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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김영언/문산댁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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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언
문산댁 외 1편
어둠 속 개 짖는 소리 몇 겹 접어 베고
창문 밖 달빛 가장자리 끌어당겨 덮고
세월처럼 마디마디 쑤시는 관절 주무르면서
밤마다 끙끙거리며 홀로 뒤척이는 문산댁
손톱 채 자랄 틈도 없이
악착같이 땅 파서 자식들 대학 갈쳐
도시 나가서 돈 잘 버는 직장 댕기고
큰 아파트 사서 깨끗허니 잘 산다고
늙은이가 뭐 욕심낼 게 있시꺄
자식덜 잘 되먼 그게 가장 큰 낙이지
자식 자랑이 커질수록
나날이 허리 주저앉아 등 오그라들고
두 무릎 점점 더 벌어져 안짱다리 되고
종아리 더 가늘어져 걸음 힘없이 더뎌지고
자식들 살림 내줄 때마다 떼어 내주고 남은
이제 몇 마지기 논배미 가다루는 것도
하루가 다르게 숨이 턱에 차 징그러운데
그만하면 자식들한테도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다 팔아치우고 고된 일 좀 그만 하라고
이웃들 지나가며 무심코 던지는 소리
쓸데없이 자란 잡초 뽑아내듯 무심히 솎아내며
잘 간수해서 막내 물려주는 게 마지막 할 일이여
굽은 허리 펴고 흐뭇하게 들판을 바라본다
오늘의 옛날도 그 옛날의 오늘도
침침한 새벽 안개 속 더듬더듬 들길 나섰다가
마음 산란하게 등 떠미는 노을 설레설레 뿌리치며
기다리는 불빛도 없는 마당으로 홀로 돌아온다
내 주위를 가까이
공기 맑고 인적 드문 낯선 시골로
낭만적인 기분에 들떠 이사를 한 휴일 오후
구부정한 허리와 백발과 지팡이들 대여섯이
반가운 불청객으로 몰려왔다
금방 짜내어서 고소함이 들판을 휘감을 듯 끈끈한 들기름 한 병과
농약 안주고 하우스 안에서 가족용으로 기른 고춧가루 한 봉지와
오래 두어도 단단하고 맛이 순하다는 토종마늘 마늘 한 접과
텃밭에서 가꾼 꾸밈없는 빛깔의 청치마 상추 서너 포기와
속살이 호박처럼 정겹게 노랗다는 고구마 한 상자가
예고도 하지 않은 집들이를 예고도 없이 왔다
그들은 내 주를 가까이 하라고 엄숙한 노래를 불러주고 돌아갔는데
나는 송구스럽게도 그들의 부탁을 다 들어주지는 못하고
다만 내 주위를 가까이 하겠다고 기꺼운 다짐을 하였다
첨탑 위 십자가가 아담하게 걸려 있는 문산성결교회 언덕배기
머위 잎사귀 군락처럼 돋아난 야트막한 집들을 향해
아른아른 스며드는 그들의 뒷모습이 꽤나 애틋했다
김영언 - 1989년 『교사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0년 계간문예 《다층》으로 등단. 시집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 세월』, 『집 없는 시대의 자화상』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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