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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최휘/말들은 먼 곳처럼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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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휘
말들은 먼 곳처럼 외 1편
숨겨 놓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사라지게 한다
침묵은 표정이다
다문 입술이 가능한가
떠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토할 것 같다
얼굴을 돌리면 뒤통수만 남는다
앞이거나 뒤다
나무들이 물관을 타고 오른다
새싹들이 땅을 움켜쥔다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린다
강물이 굽이치고 태양이 이글거린다
입술을 움직여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그러나 부스러기처럼 수다는 살아있다
양쪽 광대뼈 아래 붙어 살면서 세포분열한다
말들이 먼 곳처럼 흔들린다
고양이는 유리 밖에 있다
어둠을 가득 물고 있다 쓰러진 잡풀 사이로 등을 곧추 세우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내리치는 빗속에서 울부짖는다 안으로 들어오고야 말겠다는 듯 앞발로 유리창을 박박 긁는다 젖은 털에서 김이 솟는다
놈과 나의 눈이 유리창 사이에서 팽팽하게 마주친다 저 노란 눈알이 유리를 옴폭 밀고 들어올 것만 같다
나는 씽크대로 돌아와 생선의 머리를 자른다 허연 눈알이 빠져 뒹군다 물을 세게 틀어 핏물을 흘려 보낸다 형광등 불빛이 물살에 휘말린다 비린 손으로 종아리를 긁는다 털 달린 얼굴이 비비적대던 자리를 긁는다 놈은 유리 안으로 쏟아지려고 빨간 방석과 씹던 육포조각과 몇 개의 털이 날리는 제 자리로 돌아오려고 입술을 비틀며 소리를 끌어 올린다 두 귀까지 비틀린다 625번에서 700번까지 티비 채널을 돌리는 남자의 손과 시든 장미꽃을 휴지통에 버리는 여자 애 곁으로 확장된 동공이 따라 다닌다
놈의 소리를 덮어쓰고 저 축축한 털을 덮어쓰고 놈이 찍어놓은 발자국을 밟으며 저 유리의 바깥으로 내가 사라지면 밥먹자 이런 소리가 야옹 이렇게 튀어나오는 저녁이 될까 하얀 뒤꿈치를 디디며 어두운 골목 끝으로 사라지면 이방 저방 오줌을 싸며 돌아다니던 저 털북숭이가 이방 저방 문고리를 잡고 열고 닫으며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게 될까
하얀 거품을 풀어 칼과 도마를 닦는다 냄새들이 닦아지지 않는다 쉰 목소리가 문 틈로 빠져나가는 비린 냄새를 향해 발톱을 치켜 세운다 유리는 차고 투명하다
최 휘 - 2012년《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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