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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산문/김인자/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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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10. 리타
그녀는 지난여름 라주네 집에서 만났다. 라주는 그녀를 옆집에 사는 친구 아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개구쟁이 아들을 앞세워 수시로 들락거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던 그녀. 나는 네팔 찌아를 좋아했고 그녀는 한국의 짜파게티를 좋아했다. 정전으로 어두운 식탁에 앉아 짜파게티 묻은 입으로 배시시 웃던 리타.
우리는 옷과 음식을 나누며 가족처럼 지냈다. 평소 같으면 당연 이름을 불러주었을 텐데 나는 헤어질 때까지 그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흘러간 팝송 그룹 스모키가 부른 ‘옆집에 사는 엘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란 노래가 떠올라서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자동으로 그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그러니까 내 마음 속 그녀는 바로 옆집에 사는 엘리스였다.
라주네 가족이 생각날 때마다 그녀가 떠오른다. 얼마 전 페북에서 라주와 이야기를 하다 마침 그녀 생각이 나서 이름을 물었더니 리타(Rita)란다. 그러니까 엘리스는 엘리스가 아니고 누구라도 사랑을 고백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리타인 것이다. 리타, 아이가 있는 이웃집 여자지만 고운 인상만큼 이름도 예쁘다. 다음 네팔에 갈 땐 리타에게 스모키의 흘러간 노래도 들려주고 짜파게티도 넉넉히 준비해야겠다. 고운 입술에 검은 짜파게티 소스를 묻히고 환하게 미소 짓던 리타가 보고 싶다. <<네팔 카트만두
#11. 당신 뜻대로
탄자니아, 다르 에스 살렘에서 대형페리로 3시간쯤 달려 노예의 섬 잔지바르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 마중이라도 나온 듯 꽃을 든 무슬림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소년과 내가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이었을까. 이때다 싶은지 흰 치아를 드러내고 꽃을 흔들며 다가오는 소년은 다리가 불편했고 예상대로 꽃을 내밀었다.
묻지 않아도 안다. 그 섬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것이고 그 의미로 꽃을 사라는 것이겠지. 나는 방금 도착해 숙소를 찾는 일이 급선무라 꽃을 살 여유가 없다는 걸 소년이 모를 리 없지만 그는 미소로 일관했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쉬어가려고 좁은 골목에서 배낭을 내려놓자 이때다 싶은지 소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끝내 꽃값을 묻지 않았다. 물어보나 마나다. 꽃값은 as you like it(당신 뜻대로)일 것이다.
소년은 나 같은 여행자가 가장 관대해지는 날이 새로운 여행지의 도착 첫날과 마지막 날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넓은 나뭇잎으로 작은 꽃송이를 싼 꽃은 신부의 부케를 연상하게 했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숲을 헤치며 꽃잎을 모아 꽃다발을 만들었을 꽃,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시들 꽃이지만 주인을 만나면 식구들의 빵이 될 꽃, 그러니까 소년에겐 꿈이 되고 희망이 되는 꽃, 더위를 식히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 지를 소년은 잊지 않았다. “이 꽃 예쁘죠? 그러니까 팔아주세요. 난 이 꽃을 팔아야 해요. 네? 네?” 숨넘어가는 소년의 설득에 마지못한 듯 협상을 시작했다.
“꽃은 필요 없어, 네 미소만 살게” 어이가 없다는 듯 소년이 협상을 제시했다. “그럼 꽃을 사면 미소는 덤으로 줄게요. 어때요? 괜찮죠? 그렇죠?”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가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협상카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토닥토닥 어깨를 도닥여 주며 앞으로 다가올 평탄치 만은 않을 소년의 미래를 격려해주었다.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지만 소년의 다리는 신의 실수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년이 믿음직스러웠던 건 보통 아이라면 불편한 다리를 탓하며 집이나 지켰을 텐데 비루한 구걸이 아니라 당당하고 적극적인태도며 무엇보다 밝은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치른 대가가 꽃값인지 미소 값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꽃이든 미소든 어느 것 하나는 그저 얻은 것 같아 무거운 배낭도 걸음도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받은 돈을 동그랗게 말아 쥐고 멀어져가던 소년이 입을 귀에 걸고 손을 흔들 때 물었다. “아 유 해피?” “예스, 예스, 아임 해피” 예스를 반복하던 소년의 대답이 긴 여운을 남겼다. 잠시 후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 크리스털 같은 그의 웃음소리가 배낭에 올려둔 꽃다발 주변을 맴도는 환청을 들었던 것도 같다. 집을 떠난 지 여러 날, 나는 그 머나먼 아프리카 어느 섬에서 두고 온 내 아이를 그리워하며 꽃다발 하나로 가뿐한 신고식을 마쳤다.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
#12. 걱정은 내일하면 돼
아프리카인들은 일생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사람들이 많단다. 하기야 학교가 없고 글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문명인들이 그들에게 행복하나고 묻는 건 조금 어이없는 질문에 속한다. 그들 누구도 문맹이라는 행불행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운 사람이 있냐고 묻자 자신들을 지배했던 백인이라는 답보다 자기 집 마당에 망고를 허락 없이 따먹는 이의 이름을 앞세운다.
남편은 바람이 나 집을 나가고 아이들은 맨바닥을 뒹굴며 배고프고 아프기까지 한데 헤어스타일만 관심 있는 철딱서니 없는 젊은 엄마는 뭐가 그리 좋은 지 뜨거운 카사바 밭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 삼매경이다. 잠시 그 아이들을 돌봐주다 은근 부화가 나서 무슨 엄마가 그러냐고 걱정도 안 되냐 한 마디 했더니 깔깔거리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한다. ‘걱정은 내일하면 돼.’ <아프리카 케냐
#13. 노화가의 삶
호주 프리몬트리 국립공원을 향하는 길 어디쯤이었다. 승합차 한 대가 그도 마치 풍경인양 바닷가 숲의 호위를 받고 있고 그 곁에 백발의 노인이 보이기에 쉬어갈 참으로 차를 세웠다. 딱히 궁금할 것도 없었다. 그는 화가다. 비닐로 덧씌워진 그림들이 차 유리문에 붙어있었고 차 안에도 꽤 많은 그림들이 보였는데 엽서 크기는 5$. 작은 스케치 북 크기는 20$이라는 착한 금액, 이 모든 것들이 그가 화가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나와 인사를 나눌 때도 그는 그림에 색감을 입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그림의 소재는 모두 주변 풍경이다.
허락을 얻어 차 안으로 들어가 포개놓은 그림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유화였는데 색감이 단순하고 밝아 이발소 그림을 연상시켰지만 나름 호감이 가는 그림이었다. 헌데 그림을 보다말고 내 눈엔 들어온 것은 작은 액자에 오드리 햅번을 닮은 젊은 여인의 사진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미소가 고혹적인 여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그림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내가 사진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안 노인의 얼굴에는 설명하기 힘든 그리움들이 출렁거렸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대충 차안을 둘러보았다. 책, 담요. 몇 벌의 옷,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감,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화구들, 주방용품들 모두 낡은 집기들이었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었다. 입술을 열 때마다 지금의 삶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다는 말과 표정, 그렇게 산다고 했다. 매일 그곳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집이 있지만 가족이 없으니 차 안이 집이요 길이 곧 일터라고. 그래, 욕심을 부리지 않더라도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란 걸 화가의 미소가 말하고 있었다.
그림은 그리고 싶은 만큼 그리지만 팔리는 건 하루 한두 점, 전혀 팔리지 않는 날도 있다고, 그림이 팔리면 식당에 가서 밥을 사먹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차에서 대충 해결한다고. 노인은 연금수령자지만 그보다 그림을 그려 생활하는 일이 보람 있다고. 그의 그림에는 원초적 외로움이 묻어났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지복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가 작은 그림 한 점에 눈독을 들였더니 말만 잘하면 그냥 줄 분위기다. 팔아도 좋고 안 팔아도 좋은 그림, 세상이 알아줘도 좋고 몰라줘도 상관없는 그림, 스치는 인연에 불과했으나 노화가가 기억에 남는 건 젊은 아내의 사진을 볼 땐 마냥 그윽한 눈빛이었는데 그림을 설명할 땐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 직업이든 취미든 날마다 낡은 차를 끌고나와 자연을 벗 삼아 이젤을 세우고 물감을 짜며 잠시 쉬어가는 세상의 여행자들과 눈 맞추고 소통하며 사는 것도 괜찮지 싶었다. 그러니 삶에 지나친 의미는 부여하지 말자. 인생이 뭐 별거겠는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다가는 거 아닌가. <<호주
#14. 먼질 비슈어커르마
"먼훗날 나는 꼭 조종사가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오를 거야."
TV(2011년 9월 23일에 방영된 EBS <세계의 아이들> ‘눈의 아이 하늘을 꿈꾸다’)를 통해 본 히말라야 언저리에 사는 아이 먼질 비슈어커르마다. 먼질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조그만 개구쟁이를 상상했는데 이젠 제법 청년의 티를 내며 거짓말처럼 내 앞에 서 있다. 표정이 어둡고 다소 반항적으로 보이는 먼질(나는 먼질이 젊은 날 제임스 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은 히말라야 마을에 살며 파일럿을 꿈꾸는 소년이다.
이른 아침, 안나푸르나 산군이 눈앞에 펼쳐지는 담푸스 아랫마을로 먼질을 찾아 나섰다.‘힐레’가는 날 전해줄 게 있어 ‘페디’에서 그의 엄마와 함께 본 후 나흘만이었다. 아이답지 않게 온통 우수로 가득한 표정의 먼질을 만났을 때 뭔가 문제를 직감했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비행기를 보고 자신도 언젠가는 조종사가 되어 하늘을 날 거라고 나무로 깍은 모형비행기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계곡을 내달리던 TV속 호기심 가득한 그 아이가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몸이 좀 아파서라고만 할뿐 답은 피했다.
먼질은 도시로 간 누나를 제외하고 세 명의 어린 동생과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엄마가 함께 산다. 길에서 만나 판잣집으로 안내하던 먼질의 아버진 취해있었고 가족들은 집에 없었다. 집은 비가 새는 두어 평도 안 되는 방에 침대 하나가 전부였는데 아무리 그럴 듯한 상상을 해도 저 누추한 공간이 다섯 가족의 보금자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화를 원했지만 아침부터 술 냄새를 풍기는 그와는 대화가 불가능했다.
먼질의 아버지와 헤어져 돌아오던 마을 언덕에서 나머지 가족을 만났다. 비가 내린 지난밤도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이들과 밖에서 밤을 보냈다는 먼질의 엄마, 어떤 이야기에도 그들은 웃지 않았다. 설산의 특전을 누리고 사는 그들의 재산목록 1호가 낙천성이라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모습이다. 파일럿이 되려면 학교에 가야하고 열심히 공부해야하지만 하루하루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는 먼질에게 파일럿은 꿈일 뿐이라고 비웃는 듯했다. 세상에는 도움이 절실한 아이들이 많지만 개인사거나 문화적인 차이로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데 도무지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먼질의 현재가 그랬다.
나는 TV에서 본 먼질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질, 파일럿이 되겠다는 꿈은 아직 유효하니?” 먼질이 나를 쳐다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 속엔 ‘그럼요, 꼭 그렇게 되고 말 거예요. 아니 되고 싶어요’가 담겨있었다. 히말라야 산골에서 파일럿을 꿈꾸며 사는 먼질을 아이답게 웃게 할 방법은 없을까. 이제 여행은 끝났지만 다음에 보다 좋은 모습으로 만나기 위한 내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상의 최고봉 히말라야를 부러워하지만 히말라야 높이만큼 힘겹고 척박하게 사는 그들의 고단한 삶은 생각하지 못한다. 이건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내가 사람여행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네팔 담푸스
김인자 - 강원도 삼척 출생,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 『슬픈 농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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