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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김영덕/사랑의 방정식과 부등식 - 장종권,김서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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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김영덕
사랑의 방정식과 부등식
-장종권, 김서은의 시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로 시작되는 옛 가요 ‘홍도야 울지 마라’가 있다. 일제강점기 토월회 멤버이며 동아일보 기자였던 극작가 이서구가 노랫말을 지은 이 유행가는 원래 1936년 발표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제목의 악극에서 오빠 ‘철수’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 오빠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여동생 ‘홍도’를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 장안의 수많은 기생들이 이 노랫말에 자신들의 처지를 대입하여 전대미문의 큰 공감과 호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서구는 6,70년대를 풍미했던 라디오 토크쇼 ‘유쾌한 응접실’에 양주동, 김두희 등과 함께 단골손님으로 매주 출연하여 박학다식한 본인의 면모를 청취자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준 인물이다.
시의 고금과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도시는 많은 인구가 모여 살며 일정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상업지역은 따로 다운타운이라고 불린다. 다만 뉴욕 맨해튼의 경우 월스트리트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곳의 다운타운은 문자 그대로 도시의 아래쪽 타운을 지칭하므로 예외다. 그런데 전 세계 대부분의 도시 다운타운의 뒷골목에는 홍등가도 있다. 사실 인간은 먼 조상이 아프리카 초원의 나무위에서 내려왔을 때부터 줄곧 사회적 동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사회의 일원이 되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짐승이거나 신이다. 요컨대, 인간은 사회 속에서 다른 이와 소통하며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필히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팔고 사는 (시)장을 필요로 한다. 시장은 매일 무수히 이루어지는 거래를 통하여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궁극적 균형을 찾아가는 비의적 장소다. 진실의 순간들이 반딧불처럼 무수히 명멸하는 익명의 숲이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재화와 서비스만 팔고 사는 게 아니다. 사람과 돈이 모닥불처럼 뜨겁게 몰려드는 곳이면 불나방처럼 번창하는 분야가 있다. 다운타운의 시장과 유흥가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 휘황한 LED조명과 요란한 네온사인이 넘실대는 강남역 네거리 뒷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욕망의 배설구가 되어 버린 이 시대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이 있다. 《아라문학》 2015년 봄호(7호)에 ‘가끔 궁금해’ 외 4편의 시를 올린 김서은은 얼마 전 시집 ‘안녕, 피타고라스’도 냈다.
거기, 나 좀 봐 줄래요···… 불빛 날아다니는 강남역 네
거리 칠리칠리 피자 하우스 너머 라스뽀삭 드레스 숍 반
짝거리는 스핑글 너머 별이 쏟아지네요 옵티마 성형외과
붉은 입술 너머 데리야끼 포장마차 지붕 위로 어둠이 내
리네요 저, 나 좀 봐주세요…… 땃따붓다 흑맥주 투다리
하우스 사이 주 은혜 교회 뾰족탑에 검은 하늘이 찢어지
고 돈데이 삼겹살 모퉁이를 돌아 SK주유소와 먹자골목 사
이 별이 쏟아지네요 촘촘히 늘어선 다국적 모텔들 깃발
펄럭거리는 카사블랑카 선레드 아라비안나이트 틈새에
낀 미인촌(미희 100명 대기) 광고판 졸고 있는 가로등 아
래 나 좀 볼래요…… 빨간 오토바이 꽁무니에 별이 쏟아
지는데 기우뚱 사라지는 강남 씨
사랑해요
- 김서은 「내 사랑 강남 씨」 전문
일찍이 장종권 시인은 ‘환타지에 미친 도시에는 밤이 오지 않는다(「호박꽃나라·4」부분)’고 설파했지만, 데이트레이딩 같은 즉흥적 일회성 사랑의 맨얼굴을 다룬 이 시는 서울의 신흥 다운타운인 강남역 네거리 전체를 세트무대로 축소했다. 스무 살 무렵 이발소에 가면 헤어스타일을 논하기에 앞서 이발사가 숱 많은 머리칼을 우선 쳐내고 보듯이, 김서은은 강남거리의 모습을 무대장치가 설치된 연극무대로 치환하면서 생략된 풍경 서술만으로 한 편의 시를 잘 완성해냈다. 짐작하듯이, 그 거리의 수많은 커피숍이나, 제과점, 퓨전카페, 핸드폰매장 등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피사체는 흐릿하게 처리하지도 않고 아예 과감하게 생략했다.
강남 네거리의 밤은 또 다른 낮이다. 실컷 먹고 마시고 멋지게 꾸미고, 남 보다 예쁘게 보이는데 필요하다면 기꺼이 얼굴 성형도 마다하지 않는 시대에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는 국적이 필요 없고, 그 욕망 배출구의 존재에는 시대적 차이도 없다. 이것이 21세기 이 땅의 맨얼굴이다. 룸살롱이나 나이트클럽 대형 시간차 광고판의 불빛은 실제로 날아다닌다.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의 반짝거리는 별은 강남사거리에도 있다. 강남사거리는 다국적 기업은 물론,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옥들이 도열해 있는 우리나라 경제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그 뒷골목은 환타지가 점령하고 있다. 그리하여 또 다른 환타지라고밖에 볼 수 없는 주 은혜교회 뾰족탑에 검은 하늘은 찢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의 화자는 분명 스트릿 걸이거나 ‘카사블랑카 선레드 아라비안나이트 틈새’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미희 100명’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그런 ‘강남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 이 도시의 군상들이 원나잇스탠드에 익숙한 것만큼이나.
돌이켜보면, 지금은 말끔한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했지만 60년대말까지도 인천의 백운역 근처 산곡동 캠프마켓 미군부대 정문 건너편은 기지촌이었다. 약 1KM에 이르는 거리에서는 저녁이면 홍등가 쇼윈도 불빛 사이로 머리카락을 노랗게, 빨갛게 물들인 반라의 여자들이 미군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미군 전용 클럽들인 ‘드림보트’, ‘바니클럽’.. 앞으로 시내버스도 지나다녔기 때문에 그 광경은 그대로 무차별적으로 이 땅의 불특정다수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옛날 보부상 넘나들던 고갯길 모퉁이에도 ‘박달재의 금봉이’가 살던 주막이 있었고, 갈매기 떼 몰고 만선의 꿈 이루며 돌아오는 포구 어시장 뒷골목에도 질펀한 작부집들이 있었다. 시골 장터가 그랬다. 광부들 봉급날 검은 석탄 묻은 돈으로 흥청거렸던 탄광촌의 방석집들도 그랬고, 전방 군부대 막사 인근의 신작로 먼지 희뿌옇게 뒤집어 쓴 남루한 맥주집들도 그랬다. 시골 중늙은이들이 소 판돈으로 흥청거리던 우시장 근처 술집들도 그랬다.
어디 그 뿐인가? 8,9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가디나시에 있는 술집들에서는 중년의 한국과 일본의 상사주재원들이 뒤섞여 질펀하게 어울렸다. 미국인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동아시아인들의 일행으로 온 손님들이었으므로 존재감은 없었다. 홀 중앙의 가라오케에서 번갈아 마이크를 잡은 술손님들은 각자 편한대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 가사가 일본말인지 우리나라 말인지 아니면 미국말인지 프랑스말인지 쉽게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구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음주가무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소통이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술과 노래는 만국 공통의 언어이기 때문이리라. 1930년대 서양조계가 있었던 중국 상하이나 텐진, 만주벌판의 도시들 풍경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회성 사랑을 팔고 산다는 면에서, 그리고 하룻밤 풋사랑에 대한 로망이라는 면에서....
2
그런 의미에서 장종권의 연작시 ‘아산호 가는 길’에 실린 ‘연서’시리즈는 차라리 반전이다. 지극히 조촐하며 소박하고 고전적이며 지고지순하기까지 하다. 오랜 세월 이어진 그리움이라는 테마를 끝내 놓지 않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이를 먹어 쓰는 연서는 불륜 같아 쑥스럽다
남자는 죽어서도 여자가 필요하다는데
살아서 어여쁜 여자가 웬일로 이리 부끄러운가
내가 사춘기적부터 쓰던 연서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다가 끝내 시가 되었다
그녀는 한번도 나의 시를 읽은 적이 없으니
나는 일찍이 연서를 보낸 적이 없는 것이다
감추고 감추고 감추다 보면
결국에는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어지더라
연서는 쓰면 쓸수록 마치 꿀통과 같아서
하루 스물 네 시간, 일 년 삼백 육십 오 일
그녀 보다 쓰고 있는 내가 더 감미롭더라
하여 내가 밤새 쓰는 연서는
어쩌면 나를 향한 그리움은 아니었던가
맹랑한 농담이겠지만 또 다른 그녀가
연서를 들먹이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 이미 나는
그녀를 향해 마음의 연서를 쓰고 말았나보다
- 장종권 「연서 1」 - 아산호 가는 길 61 전문
시인은 ‘내가 밤새 쓰는 연서는/어쩌면 나를 향한 그리움은 아니었던가’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이십대 초반의 내가 어두컴컴한 군대 내무반 페치카 옆 침상마루에 엎드려서, 비오는 참호 속에서 M16소총을 부둥켜안고 철모를 책받침 삼아, 그토록 집요하게 써서 띄워 보냈던 군사우편은 첫사랑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었다기보다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몸으로 아득한 전방에 유폐되어 있는 나를 향한 연민이었는지도 모른다.
장종권 시인은 첫머리에서 ‘나이를 먹어 쓰는 연서는 불륜 같아 쑥스럽다’고 하면서도 곧 ‘남자는 죽어서도 여자가 필요하다는데/살아서 어여쁜 여자가 웬일로 이리 부끄러운가‘라고 말하며 서둘러 수습을 하고 나서 오히려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라며 스스로 당당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연에서는 화자를 통해 ‘맹랑한 농담이겠지만’이라고 한 자락 깔긴 했지만, ‘또 다른 그녀’를 향해 ‘마음의 연서를 쓰고 말았나보다’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하룻밤 풋사랑에 대한 남자들의 로망을 굳이 감추지 않고 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이자 탐미주의자인 장종권 시인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아라문학》2015년 봄호에 꽃과 여자에 대한 시를 두 편 더 실었다.
가슴에 무수히 꽃을 매달아 주어도
꽃 너머에서 향기로운 꽃을 찾는다.
가슴에서 붉은 꽃 하나 무심히 떼어내면
가시 하나 매달려 빠지지 않는다.
- 「꽃의 가시」 전문
나는 그녀를 이 여자라 부른다.
(삼인칭과 이인칭의 차이, 삼인칭일 때와 이인칭일 때의 차이는?)
나는 그녀라는 호칭으로 그녀에게 무엇이다.
나는 이 여자라는 호칭으로 그녀에게 무엇이다.
나는 간혹 그녀를 시궁창에 처박기도 하고,
때로는 비행기에 태워 별나라로 보내기도 하지만
나는 자주 이 여자를 여왕으로 모시기도 하고,
목숨 걸고 그림자까지 지키려 들기도 하지만,
그녀가 그녀일 때와 그녀가 이 여자일 때
너무도 무게가 다르고, 넓이도 달라져서,
그녀가 이 여자인 그녀일까,
이 여자가 그녀인 이 여자일까,
연구에 몰두하다가도
몰라, 몰라도 그녀야, 몰라도 이 여자야,
그녀를 보내고 나면 이 여자가 다가오고,
이 여자가 떠나고 나면 그녀가 다시 다가와,
그녀가 그녀일 때에는 남이기도 하고,
그녀가 이 여자일 때에는 나이기도 하고,
나는 그그 녀를 이이 여자라 부른다.
나는 그그그 녀를 이이이 여자라 부른다.
「그녀인 이 여자, 이 여자인 그녀」 전문
장시인은 여기서 인류의 오랜 화두이며 숙제인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다시 다루려고 작심한다. 호시탐탐 기회를 포착하여 자신의 DNA를 되도록 널리 퍼뜨리려는 남자와 사랑의 필연적 산물인 자식의 육아를 위하여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 그 남자의 독점적 지원을 받으려는 여자의 팽팽한 기싸움과 갈등을 임상에 올려놓고 정면으로 핸들링한 것이다. 「꽃의 가시」에서는 필요할 때만 찾다가 싫증나면 미련 없이 다른 ‘향기로운 꽃’을 찾아 떠나려는 남자의 가슴에 ‘가시’를 박아 놓는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여자는 한을 푼다. 그러나 이것은 기나긴 복수의 시작을 알리는 것 뿐 일수도 있다. 원시공동체 이후 대부분의 인류 역사는 이런 갈등과 화해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인 이 여자, 이 여자인 그녀」에서 화자는 ‘그녀가 그녀일 때와 그녀가 이 여자일 때/너무도 무게가 다르고, 넓이도 달라져서’라고 함으로써 일단 내 울타리 안에는 ‘이 여자’가 밖에는 ‘그녀’가 있다고 선을 긋는다. 또한 나와 이 여자인 너는 당사자이며 일심동체일 수도 있는데 반하여 3인칭 ‘그녀’는 제3자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며, 내 여자와 남의 여자일 수도 있는 그녀를 구분한다. 세상의 반은 남자고 나머지 반은 여자이므로 경쟁자들과의 소모적이며 때로 치명적일 수도 있는 싸움은 피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남자의 지혜이자 생존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내고 나면 이 여자가 다가오고/이 여자가 떠나고 나면 그녀가 다시 다가와’라고 진술하며 울타리를 넘나드는 언어의 유희를 통해 시인은 남녀간의 작용 반작용 법칙과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을 낱낱이 포착한다. 따지고 보면, 이 시의 화자는 처음부터 ‘나는 그녀를 이 여자라 부른다’고 함으로써 이인칭일 때와 삼인칭일 때의 차이를 무시하고 무력화까지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요지경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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