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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백인덕/배리(背理)에 대한 단상; 시적 성취와 시인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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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백인덕
배리(背理)에 대한 단상; 시적 성취와 시인의 비애
-지난호 다시 읽기
배리, 사실 이 개념이 적확한지는 자신이 없다. 사전적 의미나 적용 범주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시적 성취와 시인의 비애가 비례하는지, 반비례하는지 아니라면 무관한 것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특이점이 너무 많아 일반화가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글을 시작하자마자 회의가 밀려든다. 하지만, 그냥 밀고 나가기로 한다. 어쨌든 필자가 읽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자세, 즉 ‘시 정신’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제목이 좀 거창하다 싶어도 크게 욕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체계적인 언어론을 전개한 저술은 없지만, 모리스 블랑쇼는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모든 경험의 특이성, 독자성(specificity)에 비하여 언어는 일반적, 보편적(general)인 성질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결국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운명’이 되는데, 다시 말하면 기존의 의미나 개념을 재인하는 것이 시가 아니라, 각 사건과 사물에 적절한 말을 찾아주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이는 단적(필자가 좋아하는 단상 형식으로) 아래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시를 파고들어가는 자는 모든 우상을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과 결별해야 한다. 진리를 지평선으로 삼지도 말 것이며, 미래를 그가 머무를 곳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희망을 가질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절망해야 한다. 시를 파고들어가는 자는 죽은 자이다. 심연과 같은 자신의 죽음과 해후하는 자이다”(『문학의 공간』) 사실(실제), 진리, 기대를 모두 무화(無化)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지난 호를 다시 읽으며 필자가 더불어 독자와 함께 고민하고 싶었던 질문이다.
1.
시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심지어는 광폭한) 착란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지적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면, 생활이 끊임없이 자기 위치와 역할에 대한 인식과 충실도, 즉 질서화를 요구하는 데 반해 시작(詩作)은 무질서, 아니 질서의 뒤엉킴을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현재의 나는 과거를 추억하면 할수록 경쟁에서 뒤처질 뿐이지만, 시는 현재 상황에 대한 면밀한 이해보다는 과거로의 회상으로부터 길어 올려 질 뿐이다. 시인 스스로가 오롯이 자기 위안만을 위해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경우, 이 간극은 커다란 고통, 아니 존재적 비애로까지 확장된다.
그 첫 장을 이기영 시인이 형상화하고 있다.
살면 살수록 포기는 많아지는데
왜 근심은 더 느는 것일까
처음부터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고 밀려나
자기 최면으로 헐벗은 현실을
속이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견딤보다 훨씬 잔인했을 것이다
언제 철거되는 지도 모르게 철거될 것이고
허공에 매달려 있던 때처럼
팔다리는 오래 저릴 것이다
-이기영, 「옥외계단」 부분
시인의 시선은 곧 철거가 시작될 건물의 옥외 철제 계단에 걸려 있다. 하지만 곧바로 그것이 어떤 사물을 향한 시선이 아님을 알게 된다. “신경은 모두 손상되었으나 감각만은/꿋꿋하게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통증”을 시인이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살면 살수록 포기는 많아지는데/왜 근심은 더 느는 것일까”라는 독립된 연에서 시인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정보의 근원을 감지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재귀가 쉽게 인정되지는 않겠지만, 불안이 시적으로 형상화되었다고 그 근원이 제거되거나 승화되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의 슬픔 중 하나다.
누구와도 교감할 수 없는 삶의 분주함이 몸과 정신을 닫아놓았다
한 무리의 바람이 기억 저 편을 기웃거린다
그 동안의 길들과 나에게 너무도 미안하다
이제는 헐렁이고 싶다
다 내려놓고 저들과 소통하고 싶다
눈 밝은 새벽이슬처럼 천천히 소멸되는 여유를 만들고 싶다
비밀스럽지 않은 일상에 처음으로 나를 쓰다듬으며
지난 시간에 창을 내어 간다
어디서부터 고부라진 몸인지 밤새 몸살을 앓고
그렇게 불덩이처럼 굴러다니는 몸을 추스린다
-양은선, 「퇴보 아닌 퇴보」 부분
시인은 ‘오늘도 길을 잘못 들어섰다’라는 단서 아래, 즉 ‘목적지’를 향한 ‘길’의 의미, 그것의 편리성과 효용성을 잠시 잊으면서 잘못 ‘시’의 길로 들어선 화자의 심경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누구와도 교감할 수 없는 삶의 분주함’이 바로 바로 현대인의 정확한 초상이다. 이를 보드리야르식으로 패러디하면 “끝없이 바쁘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식이 될 것이다. 몸이 분주한데 정신은 외딴 곳에서, 익명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현대인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다. 양은선 시인은 그 정황을 잘 그려내고 있다.
필자는 ‘시와 경제’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읽었지만, 사실 그것은 사회경제사나 사회문화사 같은 거시적 층위의 글들이었지, 실생활과 연결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시작도 하나의 활동이고 이것이 정신의 무한한 투자를 요구한다면 응당 그에 대한 적정한 수준의 보상도 요구될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가난하다’, 나는 아직도 이 명제의 참 뜻을 알지 못한다. 역사적으로도 이해가 안 되고, 현상적으로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가난’, ‘행복’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연봉’, ‘예금’과 같은 물질적 계량으로 치환한 놀라운 속임수에 경탄할 따름이다.
오랜만에 인세가 왔다
몽땅 찾아 재래시장으로 간다
천 원짜리 잔치국수를 후루룩 먹고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은다
손자에게 줄 왕찐빵을 하나 사고
다섯 개들이 라면 한 봉지도 산다
마지막으로 문방구에 들러
모나미 153 볼펜을 200원에 산다
내일 또 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실 만큼
돈이 남았다
한 손에 왕찐빵과 라면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볼펜을 또각대며 집으로 향한다
이 볼펜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또 인세가 올까?
볼펜 다리가 후들거린다
-오대교, 「가난한 시인」 전문
시인의 가난한 일상, 하루가 잔잔하게, 슬프게 그려져 있다. 이때 가난은 시인이 이룬 시적 성취에 비해 ‘인세’로 지칭된 보상의 부적절함 사이에서 발생한다. 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애써 인세가 온 날이 행복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비애는 이미 “마지막으로 문방구에 들러/모나미 153 볼펜을 200원”에 사는 행위에 짙게 배어 있다. 그 볼펜이 다 닳도록 시를 쓸 것인데, 인세는 또 언제 올 것인가? 필자는 답할 수 있다. 다음에, 시적 성취와 존재로서 겪는 비애의 틈새에서, 그 자양분 덕분에 오늘의 개화한 한국 현대시가 있다.
2.
시적 성취가 곧 시인의 비애를 조장하는 선제 조건인 것처럼 글이 진행되고 말았다. 앞에 언급한 블랑쇼로 되돌아 가보면,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제작한 작품의 편수나 명성과 관계없이 항상 다시 하나의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나는 내면의 결핍과 혼란을 넘어 지금 생생하게 목격하는 이 사태에 오직 그것만을 위한 ‘언어’를 창조할 수 있는가, 아니라면 그런 기대와 열망을 표출하고 있는가?
언제나 시작은 옛것을 찢고 나오는 것이기에 불안과 기대가 상존하지만, 시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억센 스프링처럼 되돌아가려는 본질과 튀어 오르려는 의지의 싸움이기에 더욱 험난할지도 모른다. 최서연 시인은 저간의 사정을 일단, 단 칼에 끊어내는 결기의 한 작품을 보여준다.
살아온 걸 돌아보면
할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했으나
밑동이 발자국 같은 겨울들판을 거닐며
맨살의 시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면 된다
남김없이 비워 낸 겨울들판에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나는,
걸친 옷을 버리기로 하였다
-최서연, 「이것이면 된다」 부분
시대적 배경의 압력 아래서 ‘명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필자는 바흐찐의 ‘담화’라 지칭할 수 없다. 그 대부분이 소통의 건강성을 이미 상실한 쑥덕임이기 때문이다) ‘건강이 안 좋은가’, ‘빛이 많은가’ 등 주변의 시선이 그려진다. 하지만 최서연 시인은 ‘이것이면 된다’라는 건강한 한 마디로 저간의 사정을 일축해버린다. 그리고 곧이어 “밑둥이 발자국 같은 겨울들판을 거닐며/맨살의 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과 포부를 드러낸다. ‘이것이면 된다’는 시인의 다짐이 구체화 되어 드러난다.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2연의 ‘배추 고갱이’와 3연의 ‘겨울들판’이 결합하면 의도하지 않은 해석의 가능성이 더 짙어진다. 즉, 차년의 싹을 위해 남겨두는 것과 단지 땅의 힘, 지력을 보강하기 위해 부러 제거하지 않은 것들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비운 자리에 가득차기 마련이므로 시적 성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산수유 나뭇가지 하나가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눈물 저 안쪽 깊은 침묵 속에는
눈물 가득한 빨간 열매들의 소리
바람이 분다
천지를 헤집는 햇빛 소리들과 함께
숨을 쉬는 소리들
눈동자 안에는 소리가 있다
산수유 나뭇가지 하나
그림자로 돋아난
-박일, 「눈동자 저 깊은 곳에는」 부분
시적 성취가 그것을 정의하는 여러 개념 층위를 뚫고 원형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설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 마땅히 사용되어야 하는 형용(형용사형 명사)어라면, ‘산수유 나뭇가지’와 ‘눈동자’의 얼 비취는, 혹은 길항하는 한 정태적 순간에 집중하는 시인의 힘은 시적 성취로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자기의 사태나 감정적 변이에 민감한 작품들보다 독자에게로 열린 창이 더 많기 때문이다. ‘눈동자 안에는 소리가 있다’는 명제 또한 쉽게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인 열망과 외적 환경의 충돌과 융합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아래층 정원에서
살금살금 하늘 줄기 타고 올라온 나팔꽃 한 송이
우리 집 베란다 창틀에 두 팔 걸치고
슬금슬금 내실을 살핀다
고것 참 이상도 하다
우리 집엔 소녀도 처녀도 없는데
꽃등 위에 엎드려 며칠을 속살거리던 햇살
오늘 그 햇살의 아이들이 색색의 입술로
하늘하늘 손 흔들며
우리 집 창틀에 매달려 하얗게 웃고 있다
-이영춘, 「월담」 전문
아마 이 우주에 자연스러운 사건은 무한하겠지만, 당연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자연적 사건이란 인과적이지만, 당연한 일처럼 보이는 사건이란 사실은 추후 인정된 인지, 인식의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영춘 시인의 작품은 전혀 색다를 것 같지 않은 아주 조그만 사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시인의 거소가 몇 층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지상에서 출발한 나팔꽃 한 줄기가 허공을 타고 올라와 ‘소녀도 처녀도 없는’ 공간을 ‘슬금슬금’ 살피는 ‘하얗게’ 웃을 소극(笑劇)을 그려 보여준다. 밝은 작품은 결국 시어의 밝음이 아니라 시각의 밝음에서 기원한다. ‘월담’이라니, 아니 차라리 시인이 자기 공간(내실) 밖으로 흘러넘침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시적 성취와 시인의 비애, 여러 층위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소수의 시인을 제외하고 모든 시인은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염려스러운 것은 소수의 시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허무주의자라는 것이다. 기술적 발전을 추수하거나, 회고적 의장에 붙들려 있거나, 시 정신에 대한 감각을 잃고 있다.
미셸 라공의 한마로 이 글의 맺는다.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 당연히 시(예술)의 미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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