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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산문/김영식/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사잇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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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3,018회 작성일 15-07-0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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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망우리공원의 인문학길 사잇길을 가다.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 가요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 가요~”

뭐라고? 청계천 평화시장 앞의 버스정거장에서 귀가 버스를 기다리던 김재복 씨는 가슴이 덜컹했다. 조금 전에 도착한 버스의 안내양이 외치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버스의 행선지 안내판을 읽어보니 그제야 안내양의 말이 바로 들리기 시작했다.

청량리, 중랑교, 망우리 가요~”

직장을 찾아 가족을 데리고 상경한 지 십여 년. 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가출하여 대구와 부산을 전전하며 배운 일이 요코(횡편기) 기술이라 그 경험으로 서울에 올라와 변두리 상봉동에 작은 공장을 차렸지만, 그것도 사업이라고 흥보다 망이 많았다. 좀 팔린다 싶었어도 평화시장의 도매상은 전국 소매상의 반품을 몇 달 후에 전량 공장으로 떠넘겼으니 대박이 연달아 터지지 않는 한 구조적으로 늘 앞에서 남고 뒤에서 밑졌다. 늘어난 빚에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시장 뒷골목 포장마차에서 곱창과 소주 반병을 먹고 귀가 버스를 기다리던 그에게 버스 안내양의 외침은 그렇게 들려왔다.

만원버스에 실려 가는 길, 동대문을 지나니 왼쪽으로 작은 산을 뒤덮은 판잣집 동네가 보였다. 고향 동해의 갯바위에 다닥다닥 뒤덮인 따개비가 생각났다. 중랑교 밑으로는 시커먼 하천이 한강으로 흘러가고 그 둑방에도 판잣집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동네 입구 정거장에 내려 언뜻 쳐다본 망우리묘지는 달빛 아래 희뿌옇게 보였다…….

그 시절, 고인의 동네인 시립망우리공동묘지도 산 자의 동네와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복 씨의 아들 식()이 대학생 때 올라가 본 망우리묘지에는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산등성이에 누런 풀을 산발한 무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은 몇 가지 풍경. 가난 때문에 돌 대신 세워진 비목에는 아버님 잠드신 곳이라는 검은 색 페인트 글이 풍상에 바래지고, 일찍 죽은 아들을 기리는 아담한 사각 비석에는 구름이 흘러도 비가 내려도 너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아 있으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어느 무덤 앞에 소주병을 옆에 놓고 고개 숙인 청년은 무슨 사연에 여기 왔던가…….

그 때, 대개의 삶이 괴로웠기에 대개의 죽음 또한 슬펐다. 산 자의 동네가 그러했듯, 죽은 자의 동네 망우리도 그렇게 오랫동안 식이의 기억 속에 황량하고 슬픈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묘지에서 공원으로

자식들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킨 후 재복 씨는 아들의 결혼도 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고난의 속세를 떠났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은 흘러 중년이 된 아들은 어느 여름날에 옛 기억의 망우리공동묘지를 다시 찾았다. 생업의 틈틈이 글도 쓰는 아들은 망우리에 대한 산문 하나 써보고 싶었다.

망우리묘지에 찾아온 식이는 매우 놀랐다. 망우리는 묘지에서 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지 오래, 관리사무소에서는 묘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옛날의 황량한 모습은 사라지고 울창한 나무와 숲 그리고 꽃들이 그를 맞이하였다. 아스콘으로 포장된 4.7킬로의 순환로 곳곳에는 한용운, 박인환, 방정환 등 유명인사의 연보비가 세워져 있었다.

달동네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중랑천에도 고기가 다시 잡히고 발전의 상징으로 착각했던 청계고가도로도 없어졌고 제일 높았던 삼일빌딩을 이제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서울은 많이 변했다. 아버지는 한 달에 이틀밖에 쉬지 않아 낮잠 자기 바빴지만 지금의 아들은 주말에는 산에 가거나 영화관을 찾는 여유까지 누리고 있는데, 어찌 망우리는 옛날의 고정관념에 머물러 있었던가.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는데 여기는 왜 바뀌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망우리에는 1933년의 개장 시부터 1973년의 폐장 시까지의 40년 동안, 마치 역사의 한 부분을 액자처럼 잘라낸 기간을 살다간 근현대사의 주역들이 한데 모여 있지 않은가. 식이도 망우리에 한용운과 박인환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중섭, 방정환, 지석영 등의 유명인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더구나 과거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조봉암, 함세덕, 최학송 등의 인물도 이제는 어엿하게 비명을 통해 그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근현대사의 보고망우리공원

식이의 주말은 바빠졌다. 토요일에는 공원에서 신발에 아침이슬을 적시며 새로운 비명을 찾고 일요일에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았다. 인터넷 검색에 누가 망우리에 묻혔다는 단서를 찾으면 그 주말에는 망우리공원으로 달려가 관리사무소에서 복사해 준 지도를 들고 숲을 헤매었다.

그런 삼 년간의 결실로, 기존 유명인사 외로 망우리에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 유족 외로는 아무도 몰랐던 인물까지 망라하여 망우리별곡이라는 제명으로 망우리의 근현대 인물사가 잡지 신동아에 연재되었고, 다음 해에는 그 글들이 묶여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비명으로 읽는 근현대인물사라는 한 권의 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다음에 열거한 인물들은, 알고 보니 대부분 각 분야에서 최초, 당대 최고의 수식어가 붙는, 우리 근현대사의 선구자들이었다.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탈출기’ ‘홍염이 교과서에 실린 해금 작가 최학송, ‘백치 아다다의 소설가 계용묵, 근대 유화가 1, 2위로 꼽히는 이인성과 이중섭, 근대 최고의 조각가로 부각된 권진규, 좌우를 통합한 정치가의 이상 조봉암, 백범 김구의 측근으로 조용히 서민의 묘에 묻혔던 박찬익(묘터), 당대 최고의 서화가 오세창, 어린이의 아버지 방정환, 독립지사요 시인인 한용운, 최초의 오빠였던 가수 차중락, 최초의 피부과 의사로 최초의 세브란스의전 한국인 교장 오긍선, 종두법을 도입하고 최초의 국립의대 교장을 지낸 지석영, 동아일보의 초대 주필 장덕수, 한국학의 선구자 문일평, 민속학의 원조 송석하(묘터), 조선의 민예를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식목일을 제정하고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심은 총독부 초대 산림과장 사이토 오토사쿠, 도산 안창호(묘터)와 그의 비서 유상규, 희곡 동승의 함세덕, 지금의 맞춤법에 대항했던 변호사 박승빈, 해방 정국 좌우 갈등의 희생자 삼학병(三學兵),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 최초의 홈런 타자 이영민(묘터), 음악영화 밤하늘의 부르스를 만든 비운의 감독 노필…….

이러한 인물의 이야기가, 또 인물끼리 얽힌 이야기가 망우리공원에 있었다. 어떤 인물은 이장되었지만 그럼에도 묘터에 남은 오래된 비석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국립묘지와는 달리 이곳 시민의 공동묘지에는 좌익과 우익, 독립지사와 친일파가 한데 모여 있고, 직업도 다양하며 일본인도 있고 무명의 서민도 함께 있다. 그래서 이곳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국립묘지)가 아닐까.

 

그와 나 사이를 걷다

최근 각 지자체는 어떤 유명인과의 지푸라기 같은 인연 하나라도 찾아내면 그곳을 문화명소로 만들고 있다. 잠시 살았던 집의 문화재 지정은 당연하고, 그 흔적이 없으면 당장 복원이다. 고향은 물론이고 잠시 머물던 곳에도 기념관을 세운다. 그렇다면 여기 한데 모인 수십 명의 유명인이 수십 년간 비문을 통해 생생하게 그의 말과 체취를 전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이곳은 왜 문화재가 되지 못할까. 한민족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고통스럽고 격동적인 시기의 다양한 자취가 여기에 오롯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망우리공원은 이제 산책과 등산의 명소이고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이며 시내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전망대일 뿐 아니라, 이 땅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우리 근현대 역사와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으로 거듭났다. 세계 어느 곳에 이렇게 산책과 공부와 사색과 치유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공원이 있었던가.

제주도에 올레길이, 지리산과 북한산에 둘레길이 있다면 이곳 망우리공원에는 사잇길이 있다. 망우리공원의 능선 길을 걸어가면, 멋진 경관 속의 산책은 기본이고 삶과 죽음의 사이, 과거와 현재, 고인과 나 사이의 길을 가게 되니 이곳은 가히 최고의 인문학 코스라 할 수 있다. 죽음은 인문학 최후의 최고의 화두이다.

 

이제는 즐기러 망우리 가요

토요일 오후, 아들은 상봉역에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망우리공원으로 간다. 오늘도 답사 안내를 하러 가는 길. 시작은 미약하여 어느 비 오는 날에는 단 한 명을 데리고 답사를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민간단체의 프로그램도 운영되어 많으면 매주, 적어도 한 달에 두어 번은 가게 된다. 버스는 아들이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지나쳐 간다. 탄가루 날리던 삼표연탄 공장 대신에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다. 그 근처에 그가 살던 집이 있었다.

방안에는 아버지와 공원들이 술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날은 월급날이었고 아버지는 공원들에게 월급을 다 주지 못해 술을 먹고 울먹였다. 공원들은 망연히 아버지를 쳐다보며 술잔을 기울일 뿐…….

아들은 망우리공원을 찾아다니며 아버지와 그 세대를 생각했고 조부, 증조부 세대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단재 신채호는 말했다. 그 역사라는 것은 단지 독립지사만이 아니라 좌익도 친일파도 포함되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모두가 우리의 조상이니 그들 모두는 우리의 빛과 그림자이다. 솔직히 말해 1987년 이전에는 누가 감히 망우리공원의 함세덕과 최학송, 그리고 삼학병을 글로 쓸 수 있었겠는가. 조봉암의 비석에는 아무런 글도 새길 수 없었다. 어느 고인의 유족은 오랫동안 비석을 세우지 못했다. 지금은 남의 비석을 깨부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우리는 이제 조상 모두를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망우(忘憂)’가 다시 원래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동구릉에 장지를 정하고 지금의 망우 고개에서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고 하여 붙여진 그 명칭은 조상들에게 영예롭게 받들어져 오랫동안 전승되고 있었다. 차마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삶의 한이 많았던 시절, 누구에게도 망우리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찬찬히 우리 주위의 역사적 자취를 돌보고 가꿀 때가 왔다. 고난의 시기에 잃어버렸던 망우의 참뜻이 다양한 죽음을 모두 받아들이며 다시 살아났다. 이곳의 능선에 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저곳 시내에서의 고생도 욕심도 증오도 잊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인과의 대화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죽음을 마주하여 삶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이렇게 망우리공원에는 삶의 기운이 넘치고 있다.

식이는 오늘도 사람들을 이끌고 망우리공원의 사잇길을 걸어간다. 왼쪽으로는 한강이, 오른쪽으로는 중랑천과 남산이 보이는 그 길을 가며 고인의 삶과 그 시대를, 함께 묻힌 고인끼리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박인환의 묘에서는 시노래 세월이 가면, 방정환의 묘에서는 오빠 생각, 차중락의 묘에서는 낙엽 따라 가 버린 사랑을 함께 듣는다.

봄날에는 향긋한 벚꽃 이파리 날리고 여름에는 무성한 나무숲 아래 시원한 그늘이 진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낙엽이 바람에 떨어지며 겨울에는 흰 눈이 온 공원을 살포시 덮는다. 언제 찾아가도 사시사철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 사잇길……. 이제는 즐기러 망우리 가요. 낙이망우(樂而忘憂)!

 

낙이망우(樂而忘憂):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노지장지운이). 배움을 좋아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깨달음을 얻어) 즐거이 근심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논어 술이편 제18).

 

 

김영식 - 수필가·번역가. 중앙대 일문과졸. 2002[계간리토피아] 신인상(수필). 역서로 <라쇼몽><기러기><무사시노 외> 등이 있고 저서로는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2009년 문광부 우수도서)가 있다. 201212월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꼭 지키고 싶은 우리 문화유산> 공모에서 망우리역사문화숲길로 산림청장상을, 20131월에는 리토피아문학상, 201312월에는 서울연구원의 서울스토리텔러 대상을 받았다. 올해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망우리공원의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문의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홈페이지(http://www.nationaltru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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