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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백인덕/시의 안과 밖에 대한 어떤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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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백인덕
시의 안과 밖에 대한 어떤 사유
-지난호 다시 읽기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에서 ‘의미’란 시적 ‘의장(儀狀)’보다 중요하다. 물론 모더니즘의 극단적 이론가들은 이를 뒤집어 말하겠지만, 그것은 시의 ‘본질적’ 의미, 또는 가치를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을 향한 것이고 시(작품)가 활발하게 살아 뛰어다니는 현장에는 적절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어쨌든 시적 의미의 중요성은 기법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되는 추세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의미가 생성되는 지점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지적하거나 확정하기에는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물론 필자의 머리에서 여러 논리가 충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 작품 읽기에서도 때에 따라 다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는 시 장르의 특성에서 기인한 부분도 작지 않다. 시적 의미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시인이 ‘기입’하는 것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것으로 나아가 언어 자체가 충돌하면서 생성되는 것이란 방향으로 이해의 지평을 넓혀 왔다. 이는 현대시의 발전 방향과도 맥을 같이 한다. 여러 글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지만, 필자는 발전이란 전에 것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무엇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같은 신소재의 시대에 사람들이 오히려 흙이나 나무집을 선호하는 경향과도 맞닿아 있다. 발전이란 선택지가 하나 더 느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바람직하다.
아직 섣부른 생각이지만, 필자는 기입과 발견, 생성이란 시적 의미의 발생 요인에 ‘작동’이란 개념을 추가하고자 한다. 작동이란 한 동력원, 즉 사건의 핵심 인자(因子)가 외부의 자극이나 영향 이전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결과가 동작의 배경, 또는 환경과의 긴밀한 연관성 없이 이해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생성과는 다른 방향을 지시한다. 결국 유의미한 사건이 되려면 그 작동이 이해될 수 있는 배경이 불가피하게 요청된다는 것이다.
1.
한국 시단의 풍성함에 비추어 봤을 때, 『아라문학』 지난 호, 즉 2014년 겨울호는 쿵쾅거리는 장강(長江)에 합류한 작은 물줄기 정도의 위세와 소리를 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현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아무리 큰 강이라 해도 그 발원지를 찾아 올라가보면 얼마나 소박한, 아니 조촐한 샘에서 출발했는지 정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는가. 더불어 한국현대시라고 해도 그 발원을 더듬어 찾아가면 결국은 소박한 몇 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지 않았던가? 현상은 그대로 이해하면 될 뿐, 그 위상과 가치를 따지다 본령을 놓지는 것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시적 의미의 새롭게 하는 전략으로서 작동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때, 눈에 띄는 몇 편의 작품이 있다. 그 중에서 먼저 김설희 시인의 경우로 시작한다.
그 집에는 무엇이 있는지 때가 되면 사람들이 떼로 몰린다
임시로 맛있는 집 임시로 들락거리는 사람들
임시로 반가운 악수 임시로 벗어놓은 신발들이 임시로 북적인다
임시로 살고 있는 지구에
인간들이 풀들이 해가 달이 짐승들이 꽃이 바람이
임시로 맛있는 집안처럼 임시로 거처하는 지금
우주의 손바닥 위를 임시로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금속 저금통 안에 동전처럼 소란스럽다
임시로 맛있는 집이 진짜로 맛있는 집이 돼도
영원히 임시가 아닌 발밑이 흙이 그 속에 소란함이 진짜가 되어도
-김설희, 「임시로 맛있는 집」 부분
이 작품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임시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시의 전반부에 ‘임시로’가 붙게 된 사연이 적절하게 진술되어 있다. 사연인즉 “신축공사로 그 집이 뜯겨버렸다/길 앞 다른 건물에 간판 대신 현수막이 걸려 있다//임시로 맛있는 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시인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한 마디를 빌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임시로 맛있으면 언제쯤 제대로 맛있는 집이란 말인가/맛있는 집으로 완성되면 임시는 무엇으로 변할까”라는 사뭇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이 존재론적인 것은 인용부분에서 드러나듯이 “임시로 살고 있는 지구에/인간들이 풀들이 해가 달이 짐승들이 꽃이 바람이” 임시로 맛있는 집처럼 북적대고 있다는 데까지 사유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며 모멘트가 시인의 실제 가벼운 체험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각적 발견이 유추를 통해 한 편의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재미있는 점은 ‘맛집’은 ‘임시로/제대로’의 대립 항으로 설정될 수 있지만, ‘인간들’은 ‘임시로/영원히’의 절대적 간극으로 밖에 설 수 없다는 점이 작품 속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즉 임시로 사는 지구에서 그가 영원한 무엇으로 변형된다면 불행하게도 그의 임시로는 제대로가 아니라 무화(無化) 되어버린다는 비극적 숙명성에 대한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나아가 그 임시의 발걸음 속에서도 “금속 저금통 안에 동전처럼 소란스럽다”는 현실 세태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락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박하리 시인의 작품은 집짓기의 달인 ‘거미’를 통해 앞의 인용시가 보여 준 세계와 유사한 새로운 차원의 시적 의미를 작동시키고 있다.
바람 부는 날 태양은 넘어가고 집을 짓는다. 그를 감싸고 있는 보
송한 허물을 벗고 매일 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함
께 걸으며 집을 짓는다. 네온사인 빛이 흔들리면 흐느적거리고, 무
리 지어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며, 그 속으로 섞여 들어
가 집을 짓는다. 달려드는 자동차의 강렬한 불빛에 눈을 감는다. 감
으며 걷는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걸으며 짓는다. 등 뒤
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
문득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콩콩거리며 되돌아간 거리에도
사람은 없다. 꿈틀거리던 근육에 통증이 온다. 멈춰선 다리 버리고
가로수에 몸을 날린다. 이 쪽 저 쪽 거미줄을 날리며 집을 짓는다.
집에 빠진다. 거미줄에 걸려 퍼덕인다. 퍼덕이면서 친친 얽는다. 모
두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박하리, 「변형 거미」 부분
거미, 작품에서 지시한바 그대로 ‘변형 거미’는 ‘보송한 허물을 벗’는 탈피의 순간부터 일생을 집을 짓는데 소비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일생이란 집을 짓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변형거미의 집짓기는 “무리 지어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며,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기도 한다. 이 무리 속에서 집짓기는 끝내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라는 극한의 지경까지 이르고 만다. 그러다 “집에 빠진다. 거미줄에 걸려 퍼덕”이면서 집짓기는 막을 내린다. 거미의 생태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진술들이 작품의 후반부를 형성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 거미는 거미가 아니다 라는 의문을 솟아나게 한다.
상식의 차원에서 거미에게 집은 그의 안식처이자 생존의 터전이며 또한 그의 길이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집은 그와 똑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말 필요 없이 오늘의 현실은 사람들 스스로 거미처럼 자신을 인식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결국 이 작품의 ‘변형 거미’는 거미의 일종이 아니라 ‘변형된 인간’의 상징이 된다.
김설하, 박하리 두 시인의 발견이 미학적으로 대단한 것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과 시대를 시적 의미의 지평으로 개시(開示)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시를 의미적으로 작동시키는 새로운 전략의 일단이라고는 할 수 있다.
2.
시적 의미의 작동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기존의 개념과 형식의 틀 안에 위치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새롭거나 혁신을 표방한 작품은 그 스스로 이해의 폭을 제한함으로써 그것이 함축한 새로움을 단지 기괴한, 난폭한, 미친과 같은 협소한 틀 안에 가둬버릴 위험을 자체적으로 내포하기 때문이다.
유목의 냄새가 나는 어둠 속에서
그리움도 빛이 될까 빛이 그리움이듯이
이제 막,
타클라마칸을 건너 온 낙타가 들어서고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내게도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뼈들은 새삼 깜박인다
어둠도
불빛도
뼈들도
밀폐된 공간도
이제는 모두가 낯설지 않다
바람이 읽고 가는 경전처럼
나부끼는 깃발처럼
타르쵸,
비로소 나는 당신을 만난다
-이 명, 「지하 주차장 노마드」 부분
이명 시인의 ‘노마드’는 현대의 도시를 인공의 사막으로 직접 경험하는 현대인의 생생한 체험 속에 가로놓여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공간이 ‘지하 주차장’이라는 것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시인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이제 막,/타클라마칸을 건너 온 낙타가 들어서고/기억들이 되살아나고/내게도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뼈들은 새삼 깜박인다”는 역발상(逆發想)을 보여준다. 이 역발상은 결국 지상에서의 생활이란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 인식적 근거가 없다는 이 작품은 폐쇄애착증(?) 정도로 폄훼되고 말 것이다.
홀로 남아 덜컹거리는 길 기억해 주세요 아직도 할 말이 남은 메모
지에 멀리 가지 못하는 발자국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께요 밋밋해지
기를 방관자의 혀에 대해서 잠시 움직이지만 흘러가지는 않아요 가
끔 열려있는 담벼락에 당신에게 말 못하는 소리 삼키거나 뒤늦게 뱉
어버리는 일 같을 순 없지요 불안하다고 지적하는 내 문장은 조금은
더디게 골목을 돌아다닐 뿐 평등하다고 착각하는 당신의 얼굴이 문
제죠 습관처럼 오랜 쓰라림으로 염증이 솟아나지만 당신과 다르다
는 것으로 위안으로 할께요 공평하지 않는 문장에 난 사소한 분쟁을
일으킬 힘이 없다는 것 비릿한 하늘을 뜯어낼 때마다 당신은 튼튼한
심장을 가졌구요 당신의 입김이 나를 지우고 생각할 만큼 적당한 이
유를 품고 있다면 괜찮아요 떠나간 만큼 씩씩하게 자라는 상처로 철
들게 하니까요 사라지는 말들이 자꾸 이름을 불러요
-하두자, 「다시 비주류에 대한 슬픔」 전문
말과 문자, 그리고 존재는 시인에게 있어 공기와 햇볕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 정상적인 상태, 시에서는 ‘평등’이라는 어휘로 대체되고 있지만, 즉 안정된 상황 아래서는 시인은 그것의 위력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한히 결집하거나 희박해지는 공기 안에서, 또는 마구 쏟아지거나 거의 비추지 않는 햇살 아래에서는 불안이 아니라 공포감에 휩쌓일 수밖에 없다. 하두자 시인은 “공평하지 않는 문장에 난 사소한 분쟁을 일으킬 힘이 업다”고 순순히 토로하고 있지만, 사실 시인은 당신의 ‘튼튼한 심장’ 앞에서 “비릿한 하늘을 뜯어낼” 힘과 용기를 가졌다. 이는 ‘비주류’에 대한 새로운 정의인 셈이다.
안타가운 시간만 가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만 있네.
지난 시절들이 이렇게 선명한데
쏜살같던 세월이 안개 속에 빠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숲길도 그렇고 이따금 들리는 물소리도 그렇고
광채도 부처의 가르침도 경이롭기만 하지만
그대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네.
-김광기, 「광교산 자락」 부분
김광기 시인은 지금 ‘광교산 자락’에서 “안타까운 시간만 가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만 있네”라면 서정의 한 자락을 풀어놓는다. 아마도 그 산자락에 그 때의 꽃들이 다시 활짝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정작 새롭게 읽히는 것은 “숲길도 그렇고 이따금 들리는 물소리도 그렇고/광채도 부처의 가르침도 경이롭기만 하지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나간 “그대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네”라는 자기 고백에 있다. 즉, 외부로부터 오는 ‘경이’와 내 안에서 일어서는 ‘정조’가 서로 겨루는 것인데, 심회가 외물을 지우고 있다. 이 또한 하나의 역전(逆轉)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마드’, ‘비주류’, ‘역전’은 오늘의 시인들이 기존의 개념과 형식의 의미망 속에서 시적 의미를 새롭게 작동시키기 위해 취하는 일종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우리 시에 충격을 가한다면 그 내파(內破)하는 힘으로 우리 시가 더욱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 다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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