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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포럼/강인봉/시詩와 선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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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포럼
강인봉
시詩와 선禪
그때 우리들 정문을 나서고 있을 때
이윽고 노을에 젖은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음악은
恩惠를 아는 사람들의 작은 날개라고.
저 한없이 波紋이 밀리던 눈빛들이
그랬던가,
바람은 끊임없이 와 나의 체온을 뒤적이고
나는 江가에 섰다.
지금도 둑길을 건너서면
우리들 갈꽃 같은 生涯여
어려서 시집간 운자 누나를 생각한다
생각 생각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山을 넘어야 별은 뜨는가
비로소 그 소녀들이 사는
그 긴 가능성의 철길을,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애증의 깊은 窓을 지니고
서서히 이동하는 江이여.
파도가 두어 칸 창문을 흔들고 지나면
漁夫만 몇 사람 그물을 던지고 있는가.
건져도 건져도
거기 단 하나 남는
우리들 오랜 아픔의 빛을.
저 수천수만의 은행알들이
노오란 종소리를 마주 치는 날
마침내 그 곤한 音樂이 되기에는 아직
고향은 없지만
오늘도 나는 먼 산길을 간다.
이것은 <노을>이라는 나의 졸작拙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린 시집《첫사랑》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어 본인이 직접 말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그것부터 잠깐 한 마디 들려드릴까 합니다. 20여 년 전 MBC 라디오에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라는 아침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어느 한 주부가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고 온 남편이 경대 위에 놓여 있는 ‘첫사랑 강인봉’이란 메모지를 보더니 한다는 말이,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첫사랑을 못 잊고 있느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그게 아니라, 친정에 갔더니 첫사랑이라는 시집이 있어 읽어보니 시가 참 좋아서 나도 한 권 사보려고 메모를 한 것이다.”고 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나한테서 선禪 공부를 하던 경희대 한의학과 박경모 학생이 일부러 찾아와서 한 말입니다. 어디를 가려고 버스터미널에서 차 시간을 기다리다 라디오를 들었다며 딴에는 반갑게 전해준 말인데, 나는 그저 본정도 없이 시큰둥하게 들었던 기억입니다. 왜였을까? 더구나 그 시집은 어느 문예지의 유명한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시를 잠시 내려놓고 소설을 쓰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이제 돌이켜보면 시는 어떤 감성을 입고자 하고, 선은 그 감성을 벗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 그 ‘시와 선’을 주제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려고 했지만, 굳이 여러 설명을 구구하게 늘어놓느니보다는 차라리 나의 경험을 통해 그 시와 선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절실하고 효과적이겠다 싶어 이리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맨 처음 시라는 것을 꼭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전주영생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히 한 문학소녀를 알고부터였습니다. 그때 나는 뭔가를 한번 찾아본답시고 친구와 둘이서 무전여행無錢旅行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전여행이란, 말 그대로 돈 없이 하는 여행이었는데 1960년대에는 여름방학의 이 여행이 한창 극성을 떨며 유행되었습니다.
그 지독한 폭염이 푹푹 끓여대고 있는 아스팔트길을 터벅터벅 걷기도 하고, 때로는 도둑열차를 타고 다니며 다른 지방의 색다른 풍물들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래도 어딜 가나 대체로 인심만은 시원했습니다. 특히 부여에서 후한 대접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어느 인자한 할아버지의 원두막에서 참외를 실컷 얻어먹고 모깃불을 놓아가며 밤을 새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에서 우리는 찬밥 한 덩어리도 얻어먹질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는 왁자지껄 몰려 있는 사람들의 벽을 뚫고 들어가 마침내 못 볼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열차에 치여 죽은 거지 노파의 시체였는데, 배 터진 개구리처럼 창자가 모두 쏟아져 나와 있었습니다. 그 주검을 보고는 내내 시무룩해지며 친구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자고.
그리하여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중앙선 도둑열차를 탔습니다. 아, 지금도 나는 그 열차 속에서 차창으로 본 노을녘 해운대의 파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문학소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웬 예쁘장한 소녀가 흘낏흘낏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나는 몇 번이고 의식하면서 스스로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맸습니다. 더구나 그 소녀에게는 두 명의 남학생 동행인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두 명의 남학생과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녀는 얘기 중에 무슨 웃을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화장실에 갔다 오니 친구 녀석과 그 두 명의 남학생이 서로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영문을 몰라서 소녀와 나는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리만은 합석이 되었으니 어쨌거나 참 잘된 일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친구 녀석과 그 두 명의 남학생은 중학교 동창생이라는 것이었고, 더구나 그들도 실은 우리처럼 무전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일행은 네 명, 그 소녀까지 다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시시한 학교 얘기, 무전여행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얘기들이 끝나자 열차는 어느덧 영천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내렸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대전까지 가서 다시 호남선 도둑차를 타고 집에 가려면, 여기서 대구행 열차를 바꿔 타고 대구에 가서 경부선 상행 열차를 타야 했던 것입니다. 마침 소녀도 대구까지 가는 모양이었습니다. 플랫폼에 내려서도 그들은 다시 그 시시한 학교 얘기, 무전여행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얘기들을 되풀이하고 있었고, 나는 다소 떨어져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왜 혼자 서 계셔예?”
그때 소녀가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오며 처음으로 말을 거는 것이었다. 눈이 퍽 고운 소녀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밤바람이 무, 무척 시원하군요.”
더듬거리며 나는 말했습니다. 밤도 이미 어지간히 깊어 있었습니다.
“전주는 옛 모습 그대로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어예.”
소녀는 뭔가 자꾸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그 표준말에다 약간 경상도 사투리를 섞은 말씨가 참 듣기 좋았습니다.
“집은 대구입니까?”
“아니라예.”
“…그럼?”
그때 마이크에서, 대구행 열차가 한 시간 가량 연착된다는 소리가 울려왔습니다. 주위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대구에 도착되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박수라도 치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한 시간 가량을 더 연장해서 소녀와 정담을 주고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녀도 결코 그 연착에 대해서 그다지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이심전심이랄까, 오히려 나를 향해 살짝 웃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집은예 이 영천이라예.”
“그럼 왜 대구에?”
“대구에서 자취를 하지예.”
학교는 효성여고 2학년, 이름은 윤명희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 일행 다섯 명은 자연스럽게 두 패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한 패는 친구 녀석을 포함한 그들 세 명이었고, 한 패는 나와 그 소녀였습니다. 이윽고 대구행 열차가 왔고, 마침 두 사람만 앉을 빈자리가 있어 우리는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쪽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앉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자기들의 공주님을 내게 빼앗겨 사실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끔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와서 나눠주고 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마음 놓고 소녀의 여러 능금빛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깨에 날개를 단 기분이었습니다. 훨훨 날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소녀의 그 아랫볼에 박혀 있는 까만 점이 퍽 인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꿈은 뭐예요?”
소녀가 문득 나의 꿈을 물었습니다.
“글쎄요.”
난처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꿈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차마 말하기가 좀 쑥스러울 뿐이었지. 그때 나의 꿈은 유명한 복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장 체육관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소녀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래예? 그러나 제 눈에는 스포츠맨답지 않게 아주 순진하게 보여예. 저는 처음엔 문학을 하시는 분인 줄 알았어예.”
“그럼, 그쪽의 꿈은 무엇입니까?”
“저는 문학이라예. 잘은 못 쓰지만 시를 쓰지예.”
“나하곤 아주 대조적이군요.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러긴 그러예.”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무래도 풀이 죽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그 문학 때문에 나와 한 패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녀가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건 아주 하찮은 것이지만 제가 손수 만든 것이고, 그리고…… 받아 주이소.”
파란 색실로 짠 만년필 주머니였습니다. 나는 너무도 황송한 마음이어서 그걸 사양했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냥 넣어두십시오.”
그러자 소녀의 그 유난히 하얀 얼굴이 금세 확 붉어졌습니다.
“아니라예. 받아주이소.”
그래서 나는 황홀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간직하겠다며 받았는데, 지금도 그것은 내 서재의 책상 서랍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나도 뭔가 한 가지 주고 싶어서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그러나 줄 만한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여의 부소산 군창터에서 캐낸 쌀․보리․콩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때 전쟁 속에서 창고에 불이 붙어 재가 된 곡식들인데, 기념으로 그 까만 것들을 종이에 담아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하찮은 것이지만,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군요. 이것이라도 보답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소녀는 순순히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문득 표정이 활짝 밝아졌습니다.
“고마워예. 시를 한번 써볼 생각은 없능교?”
“…….”
“시를 꼭 한번 권해보고 싶은 기라예. 그까짓 운동은 뭐 하러 하능교? 괜히 몸만 다치지. 그것은 순전히 싸움이라예. 시는 그 반대가 아니겠능교? 그것은 이제 그만 치우고 시나 한번 써보시라예.”
그때 그들이 모두 배낭을 짊어지고 우리의 곁으로 몰려왔습니다. 이제 곧 대구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구역에 내리니 시간은 역시 12시가 훨씬 넘어 있었습니다.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밤이었습니다. 걸어가면서 소녀는 신성일이 다녔다는 경북고등학교며 여러 큰 건물들의 이름을 내게 알려 주었고 그리고, 그리고 소녀와 나는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내 안에선 무엇인가 아프게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꼭 한번 그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태고의 얼을 지녀온 달
달은,
잿빛 울타리 너머로
하얀 박꽃 미소를 피운다.
한 조각 남은 구름 사이로
넌지시 내다보는
눈망울.
호수처럼 말갛게 일렁이는
거울 안으로
바람은 여리게 부서진다.
긴 밤을 포옹하는
그 은색
그윽한 입김,
아득한 지하에도
가만히 흘러내리는 한 줄기의
샘물이여.
그리움이 여문 꿈의 내실에
은은한 울림으로 나래를 접는
그 회향의 시점을 딛고
밤을 재운다.
이것이 바로 그 다음해 어느 한 노시인老詩人을 만나 마침내 쓰게 된 <달>이라는 시입니다. 더구나 이 시는 도교육위원회가 주최하는 도내 중․고등학생 백일장에서 생각지도 않게 입상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학교 선배들을 따라 그곳에 나갔다가 나만 혼자 우연히 입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맨 처음 받아보는 문학의 상인지라 나는 실로 감개무량했습니다. 한번 이렇게 재미를 들인 나는 그 뒤부터는 많은 전국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고, 학교에서도 문예장학생의 혜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인은 말했습니다.
“상 받는다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신석정辛夕汀. 만약 그 시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나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내가 전생의 무슨 복으로 그 시인의 그 큰 사랑을 받았을까.
내가 그 시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67년 4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가 가끔 ‘시 같은 걸’ 끼적이는 것을 본 같은 방의 하숙생이 한사코 자기 학교의 신석정 시인을 한번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길 권했는데, 그는 과연 대가답게 고고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이었습니다. 그 웅장한 모습도 산이고, 코가 우뚝한 얼굴의 생김새도 산이고, 인자한 마음씨도 산이고, 목소리까지 우렁우렁 산울림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들 그를 목가시인牧歌詩人 혹은 전원시인田園詩人이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길거리에서 거지나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더럽고 밉게 보지 않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시詩인 것이다.”
이것이 그 시인의 맨 첫 번째 가르침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은 언제나 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 가르침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살아왔습니다. 여태 내가 살아오던 세상과는 얼마나 판이한 인간 저쪽의 목소리인가. 나는 결국 그 한 마디의 말에 매료되어 그에게 입문을 하게 되었고, 그는 61세의 노구로 전주상고의 국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전북대학교와 전주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는 터라 늘 피곤했는데도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인 나를 기꺼이 받아주었습니다.
“너는 인간성이 좋고 머리가 영리해서 소질을 일찍 발견했느니라.”
나는 먼저 그 시인에게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나의 과거를 낱낱이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나는 챔피언의 꿈을 못 버리고 체육관에 가서 살다시피 운동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내가 시를 다 쓰겠다니.
하지만 나는 그 시인의 그윽한 눈길 속에서 무기교의 기교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인의 가르침은 그대로 전원의 모든 숨소리였습니다. 나는 매일 밤 그 시인의 집에 찾아가 밤이 깊도록 그의 여윈 등과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습니다. 한 산을 주무르고 있었습니다.
“잘 쓴다. 김제 촌놈이 시를 아주 잘 써. 나는 이 시 속에서 네 마음을 읽느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시가 아주 어려울 것이니 그런 줄로 알고 있거라.”
이렇게 나는 그 시인으로부터 매일 밤 12시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은혜를 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그 시인으로부터 칭찬받는 재미로 더욱더 시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어서 열심히 공부해서 큰 시인이 되어 기쁨을 드리겠노라고 수없이 나는 다짐을 했습니다.
“너는 이제 공부를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이 책만 다 읽으면 아주 좋을 것이다. 항아리에 물이 가득히 담겨 있어야 술을 빚든, 차를 끓이든, 밥을 짓든 할 게 아니냐. 많은 인생을 알아야 하느니라. 학교에서 못 보게 하는 영화도 많이 보거라.”
어느 날 그 시인은 내게 세계적인 대가들의 작품을 손수 적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덧 그 시인은 내 삶의 전부였습니다. 아, 언제 내가 그토록 한 인간을 가슴속 깊이 존경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시인은 종종 몸이 잘 아팠는데, 그럴 땐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뵙고 싶다고 전화를 겁니다. 그러면 그 시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내게만 특별히 무슨 큰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역시 그 산울림처럼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그래, 와라. 와! 지금 올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시장에 들러 이것저것 잡수실 만한 것을 사들고 찾아가면, “내가 너보다 더 부자다. 그 돈으로 책을 사 보아라.”며 크게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그 시인의 그늘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너는 인간성이 좋고 머리가 영리해서 앞으로 좋은 글을 쓸 것이다.”
그 시인은 그렇게 내 정신의 뼈대를 세워준 스승이었고 언제나 그리운 은인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나는 두 분의 스승(圓潭 禪師는 夕汀 詩人이 세워준 뼈대에 살을 입혀 주었고, 惠庵 禪師는 그 몸에 눈을 박아 주었습니다)을 더 만났지만, 가장 그립고 잊지 못했던 스승이 바로 신석정입니다.
덕분에 대학도 문예장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만 바라보던 그 한 개의 별.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그것은 별이 아니었습니다. 순수도, 꿈도, 그렇다고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그 봄날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시에 있어서의 철학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하는 것이었는데, 교수님의 대답은 시원하게도 “철학이야 철학가들이 할 일이고, 시인은 시만 쓰면 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무릎 꿇기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마침내 그 가을이 다 지날 때 다른 세계를 찾아 빈 몸으로 훨훨 날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내가 찾은 곳이 바로 이 월명암月明庵이었습니다. 변산 반도에서 산길을 타고 십 리쯤 꼬불꼬불 더듬어 올라가면 그 뒤통수에 절이 마치 새둥지처럼 자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서라벌예대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 일단 서울로 학교를 옮기기로 했는데, 그 공백 기간을 메꾸기 위해 잠시 찾아와 하숙하며 지낸 것입니다. 거기서 눈 내리는 날의 노루도 처음 보았습니다.
산길을 따라 내소사來蘇寺에도 가보았습니다. 거긴 제법 큰 절이었고 전나무 숲이 울창했습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오른 나무들 사이사이로 요정처럼 예쁜 소녀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밤이 되면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습니다.
이때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살아오신 이야기였으며, 특히 벽에 걸려 있는 법구경法句經은 난생 처음 대해 보는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수덕사修德寺의 김일엽 스님이 쓴 어느 책에 소개된 만공 선사滿空禪師의 법문을 대할 때는 정말 무어라 표현할 수 없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전율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선禪과 견성見性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인생 밖의 인생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으며 문학 저쪽에 있는 한 길을 어슴푸레하게 본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큰아들이 잘 자라서 이다음 꼭 성공하게 해 달라’고 절에 찾아다니며 빌던 어머니의 그 불공佛供 정도만이 불교의 전부인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엄청난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알고부터 문학은 차츰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산길을 타고 십리쯤 내려가면 거기 변산 앞바다. 그 한 가능성의 해변을 걷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세계로 이어지는 수평선. 그 끝없는 시간의 깊이. 멀리 바라보이는 몇 점의 섬. 이따금 통통거리며 지나는 고깃배. 그리고 그 짭짤한 바람. 바다는 늘 하늘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조개를 줍는 여인들의 느린 모습이 보이고…….
다시 산에 돌아와도 아직 그 바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다의 소리를 산에서 듣는다. 그러던 어느 맑은 날, 버릇처럼 낙조대에 올라가 서해 바다에 지는 낙조를 보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그 묘한 슬픔을 문득 느꼈습니다.
왠지 근심에 싸여 추운 줄도 모르고 돌아왔습니다.
내 가장 그리운 마을에 찾아가면
그들은 가난하여 불은 없지만
마음 한 모서리가 너무 희어서
그 어느 어둠 속에서도
누구나 한 가지씩 밝은 생각을 내느니
한밤 몰래 숲길에 들어서면
몸을 벗는 나무들
거기 맑은 물살만 남더이다
거울을 닦으면 보이는 집이 있어
달빛도 와서는 가만가만 내려앉고
소리없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
아, 밤꽃이 피다 말면 여자가 된다는데
머리를 끄덕이며
끝없이 가고 있는 흰 돛폭이여
남해는 눈을 감고 바라봐도
차마
차마 가슴이 아프더이다
―「밤꽃」전문
“어찌 여기까지 왔나?”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1970년. 돌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밟아서 절에 올라가니 눈 속에 향나무가 몇 그루 파랗게 서 있었고, 특히 거기 사각의 우물이 나를 몹시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그 만공 선사滿空禪師가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던 산사[德崇山修德寺]에 찾아오고야 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는 그분의 두 제자가 법을 펴고 있었습니다. 원담 선사圓潭禪師와 혜암 노선사惠庵老禪師였습니다. 원담은 주지住持였고, 혜암은 조실祖室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이 절에는 큰스님이 많이 계신다고 하기에 큰절의 큰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왔습니다.”
원담 선사는 마치 겨울 밤 눈 위에 내린 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습니다. 처음 대하는 스님인데도 왠지 전혀 낯설지가 않고 따뜻하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눈에는 그 정기가 아주 무섭게 비치었지만 표정은 참으로 자비스러웠고 그 포근한 음성 또한 그러했습니다.
“너는 참 귀골로 생겼다.”
선사 역시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드는가 싶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일단 출가를 허락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출가란 자기가 자기에게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출가라는 생각만 일으켜도 그것은 이미 출가는 아닌 것이라고.
그때 내가 대뜸 끌려간 곳은 바로 공양 간이었습니다. 스님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입을 모아 공양주供養主를 ‘복 짓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으레 시큰둥하게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들도 좀 손수 그 복을 지어보시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개갈 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꼭두새벽부터 부지런을 떨며 밥을 지어야 하고, 누구는 편안하게 앉아서 그 밥을 따곡따곡 받아먹고 있는가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전혀 모르고서 입산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난생 처음 그 일을 하려니 나는 절로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더구나 스님들은 가만히 보니 모두 큰방에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겨울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을 모신 다음 수각에 쭈그리고 앉아서 차가운 별빛을 바라보며 쌀을 씻어야 했습니다. 또한 스님들은 큰방에서 발우공양을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 개처럼 부뚜막 위에 밥을 올려놓고 앉아서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처지가 얼마나 기막히고 억울했을 것인가.
“금일 삭발이요, 명일 장발이라. 이놈 분명히 내일이면 도로 머리를 기를 놈이다.”
입산한 지 20일이 되는 날은 삭발을 하게 되었는데, 원담 선사가 직접 삭도로 내 머리를 깎아주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너 이놈, 내가 장발은 허락하지 않겠다.’라는 뜻이 완강히 숨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장발과 삭발 사이. 그 속에 행자行者가 있었습니다. 승복을 한 벌 얻어 입을 때는 마치 원효 대사元曉大師라도 된 양 신심信心이 났습니다. 그 바람에 한 달쯤은 그런대로 무사하게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예 행자가 되었어도 참으로 나는 할 일이라곤 없었습니다. 나는 입산만 하면 당장 뭔가 크게 할 일이 있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하는 일이라곤 밥 짓고, 반찬 만들고, 국 끓이는 것밖에 도무지 행자가 할 일은 없었습니다. 도인道人이 되려면 도를 닦아야 할 텐데 그것은 이미 ‘나의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공양이 끝나면 금 같은, 그야말로 금 같은 스님들이 찬상을 들고 쭉 후원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큰방에 앉아서 그 도인이 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을 것이랴. 또한 다들 미남이었습니다. 젊고 활기찼습니다. 그에 비해 내가 하는 일은 얼마나 못난 놈이 할 꼬락서니인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밥이나 지어야 하고, 그들의 잔심부름이나 해야 하니 말입니다. 더구나 뭐가 좀 잘못되면 큰방에 불려가 대중공사大衆供辭까지 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내 팔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더 생각이 삐딱하고 고분고분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열심히 스님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아상我相이 많다고 다들 나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중이 되려고 온 놈 쳐놓고 성질이 너무 빳빳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스님들도 도무지 누구를 그렇게 미워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벌써 아상이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건대, 무릇 아상이란 자기 자신의 참다운 처지를 망각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가? 누가 오라고 해서 왔는가? 그리고 이 행자생활은 스님이 되기 위해 누구나가 다 밟아야 하는 하나의 수행 과정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무엇보다 이것부터 이미 잊고 있었습니다. 그 가장 평범한 현실의 모습을.
하지만 밥 하고 반찬 만들고 국 끓이는 솜씨 하나는 끝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내 유일한 칭찬이었습니다. 하긴 내 깜냥에는 그래도 전대중이 모두들 맛있게 공양을 하도록 얼마나 정성들여 만드는 줄 아는가. 50여 명의 대중이 먹는 밥이라 무척 힘은 들었지만 그러나 내 손에 의해서 그 50여 명의 대중이 밥을 먹는다고 생각할 때 왠지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스님들이 큰방 공양을 하는데 그때 현몽 스님이 밥 한 숟갈을 뜨면서,
“그것 참 그 행자님 밥 한번 잘했다.”
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그 스님이 그만 우두둑 돌을 깨물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스님의 표정이 어떠했을 것인가. 그렇게 나는 손등이 쩍쩍 터서 피가 나도록 공양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행자 노릇은 도저히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나도 어디까지나 도를 닦으러 왔지 밥 지으러 온 것은 아니니까. 연애하다 말고 온 같은 학과學科의 명숙이도 은근히 생각났습니다. 또한 나 같은 소인小人이 어떻게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대도사大道師가 되어 중생제도를 하겠는가. 소가 다 웃을 일이지. 옛말에도, 모르는 것은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영원히 모를 놈이다.
더군다나 그놈의 큰방공사는 너무도 지긋지긋합니다. 아마 전국 사찰을 통틀어 나만큼 큰방공사를 많이 당한 행자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침 공양이 끝난 뒤 공사 목탁이 세 번 길게 울리면 큰방에 불려 들어가 맨 하판에 장시간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을까.
너무도 고달픈 입문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그 개성에 맞춰서 가꿔야 해. 대나무를 박넝쿨로 키우려고 하니 그게 잘 될 리가 있나. 내나무는 곧게, 그리고 박넝쿨은 박넝쿨같이 키워야지.”
제일 상판에 앉은 원담 선사의 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보호자다.”
라고 하면서까지 선사는 나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누가 주지 스님의 말씀을 거역하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내가 더욱 대중공사를 당하는지도 모릅니다.
한번은 내가 공양을 지어야 할 텐데도 하도 피곤하고 오기가 생겨 그냥 자버렸습니다. 그래서 전대중이 아침밥을 굶게 되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큰 벼락불이 떨어질 판국이었습니다. 큰방 맨 하판 말석에 꿇어앉아 대중 스님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원담 선사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왠지 가슴 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배가 아팠습니다.”
차마 선사 때문에 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주먹이라도 날아들 듯 되게 혼났습니다. 하긴 얼마나 머리끝까지 화들이 났을 것인가. 귀싸대기를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지. 하지만 그 너무도 호된 꾸중을 듣다 보니 나도 다시 잔뜩 오기가 치밀었습니다. 사실 미친놈이 아닌 놈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는 그게 보통 성질이었겠는가.
“이제 공양주 노릇 그만두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그만둬?”
그래서 결국은 공양주를 더 하든지, 아니면 집에 돌아가든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집에 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공양주 한 달간만 해. 딱 한 달간만.”
그러나 선사는 말했습니다.
“그것도 열흘간씩 스님들하고 교대해 돌아가면서 해.”
또,
“저 사람은 학교에서 공부만 한 사람인데 그렇게 일을 시키면 쓰나.”
참말로 대단한 양반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자꾸만 큰방공사를 당할 일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한 개 버리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공사가 행자를 잡아먹는다. 그렇지만 이번이 아마 마지막 공사였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참회를 하든지, 아니면 집에 가든지, 또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가야겠습니다.”
하지만 선사는 참으로 안타까운 듯 내게 독촉을 했습니다.
“한번 발심 출가를 했으니 참회를 해.”
그리고 큰방에서 나올 때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스님네들한테 더 미움을 받는다고 했잖아.”
노루 새끼 한 마리
선히 노을의 길을 맨발로 걸으며
뒤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그렇게 허전히―
음악이 가까운 시간의 변방으로 서면
바닷물 바닷물이
눈망울 흥건히 젖어 일고
수평선 아득히
젖빛 구름이
그리움을 손짓하는 것처럼
좀 더 외로운 시간 가까이로 돌며
모래펄에 제 발자국도 찍어보고
아주 두고 온 어미의 얼굴도 그려보고
그러다가
문득
“스님! 스님!”하고
간절한 음성으로 부르는 것 같은
―바다는
한 접시씩 부서지는 바람의 울음소리.
그 울음소리.
―「노루 새끼 한 마리」전문
그날도 혜암 노선사惠庵老禪師는 마치 붓으로 선명하게 그려놓은 듯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벽面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삼배를 올린 뒤 그 자리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자 그때 언뜻 맞은편 벽에 걸린 <三星下半月>이라는 편액이 눈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 심心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서, 노선사는 이따금 방문객이 찾아오면 그 편액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삼성하三星下의 반월半月이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아나?’하고 묻곤 했습니다. 마음이 곧 첫 번째 부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길게 한번 숨을 내쉬고 나서 가부좌를 풀며 노선사가 내게 눈길을 주었습니다. 전혀 팔순의 고령 같지 않게 차고 힘 있는 눈빛이었습니다.
“공양은 했느냐?”
지그시 도로 눈을 반쯤 내리감으며 노선사가 말했습니다.
“네.”
나는 약간 허리를 꺾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화두話頭는 잘 들고 있고?”
“오늘은 그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그러자 노선사가 눈을 크게 열며 나를 담아 올렸습니다. 화두라는 말만 나오면 노선사의 얼굴에는 금세 활짝 생기가 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혜암의 가풍이었습니다. 누가 되었든 화두에 대한 얘기라면 잠을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분이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먼 능선 위의 한 점 구름처럼 마음이 아늑하게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한 줄기 적막한 가을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냉정하게 화두를 챙겨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어떤 스님이 중국의 조주 선사趙州禪師께 묻기를 ‘조사[達磨]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함에, 조주 선사는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庭前栢樹子].’라고 했다. 그렇다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조주는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가?
이것이 바로 정전백수자 화두입니다. 나는 노선사로부터 이 공안을 간택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 화두에 대하여 서산 대사西山大師는 <선가구감>에 이르기를, ‘이것은 용궁장경에도 없는 격외선(格外禪)이다’하고, ‘고기가 놀면 물이 흐리고[魚行水濁] 새가 날면 깃이 떨어진다[鳥飛毛落]’고 하는 허물 구句를 말한 바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조주 선사는 주장자를 세우기도 하고, 손가락을 세우기도 하고, ‘판치생모板齒生毛이니라’라고 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라고 한 말과 같은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자侍者는 잠시 밖에 나가 있거라.”
다소곳이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는 시자들의 뒷모습을 흘끗 한번 바라본 뒤 나는 한 무릎 더 노선사 앞으로 가까이 다가앉았습니다.
“그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조주는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가?”
나는 노선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습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없으니, 조사는 그만두겠습니다.”
잠시 노선사가 말이 없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왔느냐?”
나도 다시 주저 없이 그 말을 받았습니다.
“또한 정전백수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노선사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았습니다.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같았습니다. 노선사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짧게 새어나오는 것도 같았습니다.
“다시 일러 보라.”
“그럼 손가락을 세울까요? 노스님께서 처음 제게 이 화두를 내주실 때, 그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는 같은 물음에 대하여 조주 대사는 주장자를 세우기도 하시고, 손가락을 세우기도 하시고, ‘판치생모이니라’라고 하시기도 했는데, 이것도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이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그때 내가 그랬지. 그럼, 이리 와서 내 귀에다 대고 그 뜻을 직접 말해 보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선사 앞으로 성큼 다가가서 귀엣말로
“……(파설 못하여 기록 아니 함)……”
라고 아뢰었습니다.
“견성見性이다!”
길게 숨을 내쉬며 노선사가 말했습니다. 마침내 인가印可를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입산한 바로 그해였습니다. 때는 늦가을, 내 나이 21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했습니다. 인간 누구나의 주인공은 바로 이 ‘나’요, 누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축생을, 때로는 사람을. 그리고 내 생각이 그대로 부처님의 생각이요, 내 몸이 그대로 부처님의 몸이었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오직 그뿐이었습니다.
“자, 악수!”
입 안 가득히 하얀 미소를 물며 노선사가 내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나는 격렬하게 떨리는 손으로 노선사의 손을 힘껏 잡았습니다.
“인연이다. 스승을 만나 도를 닦는 것도 인연이요, 도를 깨치는 것도 인연이다.”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노선사가 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나는 노선사의 정기가 손끝을 타고 저릿저릿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칠십 명, 팔십 명의 선객禪客들이 모인 선방禪房에서도 견성하는 사람이 하나만 나와도 그것은 잘 되는 선방인 것이다. 옛날 내가 공부할 때 같은 경우에도 그랬어.”
그날 노선사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끝없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후 보림悟後保任을 해야 한다. 너는 지금 견성은 새끼줄 같고, 식성은 동아줄 같다는 말이다.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도 보림을 하라. 견성이 동아줄이 되도록. 나는 공안公案 하나를 가지고 50년간이나 보림을 했다. 평생을 닦아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빙그레 웃으며 그제야 노선사가 내 손을 놓아주었습니다.
“보림을 하고 다시 오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화두는 내줄 수 있으나 그 답은 절대 파설破說을 하면 안 된다. 파설하는 사람도 지옥에 떨어지고, 파설을 듣는 사람도 지옥에 떨어진다.”
“파설을 하게 되면 그 듣는 사람은, 도를 통하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겠지요. 어쩌면 영원히 도를 못 닦을지도 모르고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피 한 방울 내지 않고 죽이는 것이지.”
그날도 나는 그 비구니총림比丘尼叢林 이층 석조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먼 ‘문필봉文筆峰’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을 산빛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몇 개의 바위 봉우리. 그야말로 하늘을 향해 불끈 솟아오른 그 거대한 돌덩어리.
노선사의 조실방祖室房은 바로 이 비구니 총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선사를 뵙고 난 뒤 나의 눈은 항상 그 문필봉에서 머물곤 했습니다. 이 덕숭산에서 위대한 문필가文筆家가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무슨 성곽의 문처럼 웅장히 닫혀 있는 바위 봉우리. 종일 능선을 따라 걷다가 문득 이 옥상에 오르면 그러나 신비처럼 열려오는 그 거대한 문.
나는 거기서 아득히 저녁연기처럼 저무는 산빛을 보며 비로소 눈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하나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한 생각 큰 의단을 품고 몇 밤이나 홀로 죽어왔던가.
우연히 못에 잠긴 달을 보고 문득 살 길을 얻었네.
누가 만약 나에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다면
무단히 가을 달이 스스로 먼저 한가하게 밝았다고 하리라.
大疑團抱死幾夜
偶潭沈月得活路
若人問我西來意
無端秋月自閑明
이쯤에서 잠깐 노선사와의 조우遭遇를 한번 뒤돌아볼까 합니다. 내 첫시집 <수덕사의 쇠북소리>를 보내드렸더니, 노선사께서는 당신의 시자를 시켜 내게 편지를 한 장 보내주었습니다. 나는 그해 1월에 입산을 해서 3월에 사미계를 받고, 6월에는 원담 선사가 나의 출가를 어여삐 정리해 주는 뜻에서 자비自費로 이 시집을 발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땟돈 25만 원이나 들였습니다. 나로선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노선사가 다시 당신의 시자를 내려 보내 이번에는 나를 조실 방으로 올라오게 했습니다. 이제 막 초가을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편지 받아 봤나?”
노선사는 햇빛처럼 따뜻한 웃음을 띠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참으로 학처럼 깨끗하고 자비롭게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게 내가 당신의 마음에 꼭 드는가 싶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눈빛은 아직도 그 광채가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다만 그 눈빛이 이따금 나를 떨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노선사의 춘추 88세였습니다.
“네.”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왜 답장이 없어? 편지를 받았으면 답장을 해야 할 게 아냐?”
노선사가 나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보니 도무지 무슨 뜻의 말인지도 모르겠고, 또 거기 답장을 보내라는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지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선사가 그 시집을 읽어보고 나서 보낸 편지입니다.
一星 수좌에게
古寺 옛 지혜 절에서 詩에 대한 業은 오직 부처님 앞에서 香을 피우는 그 향불이 가장 좋겠고, 古庵 옛 지혜 집에서 詩에 대한 生涯는 석 자 자른 막대기가 말라서 파리한 가운데에 또한 넉넉해서 어깨에 메고 보니 이만하면 詩業이 만족이라, 다시 무슨 詩를 말할 것인가.
<修德寺의 쇠북소리>는 바람에 반쯤 섞여서 바람이 더욱 차서 뼈에 사무쳤고, 어두운 밤빛은 온전히 밝은 달빛을 나누어서 밝았는데, 또다시 무슨 詩를 의논할 것인가.
길에서 칼 쓰는 손을 만나야 비로소 칼을 바치고, 詩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詩를 주지 않는데, 어찌 감히 詩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德崇山 叢林 祖室 늙은 원숭이 崔惠庵
“그래, 화두話頭 드는 법은 아나?”
노선사가 지그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이제는 중도 되었고 한창 눈이 시퍼럴 나이였지만 나는 아직 그때까지도 시만을 끼적이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터였으므로 나는 엉겁결에 되물었습니다.
“화두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비구니 시자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습니다.
“아니, 화두도 몰라?”
“시는 잘 쓰던데…….”
노선사는 여전히 햇살처럼 따뜻한 웃음을 물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요즘은 다들 그렇게 씁니다.”
“시는 좋아. 그 표현이 좋아. 그러나 공부를 해야 돼. 이봐, 시성詩聖은 생사生死를 못 면해. 도道를 닦아야 된다구.”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노선사가 다시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날 나는 ‘수미산 법문須彌山法門’인가 하는 화두를 하나 받았는데 어쨌든 앉은 자리에서 그걸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그 답만을 알고자 급급하지만 않았어도 노선사와의 그 첫 만남에서 견성見性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것이 못내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정확히 도道의 절반은 얻었습니다. 그러니 그 환희심歡喜心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제대로 발심發心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노선사도 내 손을 꼭 쥐어주며 여간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참 여태 살아오면서 그처럼 기뻐하는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노스님께서 더 좋아하시네.”
노선사의 그런 모습이 오죽이나 보기 민망했으면 옆에 앉아 있던 비구니 시자가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한 마디 끼어들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 상오 스님의 말도 참으로 잊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시작되어 나는 결국 노선사를 사모하는 마음이 들고야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노선사는 나만 보면 ‘시인인가?’하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인가印可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을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어쩌다 본의 아니게 ‘두 아버지’를 섬길 수밖에 없는 운명이 그 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한 가지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그때 내가 꼭 찾아가야 할 곳에 제대로 찾아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두 분’이 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때(1971년)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속가俗家에 돌아와 복학復學을 했던 것입니다. 학교 뒤에다 하숙집을 정하고 거기서 어정쩡하게 오후 보림悟後保任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한껏 더 자유가 보장된 생활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면서 가끔 ‘두 분의 선사’를 찾아뵙곤 했는데, 이때부터는 그분들이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깎았고, 또 길러라 하면 길렀으며, 승속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하긴 사실 선禪은 시간과 장소가 따로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노동을 하면서도 줄곧 의심疑心 한 생각으로 순일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며, 그렇게 화두話頭만 하나 간절히 들고 있으면 업業은 스스로 녹고, 업만 녹으면 자성自性은 저절로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래서 이일에는 원래 선후배가 없어 이제 막 입문한 사람이라도 견성見性을하면 오히려 평생을 늙도록 공부한 노승의 스승이 되는 법입니다. 깨달으면 번뇌가 곧 보리요, 어둠이 곧 밝음이니까.
그래서 싯다르타는 ‘나를 버리라’고 말했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거꾸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하여 그 한 마디의 말 속에서 불경이 나왔고, 성경이 나왔습니다. 불교가 나오고, 기독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다 같은 내용의 말이더라, 이겁니다. 다 같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말의 형식에 함몰되어 각기 다른 집단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두 가지가 서로 네 나무니, 내 나무니, 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만 알면 결국은 버릴 나도 없고, 거꾸로 갈 세상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거대한 집단들이 오히려 허무하더라, 이겁니다.
사실 알고 보면,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어디 다른 곳에 따로 있어서 착한 일을 하면 복을 주고 또 악한 일을 하면 벌을 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는 자기가 밥을 먹으면 배부르고, 술을 먹으면 취하고, 균을 먹으면 병들고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佛法·眞理]입니다.
이제 나는 시가 곧 선이요, 선이 곧 시입니다. 이것이 또한 그 시와 선의 참모습입니다. 하거늘 그까짓 문명文名을 좀 더 날려본들 무엇하겠습니까.
크리스마스
―단 한 자루의 촛불만 있어도 어머님 모시고
房에 불을 피우면 차라리 南國은 바로 거기 있었는가
그 숱한 별들 중에 홀로 가만 불을 끄고
한 점의 씨앗으로 아프게 묻힌 나날
이렇게 무거운 생각들로 江이 흐르면
언제까지나 지그시 내려다보시는 분.
단 몇 평의 하늘도 어렵게 날아가는
곤충의 나래 같은
그 어린 날에 있었던 汽車를 타면
크리스마스,
어디서 鍾이 와서 나를 때린다.
한 등 아련한 향내여
지금도 목화밭에 있는가
하마 갔는가
청개구리 울음이 정겹게 깨어 있는
그 오랜 不眠의 들녘 끝
더러는 구름에도 계셨다 오곤 하던
저 너머 하얀 聖堂이여.
무심히 마주치는 눈길에서도
멀리 한 줄기 불빛이 흐르는 걸 보면
영락없이 너도 그 흙
그 돌담길을 밟고 있구나.
어둠 속에서,
어둠 속에서
우리는 約束을 했다.
강인봉 -. 1949년 전북 김제 출생. 1970년 원광대 국문과 재학시절 불교에 입문, 그해 첫시집 <수덕사의 쇠북소리>를 발간하였고, 견성見性을 하였으며, 1984년에는 경허․만공․혜암 선사로 전해 온 전법게傳法偈를 이어받았음. 석가모니로부터 제78조祖. 1979년 <한국문학> 1백만원 고료 신인상 당선. 1989년 <문학정신> 제1회 1천만원 고료 소설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구나의 먼 바다(전3권)」, 「다시 에덴에서」, 「불의 침묵」. 시집 「첫사랑」, 「간월도」. 산문집 「풀」, 「누가 부처를 보았다 하는가」. 덕숭산 방장 혜암德崇山方丈惠庵의 법어를 편역한 법어집法語集 「늙은 원숭이」 등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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