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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오늘의 시인, 백우선/대표시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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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10편
백우선
사람 얼굴 무늬 수막새 외 9편
웃는 수막새
웃고 있는 수막새
한쪽 턱을 잃고도 웃는 얼굴
한쪽 턱을 잃고도 웃는 있는 사람 얼굴
언제적부터던가
이 땅에서 주고받는
얼굴 무늬 수막새
한쪽 턱을 잃고도 웃는 있는 사람 얼굴
전신을 잃으면 무엇으로 웃나?
얼굴 무늬 수막새
사람 얼굴 무늬 수막새.
—제1시집 《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 1990년
노점
꽃은 핀다
부딪치는 사람들의 발뒤꿈치에, 옷자락에
꽃은 핀다
가는 곳마다 기웃거리며
고개 숙이며
낯 붉히던
그것들이 모여서
꽃은 핀다
바람 불어 흔들리는 그곳에
손발 시리디 시린 그곳에
꽃은 핀다
휩쓸리다 굽이치는 시가대로(市街大路) 모퉁이
그 흐름의 여백에
옹기종기 모여 들어
꽃들은 핀다
봄에 피는 꽃이
일년 내내 여기저기
낯설게 핀다
—제2시집 《춤추는 시》 1994년
열쇠 노인
세상 한 구석
냉랭한 눈빛의 알루미늄 틀 속에서
열쇠를 깎고 자물쇠를 푼다
주렁주렁 걸린 열쇠로도
전란이 닫아버린 한쪽 눈을 아직 열지 못하고
몸의 길을 환히 열지 못하고
식구들의 막힌 길을 찰칵찰칵 열어 젖히지 못하고
자물쇠의 맺힌 가슴 녹여내는 그 손끝으로
한 평짜리 노점이나 열고
식은 도시락이나 열고
차들에 휙휙 날리는 자전거길이나
열고 간다
한 생의 온몸이 열쇠가 되어
세상의 어두운 자물쇠 구멍으로
비빗비빗 비집고 들어간다
—제3시집 《길에 핀 꽃》 1999년
다산의 사랑
―거중기*
들어올려야 할 때
들어올리는 것
도저히 안 들릴 것 같아도
도르래에 도르래를 달고
줄에 줄을 걸면서
들어올리고야 마는 것
들어올려서는
성을 쌓고
용연을 파고
방화수류정을 세우는 것
전쟁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몰아내고,
구렁에 들어박힌 삶을
기어이 들어올려서는
화성華城처럼 빛나게 하려는 것
*擧重機,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계로 다산 정약용이 만들어 수원 화성(華城) 축조 등에 이용함.
—제4시집 《봄비는 옆으로 내린다》 2002년
어떤 번개
―주재환 유화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 바퀴가 자장면 그릇이 되도록 달려
몸뚱어리에서 자장 볶는 불꽃이 일도록 달려
머리카락이 자장에 비벼진 면발로 휘날리도록 달려
목구멍으로 면발 미끌 넘어가듯 사람들 비집고 달려
*
천둥 번개의 장대비 속도 달리고, 폭설의 눈발 속도 달리고, 수화기에서 튀어나오듯 들이닥치는, 자기 돈으로 양장피와 고량주도 얹어내는, 경마에 수천만 원을 날린, 연변 처녀와 늦장가를 든, 이제는 딸아이의 아버지가 된, 웃음 띤 인사를 꽃잎처럼 바람에 날리는……
—제5시집 《미술관에서 사랑하기》 2004년
저돌
멧돼지는 호랑이를 몰아내고 산의 왕이 되었다.
세상까지 차지하려고 농작물을 먹어치우고
사람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도심으로 내려와 슈퍼마켓에서 아이쇼핑을 즐기고
지하 룸카페에 양주나 한 잔 해볼까 하고 들렀다가는
마담의 허벅지를 송곳니로 슬쩍 그어 연정을 표하기도 했다.
강남 아파트 투기를 위해 한강을 건너다가
경쟁자들의 집중 총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하기도 했다.
더 빨리, 더 많이 갖기 전투가 정말 저돌적이다.
업자들이 제공하는 집과 음식에 몸을 바친 동료들이
불판 위에서 지글거린 지가 오래되었다.
인간의 멧돼지화를 위한 살신성인의 결실일까?
사람의 눈에서는 동족의 독기만이 시퍼랬다.
멧돼지의 세상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제6시집 《봄의 프로펠러》 2010년
월드컵 골
공은 골그물에 걸리고 만다.
아무리 강력한 골, 절묘한 골이라도
공은 골그물에 걸리고 만다.
줄줄이 늘어선, 골문 뒤의 골문에는
골인하지 못한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는 여전히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며 공가죽을 꿰매야만 한다.
텅 빈 밥그릇을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한다.
무차별 폭격에 가족을 잃고
팔다리가 잘려야만 한다.
무성한 여름숲의 캄캄한 겨울 응달에서
오돌오돌 떨어야만 한다.
—제6시집 《봄의 프로펠러》 2010년
운주사 돌부처
단칸집의 등을 댄 둘을 빼고는
다 집도 없다.
일어나 세상을 일으키려는
노부부는 여태껏 누운 채 마음뿐이고
어찌해 보자는 이도 없다.
가족도 누구도 없이 홀로 살거나
가족이든 남이든 함께 살아도
눈, 귀, 코, 입, 팔, 다리의
한둘이나 전부가 없고
아예 머리나 몸이 없다.
그래도 원형이든 사각형이든
항아리형이든 행복을 비는
자기 탑, 가족 탑, 모두의 탑일까?
여기저기 제각각으로
탑은 쌓아 놓고 산다.
—《현대시학》 2013년 4월호
백범 성좌
경교장 임시정부 주석실 유리창에는
하수인이 쏜 흉탄 중 두 발의 파열흔이
지금은 대낮에도 성좌로 빛난다
번개우레좌로 번쩍이며 쩌렁댄다
아직도 남북으로 분쟁 중이냐며
아직도 그 하수인들의 세상이냐며
아직도 아름다운 나라와 멀어지느냐며
—《시안》 2013년 가을호(종간호)
닫힌 문
사람이 죽은 뒤 거의
백골로 발견되는 일이 이어졌다.
60대 여자는 5년,
50과 60대 남자 둘은 5개월 만이었다.
셋 다 홀로 살던 세입자였다.
옷을 껴입고서
이불 속에 모로 누워 웅크리고
부엌 바닥에 엎드리고
주검째 철거된 주택 폐기물 처리장에
해체돼 버려진 채였다.
사람의 장례에 벌레들뿐이었고
부고는 전혀 없었거나
늦게나마
문틈으로 기어 나온 구더기,
쓰레기로 흩어진 자기 몸이 전부였다.
—《시와표현》 2014년 봄호(분연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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