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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오늘의 시인, 백우선/시론 압골壓骨과 졸성拙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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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압골과 졸성*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적어도 내 경우에는 비교적 잘 맞는 말일 것이다. 나는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며, 말을 하더라도 꼭 필요한 만큼 뼈만 골라 분명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하면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말을 할까 하고 말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가다듬는 편이다. 미리 준비할 겨를이 없으면 말할 때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면서 말한다. 이왕이면 이해하기 좋게, 군더더기 없이 적확하게 하려는 노력도 기울인다. 말에서도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정확하게 하려는 게 내 기본이다. 듣는 사람을 염두에 많이 두는 편이며, 글을 쓸 때에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면서 재점검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운만 떼어 암시하거나 에둘러서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나 정확도를 중시하다 보니까 시의 내용이 뻔한 것이거나 깊이가 별로인 경우도 생겼을 것이다. 압축을 너무 심하게 하다 보면 오히려 무슨 말인지 의미 전달에 방해가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호흡이 길고 치렁치렁 흐르며 감칠 맛 나는 시, 삶의 깊은 비의를 담은 시, 극적인 사건을 잘 녹여 담은 시도 써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체험의 빈곤도 문제다. 어렸을 때의 농경생활, 청소년과 청년기 얼마간의 방황이나 반항과 연애와 결혼, 그 뒤의 직장 생활과 자녀 양육 등의 가정생활, 미온적인 역사의식과 또 그러한 사회생활, 성인으로서 겪은 경제적인 어려움 등 말고는 평범하고 거의 모범적(?)인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왔으니, 이러한 삶의 시에서 우러나오는 향기가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은 당연하다. 능력 부족과 생업으로 인한 학문적 천착이나 독서를 통한 탐구의 모자람도 그대로 내 시에 반영되고 있을 것이다. 여행이나 현지답사도 시의 진정성을 높이는 데 많은 기여를 할 텐데, 그것도 상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단한 관심과 학습으로 갖게 된 기본 문장력, 상식을 약간 웃도는 정도의 상상력으로 결국은 겨우 낙제나 면하는 시를 쓰고 있다는 자괴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용기도 시 쓰기에 필요한 것일 텐데, 이해를 고려하다 보면 과감한 비유나 표현을 쓰지도 못한다. 천재지변이 화가 된다면, 풍조우순의 정감어린 시를 써내야 할 텐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선에서 맴돌고 있는 형편이다. 용이 못 되면 이무기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뱀도 아닌 미꾸라지 정도로 작고 흐린 도랑물에서 아가미를 헐떡이고 있는 느낌이다.
처절한 슬픔이나 아픔도 없고, 날고 뛸 기쁨도 없고, 깊거나 높은 깨달음도 없이 평범한 수질의 우물로서 자리를 지켜온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물길이 끊어지지는 않은 점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어떠한 물로 사람들을 맞게 될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처음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소위 절차탁마를 게을리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과분한 말일 수도 있지만, 종종 구도자를 생각한다. 모든 존재의 희로애락을 생각하면서, 부족하더라도 성취의 정도에 연연하지 않으며 쉽게 포기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남이야 뭐라 하든 그저 내 길을 묵묵히 가려고 하는 것이다.
* 처음 제목은 ‘정확한 뼈만 남기기’였으나, 신영복의 “담론”에서 만난 이 말들이 아주 적절해서 바꾸었다. 압골(壓骨)은 ‘압축한 뼈’, 졸성(拙誠)은 ‘졸렬한 성실’을 뜻한다.
단상
눈이 내린다. 쌀가루, 떡고물 같은 따스하고 포근한 것으로나 유리, 운모 조각 같은 냉랭하고 건조한 것들로나 눈은 반짝이며 내린다. 옷에 내리면 금방 스며들기도 하고 자국 하나 안 남기고 그냥 떨어져 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눈을 볼 때마다 그 속까지 생각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눈이 먼지를 그 결정의 핵(응결핵, 빙정핵)으로 삼는다는 사실이 자꾸 떠오른다. 눈이 녹으면 그 물이 깨끗하지 못한 것도 그 먼지 입자들 때문이다. 먼지를 둘러싼 물방울이 하얀 꽃으로 피어나는 승화력은 찬탄할 만하지만, 순백의 꽃 속에 먼지를 감추고 있다는 표리부동의 실상이 개운치 않은 점도 있다. 하지만 눈을 보면서 ‘먼지→물방울→얼음→눈’을 생각해보는 것은 바로 예술화 과정의 확인이고, 대상의 전체와 중핵을 다 놓치지 않으려는 진지한 탐구 자세이며, 아름다움과 현실적 본질을 함께 아우르려는 완미(전미) 지향의 발로이리라고 자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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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변신은 놀랍다. 물이 증기가 되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공중의 물방울들이 다시 모여 구름을 이룬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물방울은 얼음이 된다. 그러니까 구름은 물덩어리나 얼음덩어리, 또는 그 둘의 복합체다. 어쨌거나 구름은 물이 이루는 하늘의 물꽃밭이나 얼음꽃밭이다. 그것들은 가끔 복사꽃밭이나 장미꽃밭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배꽃밭이나 백매화밭이다. 그 꽃들이 질 때 꽃잎들은 여름이면 물방울로 쏟아져 내리지만, 겨울엔 대개 꽃잎 그대로 흩날려 내린다. 온 지상을 덮어 이루는 배꽃이나 백매화의 꽃밭, 사람들은 그걸 눈밭, 백설 세상이라 하지 않는가. 눈은 사람들이 좋아 눈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을 미끄러뜨리거나 미끄럼을 태우면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다. 그러다가는 또 서서히 물로 돌아가 땅속 깊이 뿌리에게로 다가가서는 풀과 나무로 푸르게 일어선다. 형형색색의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로 둥글게 익어간다. 물의 이러한 변신은 물이 쓰는 시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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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에 가도 커피를 마시지는 않지만, 커피에 따라 나오는 각설탕이 참 예쁘다. 찻잔엄마의 옷자락을 못 놓는 막내둥이 같기도 하고, 찻잔이 가져온 작은 선물상자 같기도 하다. 흰 바탕에 가운데는 넓은 홍색, 홍색 양끝에는 가는 녹색 줄로 띠를 두른 각설탕이 볼 때마다 앙증스러워 남는 것이 있으면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그 즐거운 비밀칩을 생각하거나 만지작거리면서 흐뭇한 시간을 남몰래 누린다. 집 책상 위에 놓아두고 함께 지내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그것에서 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설탕의 귀여운 크기와 모양과 멋진 포장―시 한편 한편의 형태와 색상(이미지)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느껴 보았다.
아포리즘
․ 만유화락, 우주 만물의 화평과 즐거움이 고지다.
․ 지극함과 진정성이 시의 힘이고 감동의 뼈대다.
․ 감탄보다 감동이다.(서커스보다 그 예인들의 삶이듯이)
․ 동심이 시의 원천이다.
․ 곡비나 무당처럼 울고 푼다.
․ 열의와 무심을 왔다 갔다 한다.
․ 가장 적절한 말들로 가장 잘 생긴 항아리를 빚는다.
․ 말을 놓을 때 소리의 조화와 무게 균형을 잘 맞춘다.
․ 리듬은 뜻을 더 깊고 높고 길게 해 준다. 말들이 어울려 꽃무늬로 빛나게 하며, 자연스런 흐름을 타게 한다.
․ 실험실의 불을 끄지 않는다.
․ 경계를 허물며, 초월을 꿈꾸고, 불가시 세계도 보아낸다.
․ 높고 깊고 넓은 곳으로 가는 쉽고도 즐거운 길을 낸다.
․ 단순, 선명, 함축의 차도 마신다.
․ 입상진의(立像盡意), 이미지(심상, 心象/像)를 내세워 의미를 다 표현한다.
․ 사막을 맨몸으로 헤쳐 나아가며 흔적을 남기는 뱀을 따른다.
․ 지구와 태양을 안고 영겁을 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을 쌓는다.
․ 시는 이름 짓기나 꿈꾸고 해몽하기다.
․ 심심파적의 콧노래에서 제멋에 겨운 흥타령, 펄펄 뛰고 나는 신명까지가 시의 한 옥타브다.
․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람을 채운다.(신라 도선 풍수는 좋은 땅을 고르는 게 아니라, 결함이나 병통을 고쳐서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고자 했던 비보 풍수였다고 한다. 흠투성이인 중생에 대한 사랑과 통하는 마음이었으리라)
․ 모든 것이 다 중심이다.
․ 천하무무명(天下無無命), 천하에 목숨 없는 것은 없다.
․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고 새 것을 창조한다.
․ 시는 내 눈, 귀, 코, 혀, 살, 가슴, 머리 들이다. 활짝 열어놓은 내 몸 모든 줄들의 팽팽하거나 느슨한 울림이다.
․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군자는 조화하나 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뇌동하나 조화하지 못한다)의 '不同而和'를 '같지 않으나 조화한다'로도 읽는다.
․ 자기에의 內察, 이웃에의 연민, 공동 언어를 쓰고 있는 조국에의 대승적 관심, 나아가서 태양의 아들로서의 인류에의 연민을 실감해 봄이 없이 시인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신동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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