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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읽기/정령/살구꽃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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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읽기
정령
살구꽃 외 4편
가그랑가그랑 기침 소리 문풍지를 흔들면요
대롱대롱 고드름이 놀라 엉겁결에 툭 떨어지고요
댓돌에 누워 있던 누렁이 벌떡 일어나서는요,
고드름 물다가 소스라쳐 부엌으로 달려가서는요.
부뚜막 고무신짝 물고 와 꼬리 살랑살랑 흔들어대는데요
방문이 열리고 서리 앉은 머리는요,
옥색대님 여물게 묶은 발목, 문지방 넘어와 고무신 신고요
오동나무 반지르르한 지팡이 땅을 탁탁 짚으면요
누렁이 꼬리 흔들며 아지랑이 피는 들길 먼저 달려가고요
누렁이 달려가는 길목마다 지팡이 콕콕 찍으면요
메마른 골짜기 얼었던 물이 졸졸졸 흐르고요
겉껍질 푸석거리던 앙상한 가지도 빠꼼히 잎을 피우고요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봄바람 살랑살랑 봉긋한 꽃망울,
살살 살구꽃이 저렇게 벙글어지는데요.
사뿐사뿐 살랑대는 치맛자락 지팡이로 톡톡 건들면요
귓불 달아오른 연분홍 잎사귀 살짝 놀라 떠는 데요
이봐, 처녀! 같이 가!
호박꽃
햇살 좋은 담장 너머로 선발대회가 한창이다.
과시하려는 몸사위로 매혹적인 에스라인을 뽐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노란 별꽃들이 순번대로 피어난다.
넉넉한 플레어스커트를 착용할 것과 까실까실하고 날카로운 살갗으로 호리호리한 허리를 감싸 안아줄 것, 지조 있는 품위와 후덕한 인상으로 관대하게 웃어줄 것과, 매일 한 번은 벌에게 꽃가루를 내어 주고, 항상 의리와 정으로 돈독함을 유지할 것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주고 용기 있게 죽을 수 있는 힘이 선발조건이란다.
서 있어야할 틈 비집고, 함께 가야할 곁 비비며 더듬이처럼 덩굴손들이 앞장서 간다.
비가 촉촉이 내린다.
노란 우산을 받쳐 든 소녀가 담장 곁을 막 나온다.
밤골 버스 안의 밤꽃 향기
덜커덩거리던 버스가 밤골에 선다.
밤꽃 향기 들이마시며 기지개 한 번 켠다.
알사탕 문 아이가
밤꽃잎 달랑달랑 떨어지는 길가에 쉬를 하다가,
버스가 덜덜덜 서두르자
고추를 털다 말고 버스에 얼른 오른다.
밤톨 같은 아이의 콧물에서 밤꽃 향기가 난다.
아랫도리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밤꽃 몇 잎이
훌훌 날아 옆자리 노인의 팔에 살짝 기댄다.
노인이 지팡이를 콕콕 찍는다.
버스 안은 밤꽃 향기로 가득하다.
차창으로 밀려드는 바람이 밤꽃잎을 슬쩍슬쩍 건드린다.
밤꽃잎들 사르르 온몸 흔들며 꽃비로 흩날리다가,
뒷자리 새댁의 치마폭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새댁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낙들이 피실피실 웃는다.
풀밭에서 있었던 꽃잠이야기 풀어진다.
풀꽃들도 낯빛을 붉히더란다.
19금 소설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온다. 빨간색 스카프가 바람에 나부낀다. 그녀가 난간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운다. 그가 달려온다. 눈물을 닦아주며 웃는다.
가방을 든다. 기차가 선다. 밤꽃 흐드러지는 봄밤이다. 가뭇한 그림자가 들창에 다가선다. 너울너울 춤을 춘다. 두 그림자 달구경한다.
풀이 누워 잔다. 꽃잎 하르르 진다. 그가 가방을 든다. 옷깃을 세우고 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이 거세진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눈이 온다. 눈밭에 눈사람 두 개 덩그렇다. 하얗게 쌓여가는 눈, 책을 덮는다.
이불론
덮으면 감쪽같이 가려진다는, 따뜻하기로는 어머니 가슴도 대신할 수 있다는, 감긴다는 상상만으로 이야기하면 남자 품에 안기다가 유두가 짜릿하게 날서기도 한다는 비밀이 숨어 있는, 솜이 틀어지고 풀 먹인 광목이 누벼지고 홀쳐지는 그 어둠 속에서 아궁이엔 장작불이 타고 굴뚝엔 저녁연기 모락모락, 구들장은 달아오르고. 매일 장작불은 타오르고 밥 짓는 연기는 모락모락, 해가 반짝 고개 들고 나오면 마당엔 배꽃이 피고 복숭아꽃이 피고 강아지가 새끼를 낳고 코흘리개 오줌싸개의 누런 지도가 마르고 다듬이돌 위에서 또드닥또드닥, 지린내가 풀풀 나는 이불 위에서 아이가 자라고 고추가 여물고 어화둥둥 알몸이 뒹굴고. 말리고 밟고 두드리고 다지고 덮고 감싸고 공들여 쌓은 만리장성, 자자 과거사의 실천론과 가려야할 것 제쳐두고 덮어야할 것 포개어버리는 비밀스런 성역들이 맨몸으로 활개치는 숲속의 화원, 배꽃 밤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잘자 현대사의 이불기술론. 아무튼 펼쳐야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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