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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권섬/고립, 혹은 자유·1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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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1,714회 작성일 15-07-13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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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권섬

고립 혹은 자유·1

기다리는 거, 이제 그만 해

 

 

언제부터인가 벽이 자라기 시작한다. 검은 곰팡이가 벽에 사는 일이 익숙할 쯤 맞은편 벽이 또 자란다. 한 쪽 벽에서 어둠이 낳은 그림자가 길게 자라기 시작할 쯤 또 다른 쪽 벽이 자란다. 벽과 벽 사이 커다란 외눈이 밤낮 떠 있고, 아무도 그 외눈과 눈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밤이다. 벽과 벽 사이 외눈이 다시 뜨고 그 눈 속에 날아다니는 찰라들이 포착된다. 벽이 걸어 들어온다. 한 뼘 또 한 뼘, 벽이 조여 오는 사이 한 아이의 그림자, 밤과 낮 사이에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있다. 꽤 오래 시간이 흘렀다. 벽은 점점 걸어들어오고 여전히 아이의 그림자는 미동이 없다. 벽과 벽 사이에 떠 있는 큰 외눈, 가끔씩 서늘한 눈빛이 아이의 그림자를 쏘아본다. 성큼 아이의 등뒤로 벽의 날이 다가서자, 혹독한 등뼈에서 왈칵, 비릿한 기억들이 쏟아진다. 벽의 키만 한 그림자가 아이를 에워싸고 그 그림자 속에서 아이는 귀를 세운 토끼의 하얀 그림자를 본다. 아이가 천천히 일어선다. 벽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좁은 길이 재빠르게 벽 사이를 빠져 나간다. 아이의 등뒤로 벽이 서로 겹친다. 그 벽 앞에서 아이는 하늘 높이 떠오르는 풍차를 본다. 벽의 날에 튕겨나온 아이가 둥실 날아오른다.

 

 

 

 

고립 혹은 자유·2

나무, 하얀 자유를 꿈꾸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동산이 내 고향이지.

동그랗고 아담한 그 동산에는 하얀 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는 우주를 향해 팔을 뻗은 멋진 몸매를 가졌어.

잠에서 막 깨어난 촉촉한 동산 위에는 그 나무만 보여.

새벽마다 뽀얀 이슬로 몸을 씻은 그는 풀내음이 나.

그의 그늘 아래에서 잠이 들면 꿈이 풀빛으로 물이 들어.

길고 하얀 그의 팔은 동그랗게 우주를 안고 있어.

그의 팔 안엔 은빛 코끼리가 날아다니고

곡선으로 열린 정원엔 하얀 별들이 무도회를 열어.

회색빛을 돌돌 말아올린 시간의 계단에서 비가 쏟아져.

거뭇한 기억의 등살 위로 뽀얀 날개가 돋아나고 있어.

말랑한 가슴이 폭신폭신 동글동글 난, 자라고 있어.

그는 하얗고 아름다운 팔로 우주를 감싸고 있고,

하얗고 아름다운 팔로 여전히 날 안고 있어.

동그랗게 자란 나는, 모자를 벗고 이별을 준비해.

하늘을 향해 깊숙이 뿌리를 내리던 그는

땅에 뿌린 은빛 물방울 소리를 저장하고 있어.

 

 

 

 

고립 혹은 자유·3

숲에서 빈 의자를 보다

 

 

숲은 꿈속 어느 지점인 거야. 언제나 꿈을 꾸면 숲에 혼자 남게 돼. 숲에서 길을 잃은 거지. 그 숲은 옛집인지도 몰라. 길을 잃고도 무섭지가 않거든. 천천히 걸어보는 거야. 나무들이 오목하게 허리를 굽혀 길을 안내하고 있어. 지루한 숲길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어. 오목하게 허리를 굽힌 나무 뒤에 잠시 쉬면서 이 숲에 혼자 남은 나를 봐. 그리고 생각해. 이 숲에서 나가야 한다고. 지루한 숲길을 다시 걸어.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해. 어두워지고 있어. 멀리 빈 의자가 보여. 거기 앉아 쉬면 편안해질 거야.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빈 의자에 앉아서 쉬어. 그러다가 생각해.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까. 이 숲에서 나가야 한다는 걸 그러면서 알아챈 거야. 또 걷기 시작해. 오목하게 허리를 굽힌 나무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여. 옛 친구들이야. 내 이야기가 가득 담긴 가방을 든 친구들이 오목하게 허리를 굽히고는 옆으로 서 있기도 하고 뒤돌아 서 있기도 해. 그러면서 계속 길을 내어 주고 있어. 말을 걸어 볼까도 싶었지만 그냥 걷기만 해. 걷다가 지루하면 친구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기도 하고 노래를 하기고 해. 다시 걷기 시작해. 멀리 희미한 안개 속에서 빈 의자가 기다리고 있어. 빈 의자에서 쉬는 동안 몇 번을 생각했어. 어쩌면 이 숲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몰라. 멀리 빈 의자가 보여. 발이 아파. 빈 의자에서 나는 다시 쉬게 되겠지. 지금은 꿈속 어느 지점인 거야.

 

 

 

 

고립 혹은 자유·4

영혼이 새어나가다

 

 

언제부턴가 내 몸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어. 그 구멍은 점점 많아지고 커져가고 있어. 그 구멍으로 내 속에 갇힌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고 있어. 영혼이 빠져나간 가족들이 책을 읽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영혼이 없는 얼굴로 하늘을 향해 향을 피우고 있어. 어느 날 영혼이 없는 그와 오래 키스를 하고는 가슴에 투명하고 가느다란 회로를 꽂아둔 채 떠났어. 아릿함이 잦아들 때쯤 회색빛이 몸에 번지고 점점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해.

 

푸르스름한 안개를 두른 거리를 낯선 사람들이 표정 없이 돌아다녀. 그들 가슴에는 파란 나선이 길게 자라고 있고 그들은 목소리를 잃은지 오래야. 어제도 오늘도 그들은 길게 자라는 파란 나선을 확인하고는 안심해. 내 몸의 구멍은 아직 아물지 않고 환청 속에 친구의 목소리가 갇혀 있어. 내색할 수 없는 진통이 가슴을 조여 와. 그때마다 점점 마음벽에서 투명하고 가느다란 나선이 자라고 그 나선 끝으로 깜박깜박 파란 불이 들어와. 다른 누군가가 나의 정보를 읽고는 정보창에 물음표를 띄워. 투명한 회색빛 얼굴들이 알 수 없는 정보들을 빠르게 폐기하고 있어. 이야기가 삭제된 그들의 눈동자들이 의미 없이 깜박이자 문뜩 몸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어. 그들은 가느다란 나선으로 나의 정보를 분석하고 있어. 금세 내 안에 새 회로들이 교체되고 있어.

 

 

 

 

억새꽃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빳빳이 몸을 세우자. 긴 잎사귀마다 억센 날도 세워야 해.

 

풀의 꿈은 그랬다. 투쟁해야만 얻을 수 있는 꿈을 품은 날로부터 얻게 되는 병. 풀에게 꿈은 병이다. 고단한 빛으로 하루하루 야위어가도 몸서리치도록 가라앉은 정적 위로 달빛이 쏟아지면 전설처럼 꽃대가 피어올라 풀이 꽃이 되는 보푸라기처럼 일어났던 너의 병이 기어이 꽃이 되는, 면류관 같은 꽃이 되는,

 

바람이 한 번 출렁일 때마다 꽃술에 달빛 찍어 그려내던 너의 이력들을 오늘은 갈바람이 다가와 시로 읽는다

 

 

 

 

시작메모

우리는 다 무엇을 그리워하는 거다.

 

 

일주일 집을 비운 주인 없는 집에 고양이들만 남았다.

병원에 누워있는 주인은 건강을 그리워하고

베란다 창밖으로 들고 나는 사람, 자동차들을 바라보는 고양이들은

며칠째 보이지 않는 주인을 그리워하는 거다.

가뭄에 시달린 초목들은 단비를 그리워하고

집안의 화분들은 주인의 눈길을 그리워하고

먼 하늘은 망망한 바다를 그리워하고

밤은 낮을 그리워하고

향기는 바람을 그리워하고

꿈은 실현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아프고 감싸 안는다.

그리워하다 다치고 싸매준다.

그리워하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워하다 멀어졌다 더 가까워진다.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보인다.

그리움은 치료이고 보약이다.

 

그리움이 가득 찰 때 까지 시인은 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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