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신작시/김상미/파리의 자살가게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김상미
파리의 자살가게 외 1편
죽고 싶은데 파리까지 가야 하나요?
이곳엔 왜 자살가게가 하나도 없나요?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너무 가혹해요
성미 급한 사람들은 오래 전에 벌써 다 죽었는데
찬송가 493장을 펼치고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보이지 않아
비탄의 금잔화 한 다발을 사들고 오늘도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파리행 티켓은 너무 비싸고 아득해요
죽음이 간절해질수록 삶은 더욱 쓸쓸해지고
죽음의 형식 또한 마지막 잎새처럼 갈수록 초라해져요
이곳에도 자살가게를 만들어줘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내 가슴이 울고 있어요
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건 마지못해 산다는 것
삶이라 불리는 그 수수께끼를 일찌감치 푼 사람들도
피가 나도록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이 지상에 무덤 하나 달랑 남겨놓고 떠나버렸는데
이 세상과 멀어질 대로 멀어진 내 삶을 안고
정말 파리까지 가야하나요?
요나처럼 고래뱃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요
그러면 혹 살고 싶어 발버둥이라도 쳐보지 않을까요?
파리행 티켓을 구하지 못해 죽지도 못하는 죽음 앞에
삶이란 얼마나 잔인한 은총인가요?
매일매일 알프스산맥을 넘는 꿈을 꾸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파리에 도착하게 되겠지요
신나게 파리의 자살가게 문을 두드리며
누구보다도 빠르게,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누구보다도 절망적으로
마침내, 드디어 죽게 되겠지요
우리 할머니 우리 엄마 우리 언니들처럼
오, 아름다운 나날들의 눈을 기쁘게 감길 수 있겠지요
활짝 핀 동백꽃이 새빨갛게 황혼을 물들이며 뚝뚝 떨어지듯이
* 파리의 자살가게: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목
제발 잡히지 말고
돈가방을 들고 튀는 여자, 아주 어릴 때부터 온갖 못된 햄버거와 바나나, 하이힐과 권총들에 짓밟히고 유린당하고 모욕당한 여자, 영화 속이지만 제발 잡히지 말고 캄캄한 마천루, 그 한 가닥 빛 속으로 도망쳐 평생 쓰고도 남을 눈먼 돈, 깨끗이 세탁된 돈, 숨어버리기만 하면 추적이 불가능한 돈, 누구의 돈도 아닌 돈, 아무리 쓰고 또 써도 세금이 안 붙는 돈, 환상의 돈, 제발 잡히지 말고 원 없이 그 돈을 뿌리며 살기를! 그 돈으로 얼굴도 바꾸고 비열하고 악독한 자본주의, 그 단말마의 문명이 온몸에 새겨놓은 그 더러운 문신도 다 지워버리고, 뱃속의 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는 행복하고 간절한 마음과 함께 제발 잡히지 말고 무릉도원으로, 온갖 개새끼 소새끼 잡새끼들은 깡그리 잊고 잊어버리고 폭풍우가 몰려오면 올수록 더욱 우아하게 우뚝 솟는 오래된 나무들처럼 쓰잘데기 없는 영혼일랑 저 멀리 던져버리고 아무런 가책도 죄의식도 없이 최고의 무기인 선한 천성대로 독창성 있게, 그렇게, 그렇게 살았으면, 제발 잡히지 말고 오래오래 자유롭게!
김상미 -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시집『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잡히지 않는 나비』.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
- 이전글신작시/김영산/배고픈 다리 위에서 부르는 황조가 외 1편 15.07.13
- 다음글신작시/이향지/배꽃능선 첩첩한 한 알 속 외 1편 15.07.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