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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김왕노/궁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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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궁리 외 1편
어떤 일이 닥치면 궁리를 하라고 아버지 처음 말씀하셨을 때
궁리에 가보라는 줄 알았다.
궁리는 물 안의 마을 같아 고요가 측백나무로 자라고
마당 가득 수국 꽃 실은 쪽배가 수시로 드나드는 줄 알았다.
궁리에 가면 푸른 사과가 주렁주렁한 줄 알았다.
궁리가 또 다른 방법이나 길로의 모색이라 걸 알기 전까지
아버지 작년에 파묘하여 이장할 때 아버지의 모습은
두 손 가지런히 모은 궁리의 모습, 골똘한 궁리의 모습이었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가는 세상이 정말 괜찮을까
무덤 깊이 고인 질 좋은 어둠을 반죽해 손잡이가 튼튼한
꿈 한 벌 제대로 만들고 무덤 속 잠을 청산하고 어디로 갈까
궁리에 궁리로 뼈마저 삭지 않고 오랜 비문처럼 굳어 있었다.
아버지는 무령왕릉을 지키다가 발굴된 석수처럼 궁리의 짐승 한 마리
북벌의 말 달리자는 말 한 벌 뼈로 고스란히 남겨두신 아버지
파묘로 드러난 아버지의 궁리를 환대하듯 벚꽃 잎 분분이 휘날렸다.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가난하다 하여 사랑의 노래를 못 부르랴
부르자 꽃마차, 라는 노래를
당신 밖에 난 몰라, 초우라는 노래를
가난하므로 더 절실하게 노래를 부르자꾸나.
가난하다 하여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으랴
가난하다하여 꼬리를 안으로 말아 넣은 개처럼
주눅 든 얼굴로 비굴한 얼굴로 죽어 살 수 있으랴
가난하므로 더 뺏길 것 없는 가슴으로 배짱으로
누구도 부를 수 없는 노래 마음껏 부르면서 가자
뼛속 깊이 파고드는 가난이어도 가난한 사람만이
가난한 사람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는 세상에서
더 가난해질 수 없도록 가난하므로
더 배고플 수 없도록 허기가 졌으므로
가난하므로 가난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으므로
너도 가난하고 나도 가난하므로 가난으로 평등하므로
가난하다 하여 목소리를 잃을 수 있으랴
오래 목이 잠겨만 있을 수가 있으랴
부르자 꽃마차, 라는 노래를
당신 밖에 난 몰라, 초우라는 노래를
가난하므로 더 절실한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가자
김왕노 -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그리운 파란 만장』 등. 2003년 제 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년 제 7회 박인환 문학상, 2008년 제 3회 지리산 문학상 등 수상.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현 《시와 경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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