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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조경숙/접사렌즈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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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숙
접사렌즈 외 4편
우연히 지나가는 작은 순간들
그 미세한
떨림과 만나고 싶어
배경은 생략하고
다시 태어난 느낌으로
키가 쑥 커진 기분
당신은,
긴 머리카락을 넘기며 얼굴을 쓰다듬었어
가슴이 쿵쾅거렸어
동공이 확장되고 꿈속에서 이름을 부르던
낯익은 입술이 보였어
숲속의 그늘
나무와 새들도 한 순간 정지되고
다시 흔들렸어
바람 한 점 없이 한방에 훅 간다는 것
당신의 눈에 집중하는 동안
적막
하회탈을 쓰고
혼자 거울을 보면
또 다른 누가 저 속에 있다
저 웃음 뒤에 숨은
눈물 같은 것
너는 누구냐
호통을 치며 내쫓지 못하고
마음을 바꿔가며
둘도 되고 셋도 되고
그러다 신명나게
여럿도 되고
아직 오지 않은
누굴 찾기도 하며
얼쑤, 어깨 흔들며 흘러가고
다시 버스를 기다리며
내가 사는 도시 부천
시외버스터미널 이름이 ‘소풍’이다
소풍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간다던 시인
그도 여기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을까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개찰구는 달라도 희망하는 목적지가 같을 때
시인은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 법
이 길은 수단이 아닌 목적
어디로 갈까
이곳저곳 점을 찍다가
왁자한 틈바구니 속에서 빛바랜 추억 한 장,
어쩌면 그날의 소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 몰라
아니 저 아득한 흑백사진 속에서
아직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는지도
함께 보물찾기를 하던 사람
지금 어디서 그 누구와 소풍중일까
김밥 한 줄도 싸지 못했던
그날의 부끄러움
봄볕이 더 화끈거려주었던가
12시 30분 고향 가는 차표를 끊고
삶은 계란과 사이다 한 병 사들고 뛰어와 보니
버스는 이미 떠나고
미세먼지 속으로 봄날이 기울고 있다
어떤 얼룩
창을 응시한다
무언가 유리창에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꽃이었다가 나무였다가
느긋하게 내 곁에 스밀 수 없었던
성에 같은 너였다가
원고지는 충분하다
상처라고 쓸까
무늬라고 쓸까
쓰고 지우고
결국은 바깥의 한나절이라고 쓴다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
너는 그렇게 물기로 흐르고
어느 평일, 뒤편의 풍경을 보기위해
창문을 닦아야 하는 봄이다
기쁨나라 모험가
천사가 사는 곳을 찾다가
천사를 만드는 사람을 만났다
시무룩한 아가에게 예뻐하고 칭찬하고
그 언어에 골똘할 때
또 하나의 나라가 세워지고 모험은 시작 된다
그대가 본 세상은 이렇게 나뉜다.
5프로의 천사
10프로의 上, 이방인
70프로의 보통사람
10프로의 下, 이방인
5프로의 악한 자
아래위 10프로의 이방인은
70프로의 범인凡人으로 합류할 수 있다
가령 뭉게구름이 되어 올라가든가
비가 되어 내려오든가
나는 고단한 자
당신이 눈을 깜빡거린 사이
섬광처럼 아래위로 사다리를 타며
씁쓸하고 쓸쓸하고 두렵고 화끈거리는 곳을 여행한다
나는 아래 下,
독방을 좋아하는 5프로
가끔 꿈꾸는 것
행동하는 양심보다
독방에서 독서하는 것을 선호한다
말 한마디 건네는 이 없는
안녕, 을 동경했던 1인
나는 우연히 발견한
당신이 사는 기쁨나라의 모험가
허공의 천국과, 땅속의 지옥을
사랑과 미움을 오르내리는 순간이동者
백년 후 아무도 기억 못할 나
돌돌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천사를 제조하는 당신의 형식을 보며
턱 괴고 지금은 만감이 교차중이다
시작메모
물과 하늘이 맞닿아 이루는 선. 또는 중력의 방향과 직각을 이루는 선. 선명하나 또 실존치 않는 그저 선. 그 밑을 모르는 나는 사람사이 바람이 넘나드는 먼데를 선이라고 한다. 멀어 보이지 않는 탓에 그리운 감정이 철벅철벅 넘나들어 꼭 닻을 달고 가봐야 될 것 같다가도 하늘과 땅의 기울기로 방향을 만드는 언덕 없이 착한 벽에 걸려 있는 하회탈의 여러 표정을 보며 그래도 다행이라고. 내속에 나 외의 여럿이 있기에, 시를 사모하는 외롭지 않은 몇 가지의 나의 형식이 있는 것이라고.
서랍에 잠자던 카메라를 꺼냈다. 맘에 드는 한 장의 작품을 얻기 위해 대상을 정하고 아니, 대상이 먼저 정해졌다고 해야 맞겠다. 운명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평범한 오후 창문에 묻어 있는 지문 하나를 발견하고 혼신을 다해 내 전부를 내줄 출사를 꿈꾸니. 내편이 맞나 째려보고 노려보고 서로가 몰랐던 지난 시간의 객관적 정보를 참고하고. 보이기 싫은 것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접사렌즈를 닦으며 천사를 제조하는 당신의 형식을 숭배하며 기쁜 나라를 모험하는 오늘. 그래…뒤에 있는 배경을 지운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에 집중하는 시간이라는 것. 삶은 현재진행형 웃음 하나를 뒤집어쓰고 이 봄 내 생의 봄날을 맞으러 가겠노라고 얼쑤 어깨 흔들며. 이것이 나의 복락이라고.
조경숙 - 2013년《시와정신》등단. 시집『절벽의 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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