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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백인덕/티눈과 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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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티눈과 나 외 1편
너의 미덕은 나를 절름대게 하는 것.
몇 시간의 지친 술자리와 온갖
개수작을 동원한 교설(巧說) 없이,
그저, 너는 평범한 내 걸음걸이를
계속 절름대게 한다는 것.
그로 인해 직립자세를 불편하게 하고
시각을 삐딱하게 하고, 아무리
입을 오므려도 발음이 새게 한다는 것.
반나절을 서 있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러므로 티눈이여,
네가 내 머리다.
발바닥에 뇌를 달고, 땅을 딛고 산다.
지표면에 속한 영혼은 추락을 모른다.
고귀한 이상에 유혹당하지 않는
내 속됨은 모두 너의 미덕.
배고픈 저녁이면,
왼발의 티눈 두 개 어루만지며,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잘했다, 짓밟히는 것들만 목도(目睹) 했으니
기특하게, 무식하게
벼랑 끝에 좀 더 다가섰구나.
흙 묻은 모자를 벗고,
길게 몸을 뻗는다.
아득한 전언(傳言)·겨울
부엌까지 시린 안개가 스민 저녁마다
돌처럼 언 감자를 구우며
여린 목덜미를 감아쥐고, 속삭였다
--엄마는 곧 오실꺼야!
시뻘건 아궁이가 우리 앞에서 날름댔지만
흙집 천정에서 내려 선 흑거미를 잡아
노릇하게 구워, 네 입에 넣어주며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던
밤, 세상은 온통 눈발이었고,
부엌 밖은 주인집 아줌마 매서운 눈초리,
나는 가느란 모계의 서러운 짐승.
언 땅에 시를 쓰고 재빨리 뭉개버렸다.
세 밑 저녁, 교회 종이 울릴 때마다
고무신이 찢어져라 달려가 받아 든 과자 몇
조각, 그렇게 세상은 조각나 있었다.
동경 하늘에도 성긴 눈발 서성이는가?
그깟 퍼즐 다 맞췄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이국의 잿빛 전망 앞에서 박사가 되었고
나는 이 조촐하고 쓸쓸한 땅의 시인이 되어버렸다.
누이야!
발목을 차올라 무릎을 휘젓고
시린 안개는 어깨를 마구 비튼다.
그러나
우리의 아궁이는 더 크고, 더 활활 타올라야 하는 것.
안산 작은 방에 뒹굴며 식어가는 우주를 껴안고
여기, 그냥 오빠가 살아있다.
살아있음으로 이 우주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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