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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최서연/몇 백 근의 그늘 속에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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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연
몇 백 근의 그늘 속에서 외 1편
부도난 건물
늑골 시린 콘크리트 벽에
목울대와 발등이 맞닿은 식물 하나를 본다
흙살 없이
둥굴게 허공을 품고 기어가는 뿌리는
손끝 닿으면
금방이라도 손등을 기어오를 것 만 같은 자벌레같다
햇살과 바람이 흰 바람벽처럼 말라붙은
몇 백 근의 그늘 속에서
등뼈 한 번 곧추 세우려고
포복匍匐한 적막을 기어가는 생生에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나는,
대문처럼 가슴이 벌어지는 경이로움에서
무심無心으로 빨려든다
피어도 핀 줄 모르는
부도난 건물
늑골시린 콘크리트 벽에서
이것이면 된다 ⃰
명퇴를 한다고 하니
뭐하고 살거냐는 말이 맨 처음 들리더니
건강이 안 좋은가로 바뀌고
나중에는 빚이 많은가로 들렸다
그 즈음에,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삶이 아니냐며
옆구리 감싸는 딸의 말끝에
배추 고갱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살아 온 걸 돌아보면
할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했으나
밑동이 발자국 같은 겨울들판을 거닐며 ⃰ ⃰
맨살의 시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면 된다
남김없이 비워 낸 겨울들판에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나는,
걸친 옷을 버리기로 하였다
* 김남조의 「눈의 행복」에서 인용
** 허형만의 「겨울들판을 거닐며」에서 인용
최서연 - 2014년 리토피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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