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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산문/김인자/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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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2,324회 작성일 15-07-09 15:44

본문

아라산문

김인자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6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릴 때였다. 대기실에서 신문을 들여다보던 중년신사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상상력은 기고만장한 날개를 달았다. 저 신사 영화배우일거야. 아니면 음악가일까. 그도 아니면 화가겠지, 어쩌다 시선이 마주칠 때면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마저 영락없는 나쁜 남자다. 입국심사대 직원이 그에게 직업을 물었을 때 ‘farmer, I am a farmer’라 했다. 파머(농부), 내가 들은 단어가 맞는지 잠시 귀를 의심했으나 틀림없는 파머였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지고 내 차례가 왔다. 같은 질문이 주어졌을 때 나는 말을 더듬으며 ‘Housewife’라 했다. 평소 같으면 ‘Freelance Writer’‘Writer’라 답했을 텐데 주부라고 답한 이유는 간단하다. 앞선 남자의 대사를 흉내 내고 싶었던 것.

그가 기내에 건너 옆자리에 앉아 나를 인상적인 아시안이라고 말했을 때도 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인연이 될 줄이야. 그는 남섬에 대단위 농장을 소유한 농부였고 3년 전만 해도 뉴질랜드 정부에서 일하다 농부가 되어 내추리스트(naturist)로 살고 있단다. 이런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오클랜드 공항에서 악수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이상하게도 나쁜 남자의 여운이 계속 맴돌았다.

새천년맞이 준비로 지구가 축제분위기에 달떠 있을 때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어느 날 나는 우리와 계절이 반대인 뉴질랜드로 날아갔다. 그로부터 명암을 받은 지 꼭 2년 후, 나는 유클립투스나무로 둘러싸인 그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요트를 타거나, 7번 아이언을 휘두르거나, 수영을 하거나, 밤마다 무릎이 닿는 야외 스파에 몸을 담그고 별빛아래에서 와인과 해물요리가 등장하는 가든파티가 이어졌다. 크리스마스이브, 내 방문 앞에 놓여있던 장미꽃다발과 크리스마스카드,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능력 있고 따뜻한 남자였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멋진 농부를 본 적이 없어서 내 생각은 빈곤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와 재회한 뒤, 처음 만나던 날 내 머리를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파머에 대한 당당함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평소 그는 트랙터를 몰고 나가 양떼를 돌보거나 포도밭을 둘러보며 정원에 어떤 꽃을 심을까 하는 즐거운 고민으로 하루를 보낸단다. 사람을 좋아해서 최소의 비용만 받고 여행자들에게 자신의 별채를 빌려주었는데 그해 나는 출생 후 다시는 올 것 같지 않는, 가장 기억에 남는 낭만적이고 핫한 여름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것이다.

영혼의 자유를 담보로 잉여와 결여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것이 여행이라 했다. 미지의 시간을 탐험하고 타인의 삶을 학습하는 것은 물론 뜻하지 않게 귀빈대접을 받기도 천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일상에선 불가한 놀라운 경험들이 추가품목이 되거나 제거대상이 되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늘 빗나가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처음 영화배우나 예술가를 기대했지만 파머란 답이 내게 준 울림은 길었다. 그날 이후 어떤 직업도 파머보다 멋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가끔 눈을 감고 그날로 돌아간다. 하늘을 찌르는 유클립투스 울타리와 보라색 라벤더로 물들이던 그의 정원과 너무나 멋져서 나쁜 남자가 되어야 했던 오래 잊고 싶지 않는 이름 라이오닐 오브라이언 엘슨(Lionel Obrien Elson), 자신을 찾아온 여행자에게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선물할 수 있었던 그가 행복한 농부라면 그 추억을 이토록 오래 간직하고 있는 나 또한 얼마나 행복한 여행자인가. 오늘은 라이오닐에게 ’Happy Christmas to you‘ 이메일 카드라도 부쳐야겠다. <<뉴질랜드 남섬

 

#7. 탱고와 거리의 악사들

당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봤니?

반도네온 반주에 발을 구르며 춤 춰 봤어?

끈적거리는 눈빛의 늙은 무용수와 발 맞춰봤냐고?

금기와 매혹의 다른 말이 탱고라는 거

반드시 탱고를 춰야하는 건 아니지만

지루한 인생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탱고를 춰

탱고를 시작했다면

밥물이 끓어 넘치거나

비행기를 놓치는 일 따윈 놀랄 일도 아니지

발등을 좀 밟으면 어때

탱고를 추면 알게 될 거야

금지된 장난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탱고를 춰야 알게 돼

물과 기름이었던 두 사람이

하나로 반죽되는 거

가파른 호흡, 구슬프고 애절한 몸부림

엉키는 스탭이 인생이라는 것도

탱고는 가르쳐 주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텔모 광장. 이곳은 춤추고 싶은 사람, 노래하고 싶은 사람, 인형극하는 사람들, 안데스에서 온 각종 악기 연주자들, 알록달록한 소란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 그야말로 세계의 여행자들이 모이는 장소다. 거리를 가득 메운 악사들과 탱고선생을 자처한 턱시도차림으로 머리에 기름범벅을 한 남자들은 왜 그리 넘쳐나는지, 영화에서 보던 히피족은 현실 속에서도 어쩜 그리 멋져 보이는지, 갖고 싶은 골동품과 미술품, 도자기들, 인형들은 왜 그리 넘쳐나는지,

연인들은 벽에 기대어 백 허그를 하거나 키스를 나누고, 가족들은 거리카페에서 따뜻한 홍차를 마시고, 친구라면 서로의 코드 깃을 세워주거나 스카프를 매만져 주기 좋은 날씨까지 매혹으로 넘쳐나는 곳 부에노스아이레스.

골목마다 넘쳐나는 무명 가수들 틈에서 유독 이들 곁에 오래 머무른 건 멋진 사운드 때문이었는데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지금도 후렴이 입가를 맴도는 노래 "Che Guevara, Che Guevara, Che Guevara....." 쿠바 혁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에바 페론만큼 자랑스러운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 이들은 비록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있지만 체 게바라 후예답게 음악에 대한 자부심만은 그 어떤 실천가 못지않은 거리의 음악인들이다. 어느 골목에선가 여전히 어제 일처럼 울려 퍼지던 노래 ‘Don't cry for me Argentina.’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면 혁명처럼 탱고에 미치든가 슬픈 음악에 미치든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8. 실비아

이름은 실비아인데 얼굴은 실비아가 아니다

피부는 검은데 속살은 검지 않다

손을 놓는다는 건 다 잃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다

냄비를 엎으면 며칠 먹을 빵을 업는 것이지만

실비아는 며칠 분의 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머리에 얹은 냄비 하나에서 손을 자유케 하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쥘 수 있다는 걸 아는 실비아

 

시야를 가리는 붉은 먼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사부작사부작 걷고 있는데 풀숲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큰 냄비를 머리에 인 소녀가 날듯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소녀도 혼자고 나도 혼자다. 나는 놀라지 않았으나 방금 전까지 나풀거리듯 두 팔을 팔랑팔랑 흔들며 걷던 소녀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냄비에 손이 가는 걸 보고 놀랐다는 걸 알았다.

소녀의 이름은 실비아다. 영어이름 말고 그의 나라 이름(치체와어)을 가르쳐 달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왜냐고 묻지 않았다. 소녀는 태어날 때부터 실비아였을 것이다.

몇 마디 오갔을 뿐인데 실비아가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수평이 흔들릴 때마다 줄 위의 광대처럼 조금씩 고개를 갸웃 하기만 하면 금세 원상태로 돌아갔다. 나는 소녀의 머리에 붙어있는 것이 빈 그릇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그 속엔 팔아야할 콩이 가득했다.

의심은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냄비 안에 가득 담긴 콩을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뭐 그럴 수 있지 했으나 보고 난 후 내 마음 상태는 달랐다.

실비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냥 하면 돼요

어떻게?”

그냥요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의심하면 안돼요’ ‘머리로 배우는 것 말고 몸으로 이해해야 해요’ ‘당신도 해봐요, 나처럼 이렇게 말이에요.’가 들어있었고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물동이든 콩냄비든 믿고 맡기면 그분이 모두 알아서 붙잡아 주신다는 걸. <<아프리카 잠비아

#9. 바람둥이 마제르 압둘 라임

ISTANBUL LALELI CAMII

여긴 무슨 일로?”

난 여행자야

어디서 왔는데?”

아시아, 한국

난 카이로에서 왔어. 일 때문에 여기 머물고 있는데 2주 후쯤 돌아갈 거야. 그때까지 네가 여행 중이라면 먹고 자는 것 다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이집트 여행 어때?”

이 남자, 만난 지 10분도 채 안된 여자한데 이집트여행을 책임져 주겠다니, 너무 파격적인 제안 아닌가. 그렇다고 외로움에 절어있던 여행자의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면 거짓말, 조금 아주 조금 움직이긴 했다. 모처럼 나도 잘 하지 못하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그랬고, 다른 하나는 드러내놓고 바람둥이라 했던 솔직함이 오히려 편했다.

마제르와 나는 누구의 도움도,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는 말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친근함을 과시라도 하듯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거나 머리칼을 만지며 이집트 남자들의 특기인 플레이보이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마제르! 너 조금 전에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나왔잖아, 이래도 되는 거야?”

괜찮아, 뭐가 어때? 필이 꽂히는 여자를 보면 남자들은 누구나 사랑을 느끼는 거 알라신도 다 알아. 만약 그것이 죄가 된다면 다음 기도시간 전에 몸을 씻으면 돼

까만 눈과 까만 머리 이거 본래 이래? 넌 터키를 며칠이나 여행했지? 언제 돌아갈 거야?”

넌 내가 몇 살쯤 보여?”

“22

뭐시라?”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 마제르, 내가 얼마나 힘들게 먹은 나이인데 무슨 귄리로 남의 나이를 반도 더 깎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그냥 멍하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그 한 가지만 봐도 마제르가 얼마나 순진한 바람둥이인지 알고도 남았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 듯하게 해야 넘어가든지 말든지 하지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무슬림 남자들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간 모스크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동안 마제르와 말장난을 즐겼다. 모든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이 그랬듯 심오하거나 무거운 대화가 아닌 것도 좋고, 스스로 바람둥이라 했지만 몸을 사려야할 만큼 치근대지 않는 것도 좋았다.

마제르가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나와 함께 사진을 찍기를 청했다.

괜찮지?”

그럼, 괜찮고 말고

10년 사귄 연인처럼 마제르는 감싸듯 내 어깨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복도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술을 부리며 내 머리칼을 흩날리자 마제르는 그 투박한 손가락으로 내 긴 머리를 빗어 주었다.

고마워, 마제르!”

사진을 몇 컷 찍고 나서 디지털 액정에 나타난 둘의 모습을 보여주며 깔깔깔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래 킴?”

네가 너무 핸섬해서, 아냐 그냥 네가 좋아서

으흠 그렇지? 나도 네가 좋아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다소 노련하게 응수했다.

한참 후 마제르가 다시 채근하기 시작했다.

, 아까 말했잖아. 함께 이집트를 여행하자고, 나 말이야 이 도시에서 돈도 좀 벌었거든. 카이로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신 줄 알아? 밤마다 피라미드에 조명을 하지, 달빛 아래에서 보는 피라미드는 완전 환상이야. 내 고향에도 널 데려갈 수 있어. 어린 당나귀가 풀을 뜯는 시골 어때? 난 네게 당나귀를 태워줄 수도 있으니 그거 너무 낭만적인 거 아냐? 강에도 함께 가는 거야. 난 맨 손으로 고기를 잡을 수 있고 수영도 잘 해. 그러니 나와 이집트 가는 거 어때?”

그가 쉬지도 않고 내 턱밑에 앉아 속도감 있게 유혹의 품목들을 쏟아 붓고 있었다.

좋은 제안이야. 그렇지만 생각할 시간을 줘. 그 답은 내일 말해주면 안될까?”

내일도 나는 이 시간에 기도하러 이 자미에 올 텐데 그때 봤으면 좋겠어, 물론 넌 내 맘에 드는 답을 주겠지만....”

좋아, 그럼 내일.....”

이쯤 되면 다들 그 다음이 궁금해지겠지. 그렇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꼬맹이 철수와 영희가 함께 했던, 시간이 가면 모두 부도수표가 되는 소꿉놀이 같은 거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다음 날, 마제르가 손발을 씻고 알라께 예배드리기 위해 자미에 있을 시간, 한 달의 여행을 무사히 마친 나는 서울 행 비행기 안에서 정신 나간 여자처럼 키들거리며 기내식으로 나온 오랜만에 먹어보는 비빔밥을 허겁지겁 입안에 넣고 있었으니.

미안하다. 순진한 바람둥이 마제르 압둘 라임!

네가 나를 꼬드기느라 안달을 부릴 때 난 다른 남자를 생각했거든, <<터키 이스탄불

 

김인자 - 강원도 삼척 출생, 신춘문예으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 슬픈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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