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신작소설/이종하/저녁 하늘
페이지 정보

본문
이종하
저녁 하늘
“저놈 하는 말 좀 봐라.”
“틀린 말도 아닌데, 뭐.”
“박가, 또 빈정 상했구나.”
“왜요.”
“텔레비전만 보면 항상 삐딱하게 말하잖아.”
“삐딱한 게 아니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거지.”
“텔레비전을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들을 삐딱하게 보는 거지.”
“뭐가 사실인데요?”
“박가 말이 맞아. 일흔아홉 살에 벼슬하겠다고 나선 건 한참 잘못된 거지.”
“일흔 아홉 살이 문제가 되면 안 되지. 능력이 있으면 뭔들 못하나.”
“능력이 아니라,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떨어졌다고 하잖아.”
“나이가 일흔 아홉이면, 할 수 있는 일만 해야지.”
“일흔 아홉에 낙하산을 탈 정도면 대단한 거 아닌가?”
“누가 낙하산을 탔는데요?”
“너는 끼어들지 마러. 낙하산도 모르면서 어딜 끼어들어.”
“할 수 있으니까 하겠다고 하겠지.”
“마음이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마음처럼 될 게 따로 있지. 일흔 아홉 살에 벼슬은 안 되지.”
“그럼요.”
“너는 뭘 안다고 훈수를 두냐.”
“평생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인데, 나이 일흔 아홉 살이 되어서 처음 하는 일을 할 수 있겠다고 나서면 그건 노망난 거지.”
”맞어. 그것도 나랏일을 잘하는지, 나랏돈을 잘 쓰는지 감사(監査) 하는 일이라잖아.”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왔던 사람이니까, 저 양반 정도면 잘 하겠지요.”
“나랏일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래서 똑똑한 놈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야 하는 거라고.”
“텔레비전에서 나와 떠드는 놈 치고, 정신 제대로 된 년놈 하나 없더라.”
“그건 맞아. 텔레비전에 일삼아 나오는 것들은 모두 거짓말 꾼이야.”
“그건 그래요.”
“너는 뭘 알아서 그것이 그런데?”
“그런 형님은 왜 걸핏하면 나를 무시하는 건데요.”
“내가 언제 무시했는데?”
“지금도 그랬잖아요.”
“그만 하자.”
“왜 그만 해요.”
“니가 자꾸 그러니까 무시당하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가가 착해서 그렇지, 무시당하는 건 아니다. 우리 동네에서 누가 이가를 무시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듣지만 말고, 하고 싶은 말은 하라고.”
“그러다 한 대 맞으면 누가 아픈 건데요?”
“지금 이 시국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통령선거 할 때도 그렇고, 국회의원 선거 할 때도 후보들은 다 거짓말만 한다는 거야.”
“그건 맞는 말이네. 당선되면 힘이 생기니까, 거짓말 한 것들 다 덮어버리던가, 요즘 애들 말로 쌩까면 되더라고.”
“대통령도 자기만 뽑아주면, 국민을 위해서 뭐든지 다하겠다면서 착한 얼굴로 온갖 거짓말은 다 했잖아.
“근데, 우리 지금 뭐 때문에 이렇게 하찮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좋은 밥 먹고, 정말 그러네요.”
“저기 텔레비전에서 나리님들이 국정감사인지 국정질문인지 하잖아. 그런데 하는 말들이 하도 한심하니까 하는 말이지.”
“여전히 지랄들이네.”
“박가, 또 지랄이다.”
“내가 왜. 나이 일흔 아홉에 벼슬하겠다고 나선 것은 정말 아니잖아.”
“노망 난 거지.”
“그런데 이쪽 국회의원들은 한 술 더 뜨잖아. 일 그만 하고 쉬어여 할 나이라고 말한 저쪽 국회의원을 싸잡아 나쁜 놈으로 몰아가잖아.”
“일흔 아홉 살이면 쉬는 게 맞지, 왜 일 못해서 저 난리를 만들었데.”
“이건 노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지. 사십 년 동안 교사생활 한 나도 정년퇴임하고 조용히 사는데.”
“맞어, 그럼 나이 먹었다고 정년퇴임시키는 것들은 다 노인 무시하는 거잖아.”
“그렇지. 솔직히 일도 해야 할 나이에 해야지. 내가 지금 칠십 둘인데, 솔직히 동네일에 끼어달라고 하면 민폐지.”
“그건 또 그렇네. 젊은 사람들한테 잔소리밖에 할 일이 더 있겠어.”
“우리가 대접받으려면 우리가 잘 해야 한다고.”
“끼어들 자리도 구분 못하면서 아무데서나 나이 먹었다고 유세하면 망신만 당하는 게 당연하고.”
“근데 저것들은 언제까지 저 소리만 할 참인가 모르겠네.”
“허구한 날 지껄여대는 똑 같은 소리에 지덜도 지겨울 텐데.”
“정말 저것들 얼굴 보는 것도 징글징글 맞다. 나라가 어찌 돌아가려는지, 눈뜬 봉사로 살아가던가, 귀머거리로 살아가든지 해야 지, 원.”
“정말여, 대한민국은 저놈들이 다 망해먹고 말 거여. 하기야, 옛날에도 정치하는 놈들이 나라 다 망해먹고, 팔아먹고 그랬지.”
“열 그만 받고, 다른 데 돌려 봐.”
“그만 끄고, 막걸리 내기 장기나 두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저것들 큰 어망으로 쓸어서 동해바다에 빠뜨려버리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텔레비전 얼렁 꺼버려.”
“일 반하고 삼 반, 단판으로 한 번씩 하지요?”
“각자 천 원씩 묻고 하자.”
“근데 오늘은 할망구들이 하나도 안 보이냐?”
“복지회관에서 무슨 여성연합회가 와서 대접해준다고 갔잖아요.”
“아침나절에 부녀회장이 집집마다 찾아가서 데리고 갔어.”
“나이 먹으니까 여자들만 대접허는 건 무슨 경우냐.”
“대통령도 여자잖아요.”
“이런 시국에서 우리들은 나 죽었다, 하고 숨만 조심조심 쉬고 있어야 혀.”
“마져, 대접 더 받으려고 하다가는 그나마 이런 경로당에 발도 못 디밀 걸.”
“요즘에는 여자들이 너무 나대서 큰 일 한번 치를 거여.”
“그런 소리 마러요. 큰일 나요.”
“말조심 혀. 요즘 시대는 감청 시대라는 거 몰라.”
“그려, 입 다물고 장기나 두자.”
군업리 경로당에 모인 여섯 명의 남자들은 점심을 차려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참을 동문서답 하더니 장기판 하나를 두고 양쪽으로 갈라져 앉았다. 참을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각자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씩을 꺼내 장기판 아래에 묻어두었다. 박 씨는 그나마 천 원짜리 서너 장이라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1반에서 고수인 조 씨와 3반에서 고수인 정 씨가 말을 잡았다. 일흔 일곱 살이고, 학교 선생님 출신인 조 씨가 연장자여서 한(漢) 말을 잡았고, 평생 한량 농사꾼으로 살아 온 일흔 두 살인 정 씨가 초(楚) 말을 잡았다. 이 씨하고 코 작은 조 씨가 조 씨와 같은 팀이다. 세 사람은 조가터에서 태어난 토박이들이다. 조 씨와 코 작은 조 씨는 오 촌 벌 되는 집안인데, 코 작은 조 씨가 나이는 네 살 어리지만 촌수로는 아저씨였다. 그리고 작년에 칠순잔치를 요란하게 치른 이 씨는 일제강점기 때 할아버지가 가솔들을 데리고 들어와 지금 경로당 바로 앞에 터를 잡으면서 살기 시작했다.
정 씨가 먼저 출전한 3반은 당무 마을이다. 한 때 느타리버섯 농사를 크게 짓던 박 씨와 전 이장 출산인 이 씨가 한 팀이다. 당무는 열일곱 가구가 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조가터에서는 십오 리 길이다.
정 씨는 일흔 두 살이지만 총각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을 하면서 처갓집 동네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데, 오 남매 중에 세 째로 태어나서 몇 해 전까지 돌아가신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초등학교를 졸업한 형하고 누나는 이미 동네 밖으로 돈 벌러 나가 있었다. 결국 정 씨는 어머니와 함께 두 동생을 챙기느라 중학교 진학도 포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흔 한 살인 박 씨는 서울에서 이십 년 전에 귀농했는데, 본래 고향은 전라도이다. 일천구백구십 몇 년에 서울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와 느타리버섯 농사를 짓겠다며 당무 초입에 있는 마나리 골짜기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씨는 예순 여섯 살이다. 경로당에서 막내다. 임기 이 년인 동네 이장을 다섯 번이나 하면서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으로 통했다.
군업리는 4반까지 있다. 1반인 조가터에서 4반인 도광터 끝집까지는 삼십 리 길이다. 춘천에서부터 시작되는 56번국도 홍천 구성포 교차점에서 서석 진부 방량으로 달리다보면 말고개를 넘어서게 되는데, 다 넘어서면 열두 집이 한눈에 보이는 마을이 있다. 조가터다. 집이 골짜기에 들어가 있어서 고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집도 열한 집이 있다.
마을이 약간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서 공작산으로 향하는 우측에 466번 지방도로가 있다. 그 길은 우리나라 지도 남해안에서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축소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 1반인 조가터가 목포라고 가정하면 2반은 답련밭이고, 부산에 해당된다. 집이 부산에 있는 해수욕장처럼 개울가에 띄엄띄엄 있다. 3반은 당무인데, 강릉쯤 될 것이다. 당무는 아홉 가구가 한 눈에 보이는 둥그런 산 아래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골짜기에 있어서 마을 앞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집이 여덟 가구가 된다. 4반은 함흥 정도에 있다. 초입에 개울을 거너는 큰 다리가 있고, 다리 앞에 삼거리가 있다. 삼거리에서 바로가면 공작산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다. 사람 사는 집은 없다. 왼쪽으로 난 콘크리트길로 들어서면 사람 사는 집이 양지바른 곳에 하나씩 서 있다. 마을을 지나면 입산금지 푯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는 산이다. 높은 산은 없지만 능선이 구불구불 이어져 골짜기가 깊다. 가을 단풍이 곱고, 봄에는 구름꽃들이 만개해 연초록 잎사귀들과 어울러져 잘 그려진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그 산에서 봄나물과 가을에는 송이와 능이나 싸리버섯을 얻어 쏠쏠한 돈벌이를 한다.
466번 지방도로를 지나다보면 집이 띄엄띄엄 있다. 조가터에서 답련밭으로 가는 길 우측 개울 옆으로 몇 년 전부터 50대 초반 부부가 서울에서 귀촌하여 영업을 하는 펜션이 있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여수 정도가 될 것이다. 마산쯤에 동네 토박이 60대 후반 지 씨 집이 있고, 구십 도로 휘어지는 코너에 지난 해 팔순 잔치를 한 최 씨 할머니가 혼자 사신다. 최 씨 할머니 집 앞에 다리가 있고, 개울을 따라 들어가면 경찰관 부인이 하는 펜션이 있다. 펜션을 지나면 50대 후반이고, 올해 처음으로 마을 이장 일을 보는 부부가 사는 집과 새로 지은 집이 두 채 더 있다. 두 집 모두 60대 후반이다. 한 집은 대기업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임원까지 하고 퇴임을 했고, 뒷집은 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하고 내려온 부부다.
다시 46번 지방도로로 나와서 위로 올라가다보면 울산쯤에 해당하는 곳에는 70대 중반의 토박이 김 씨 부부가 사는 집이 있다. 포항쯤에 70대 초반의 조 씨 부부가 지체장애 아들과 살고 있다. 울진쯤에는 서울에 살던 40대 남자가 운영하는 펜션이 하나 있고, 삼척쯤에는 흙과 볏짚으로 지은 오래된 옛날 집이 있다. 십여 년 전부터 서울에서 근무하는 경찰관이 주말 농장처럼 이용하는 집이다. 집 맞은편에 골짜기로 들어가는 등산로 같은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들어서면 오래된 느타리버섯 재배하우스가 세 동이나 있다. 몇 년 전부터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보기 싫은 흉물이 되었다. 골짜기 이름은 마나리이다. 들어서는 입구는 좁은 등산로 같아서 경운기 한 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길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넓은 초지가 있다. 그 골짜기에서 박 씨가 이십 년 전부터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십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버섯재배도 포기하고 혼자 산다. 나이 먹은 박 씨 혼자 버섯재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다 수지도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강릉쯤에 서면 길 오른 쪽으로 넓은 밭이 있다. 군데군데 집이 있고,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산꼭대기에 통통하고 건강하게 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는 산이 당산(堂山)이다. 산꼭대기에는 매년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당(堂)이 있다. 그 당 옆에 수백 년이 된 암 소나무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여산(女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산 아래로 파란 함석집, 까만 기와집, 빨간 벽돌집, 마당 한 복판에 큰 밤나무가 있어서 집이 잘 보이지 않는 집도 한 채 있다. 올 봄에 새로 지은 이 층 벽돌집도 있고, 동네 이장을 다섯 번이나 한 이 씨가 사는 허름한 조립식 집과 오래된 옛날 집도 있다.
그리고 금강산쯤에 공작산오토캠핑장이 있다. 동네 토박이로서 새마을지도자인 40대 중반의 젊은 사람이 운영한다. 함흥 못미처 유명한 탤런트가 별장처럼 이용하는 황토집이 한 채 있다. 함흥쯤에 다리가 있다. 다리 앞이 삼거리다. 삼거리에서 공작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난 콘크리트길을 따라 들어가면 길 우측으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엄 씨 부부가 30대 중반의 장애인 아들과 함께 산다. 그 집을 지나면 길 우측으로 하얀 집이 한 채 있는데, 몇 년 전에 서울에서 살다 내려와 소설을 쓰는 50대 초반의 남자가 초등학생 딸과 사는 집이다. 그 집에서 개울을 건너면 더덕농사만 만 평 넘게 짓는 지 씨 부부가 산다. 그리고 백 미터쯤 더 들어가면 군업리 막내인 40대 초반의 홀아비가 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집이 개울 옆에 있다. 이백 보쯤 더 가다보면 50대 후반의 부부가 사는 집도 개울 옆에 있다. 그리고 삼백 보쯤 개울을 따라가면 지난해 팔순 잔치를 한 지 씨 부부가 사는 밤나무 집도 있다. 산 쪽으로 더 올라가다보면 서울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내려와 사는 집이 두 채 더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마을에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 이웃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얼굴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 마을 끝에는 입산금지 푯말이 크게 세워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그 산을 아홉마지기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좁씨 아홉 말을 뿌려 지을 수 있는 땅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는 설만 있다.
초 말을 잡은 정 씨가 먼저 왼쪽 졸을 옆으로 이동하자, 조 씨도 같이 움직였다. 정 씨가 오른쪽 차 옆에 있는 마를 포 왼쪽으로 옮기자 조 씨도 뚝 같이 움직였다. 정 씨가 포로 마를 넘어 궁 앞으로 이동 시키자 조 씨도 역시 똑 같이 움직였다. 정 씨가 이제부터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이라도 하려는 듯이 가슴을 한 번 쭉 펴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조 씨는 정 씨가 면포 앞에 있는 병을 옆으로 옮겨 상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아이구, 아이구, 형님, 먼저 궁부터 단속 해야죠.”
정 씨가 병을 한 칸 옆으로 옮기자 이장 출신 이 씨가 아쉬워했다.
“하수가 고수에게 훈수하려면 백 번은 더 생각해보고 하는 법이야.”
정 씨가 말했다. 이 씨는 정 씨보다 나이도 여섯 살이나 아래인 새까만 동생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려서부터 아래윗집에 살면서 장기를 가르쳐준 사람이 정 씨였던 것이다.
“깜박했네요. 죄송해요.”
이 씨가 정말 죄송한 얼굴로 말했다. 착하고 부지런한 성격처럼 모든 면에서 적극적인 이 씨다. 이 씨가 이장 일을 다섯 번이나 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당무 사람들과 조가터 사람들이 지금처럼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에서 마주앉아 마을일도 함께 의논하면서 지내게 된 것 때문이었다. 두 마을은 십오 리나 떨어져 있어서 마을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옛날, 그러니까 일천구백칠십 년대에까지만 해도 마을 일로 굳이 왕래할 일이 없었다. 행정구역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기 시작하면서 사람 수가 팍 줄어들더니 일천구백구십육 년에 군업리로 묶여버렸다. 조가터가 1반이 되고, 당무는 3반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주 시시콜콜한 일에도 대립하면서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길을 포장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농수로를 설치하는 일 등등 면사무소에서 하는 일마다 시비 거리가 생겼다. 그런데 이 씨가 이장 일을 보기 시작한 이천 년도부터 정월대보름이나 군에서 하는 읍면 대항 체육대회는 물론이고, 농번기를 앞두고 있는 마을 천렵이나 행사 때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다 함께 하자며 하도 간청을 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마을공동체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이장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이장 일을 맡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경로당도 이 씨가 이장을 보면서 새로 지은 것이고, 마을회관도 새로 지었다. 그때마다 어디에 경로당을 짓고, 마을회관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 씨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하고 싶은 말 다 들어주며 설득했다. 어쨌든 경로당도 짓고, 마을회관도 지어야 한다는 것에 마을 사람들은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 씨는 몇 달 동안 노력한 끝에 큰 갈등 없이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그래서 이 씨가 큰일을 한 것으로 마을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이 씨의 좋은 성격도 한 몫을 단단히 했지만, 워낙 부지런하고 바른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서 그가 하는 일에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기 기술자 출신이라 집안에는 콘크리트 벽을 뚫는 연장은 물론이고, 전기톱과 전기 대패 갖가지 종류의 전기 드릴 등등의 연장이 다 있었다. 게다가 경운기가 되었든, 트랙터가 되었든, 전기밥솥이 되었든, 고장 난 농기계나 전기제품을 굳이 찾아다니면서 뚝딱 뚝딱 고쳐주었다.
이 년이 임기인 이장을 두 번째 시작할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인생 상담은 물론 법률상담과 군청민원 상담, 그리고 심지어 갈등 관계에 있는 가족문제 상담까지 하기 시작했다. 민원 상담은 이장이니까 면사무소나 군청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면 해결되는 일과 왜 해결되지 않는 일인지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별 일은 아니었다. 법률상담은 애초에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니 다 듣고 나면 속상하겠네요, 하면 다 끝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인생과 가족 간의 갈등 상담이었다. 사위나 며느리하고 갈등, 애지중지 키운 아들딸과의 갈등이 집집마다 소설처럼 쓰여 있었다. 나이 많은 어른일수록 그 한이 깊었고, 한번 시작하면 쉽게 멈추지 못했다. 그때마다 소설을 읽는 게 아니고 듣는 기분이었는데, 그것도 장편소설이 거의 다였다. 소설 내용도 구체적이어서 하루 종일을 들어도 다 듣지 못했다. 말하는 사람도 지치고, 듣는 사람도 지치면 다음에 마저 하자면서 일단은 멈출 수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는 다음 날 다시 찾아가 소설을 쓰는 어른이 결말을 낼 때까지 듣고 또 들어줬다. 그래야 상담이 끝나기 때문이었고, 소설을 다 쓰고 나면 스스로 그 갈등을 해결하는 답을 찾기 때문이었다. 결국 스스로 답을 찾은 어른들은 자신이 쓴 소설이 겸연쩍은지 대부분 미안해했다. 고마워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었다. 하찮은 자신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내 주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프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다 그렇게 사는 거죠 뭐, 인생 별거 있나요.”
소설을 다 듣고 나서 그가 해주는 말이다. 더 보태지도 않고, 뺀 것도 없다. 이러쿵저러쿵 보태려고 해도 아는 것이 없고, 말재주도 없었다.
이 씨는 서른다섯 살에 홀아비가 되었으니 삼십 년이 넘었다. 아들 둘을 키웠다. 큰 애가 다섯 살이고, 작은 아들이 세살 때 아내가 배신을 하고 집을 나가버린 한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친척 아저씨가 하는 전기공사 일을 따라다니며 배운 이 씨가 서른 살에 읍내에서 사업장을 내고 전기공사 일을 할 때였다. 벌어주는 돈이 모자라지 않았다.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는 소문이 돌아 관내에서 신축하는 관공서 건물의 전기 공사는 거의 다 맞았다. 군청 과장들보다 돈을 더 벌었다. 직원 둘과 바쁘게 일을 다니다보니 밤낮은 물론 주말도 없이 돈만 벌 때였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자동차 영업을 하는 남자랑 눈이 맞아 매일 눈만 뜨면 일하러 다니는 이 씨 보다 더욱 바쁘게 춘천과 원주로 원정을 다니면서 바람을 피웠는데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내는 이 씨가 힘들게 벌어다 준 돈을 다 썼는지 사업을 하다 보니 만들어놓은 은행의 마이너스통장 두 개를 가득 채워가면서 돈을 챙겨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절망할 시간도 없었다. 아들 둘을 데리고 열심히 살아야했다. 옆 동네에 사던 누나에게 아들의 보육을 부탁하고, 씩씩하게 일을 다녔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술이 늘었고, 몸에 힘도 빠져서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었다. 돈이 생기면 여자들이 있는 술집에 가서 밤새 정신을 놓기 일쑤였다. 술 주사가 늘어 걸핏하면 시비가 일어났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보니 정말 사는 게 아니었다. 작은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읍내에서 하던 사업장을 포기하고, 어머니 혼자 사시던 시골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술만 마시면 주사를 부리는 홀아비 아들과 엄마 없는 손자 둘을 건사하면서 한숨만 쉬더니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잠든 것처럼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날 저녁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뜬금없이 해주었는데, 그 말이 유언이 되었다. 저녁에 잠든 어머니가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 이 씨는 항상 밝은 얼굴이었다. 어머니를 자신이 두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옆에 묻어드리면서 울지 않고 웃었던 이 씨였다. 그런 이 씨를 보는 마을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지만, 그때부터 술을 마셔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걸핏하면 주사를 부려 마을 사람들의 마음 밖에서 존재했던 이 씨가 아니었다. 몇 해 동안 매년 풀밭으로 만들었던 땅에다 비닐하우스 다섯 동을 지었다. 애호박과 오이농사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잠을 물리치고 웃으면서 일했다. 두 아들에게 항상 웃는 아빠가 되기로 작정을 하고나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실실 웃기만하니까 신경 쓸 일도 거의 없었다.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 앞에서는 힘내라며 웃어주고, 좋아서 웃는 사람 앞에서도 함께 큰 소리로 웃어주니까 사람들이 다 좋아했다. 그렇게 십 년 정도를 살다보니까 얼굴색도 좋아지고, 두 아들도 좋아졌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 여자 선생들도 좋아했고, 면사무소 직원이나 농협 직원, 그리고 읍내 마트 여직원들과 우체국 집배원들까지도 사람대접 해주었다. 그래서 쉰 살이 넘어 이장 일을 보게 되었다.
홀아비로 살다보니까 마을 일을 보는데 큰 장점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여유가 생겼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급한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서자 시간이 넉넉해졌다. 욕심을 털어버리니까 꼭 필요한 것도 별로 없었다. 굳이 가져야 할 것도 없었고,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만 쳐다보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아깝다. 상으로 병을 쳤어야죠.”
정 씨가 궁밭을 단속하기 위해 궁을 내리자 코 작은 조 씨가 갑갑하다는 듯 가슴을 한 번 툭 치더니 말했다. 정 씨는 자신이 조 씨를 이길 때 매번 상으로 장군을 쳐서 이긴 것을 코 작은 조 씨가 기억하고 있음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그래서 병으로 상을 유혹한 것이다. 하지만 병을 하나 먹기 위해서 상이 올라가는 순간 마에게 길이 막히고, 차에게 죽게 되는 수를 정 씨는 확인해두고 있었다.
“너는 지금 누구 훈수를 두는 거야?”
조 씨가 말했다. 정 씨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머릿속에 안 속는다, 라고 큼지막하게 써 두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상을 아껴두면 조 씨의 최대 약점인 막판 실수를 노릴 수 있다. 조 씨는 다소 흥분하거나 대국이 길어지면 멀리 있는 상길을 잘 읽지 못하는 편이었다. 차로 공격하는 길은 세 수 정도를 내다보지만, 상과 포를 함께 이용한 공격에는 맥을 못 추는 편이었다.
조 씨가 우측 마를 혼자 있는 병 앞으로 전진시켰다. 정 씨는 포 앞에 나와 있던 상을 처음에 있던 자리가 아닌 곳으로 후퇴시켰다.
“아따 형님, 왜 공짜를 안 먹어요.”
코 작은 조 씨는 초의 상 길에 혼자 있는 한의 병을 왜 먹지 않는지 정말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정말 누구 훈수를 두는 거야.”
조 씨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이게 무슨 훈수예요. 손에서 말을 놓고 나서 한 말인데요.”
코 작은 조 씨가 특유의 과장된 몸짓까지 써가면서 말했다.
“가만히 좀 두고 보라고.”
조가터 이 씨가 참견했다. 장기 수를 보는 눈이 조가터 조 씨나 당무 정 씨에게 떨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정 씨는 오히려 이 씨가 두는 수비위주의 면상 장기에 속수무책으로 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이 씨는 조 씨에게 세 판을 두면 두 판을 지는 편이었다. 이 씨는 조가터에서 큰형님 노릇하는 조 씨에게 무엇을 하든 이겨야 본전이라는 말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조 씨가 고민하더니 중포 앞에 있던 마를 초의 병 옆 줄 앞으로 옮겼다. 중포를 공격하겠다는 것이 너무 훤하게 보이는 수지만, 마의 길을 막기 위해서 좌측에 혼자 있는 병이나, 중포의 길을 열어주거나 막아주기도 하는 병을 마 앞으로 옮기면 적의 공격 첨병인 마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되고, 초의 궁밭을 공격할 수 있는 진영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정 씨는 그 수를 대비하여 준비해두었던 궁 옆에 있던 마로 한의 마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한의 마는 양쪽으로 병을 거느린 초의 마에게 가로막혔고, 초의 병을 위로 올리기 전에 후퇴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현재까지 정 씨는 한의 기물 중에 상 하나와 병 두 개, 그리고 포와 사를 하나씩 잡았다. 반면 마와 병, 그리고 차 한 개씩을 잃었다. 차를 잃은 것은 포와 사를 묶어 먹는 계획대로 맞바꾼 것이다. 마는 상과 병 하나와 맞바꿨고, 병은 상을 잡기 위해서 전사한 것이다. 그러니 정 씨 입장에서 보면 초반 기물 싸움에서 이겼다. 궁밭 단속도 잘 되었다. 이제부터는 상과 마를 전진 배치하고, 포와 차는 상과 마의 뒤에서 엄호사격을 해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조 씨는 늘 정 씨와 대국을 하다보면 사와 포를 너무 일찍 잃게 되는데, 이번에도 똑 같은 수에 당한 것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공격을 해야겠는데, 마땅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나갔던 마를 돌려세우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삼십 수도 놓기 전에 밀리는 판세가 되었다.
“장기 두는 사람, 개 밥 주러 갔나.”
정 씨가 말했다. 조 씨는 장기 둘 때마다 다섯 살이나 어린 정 씨가 혼잣말처럼 흘리는 반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알고면 정 씨는 마을 누구에게나 반말로 상대한다. 40대 때부터 그랬다. 돌아가신 어머니 또래 어른 분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노인네란 호칭으로 통일해서 부르고 다녔다.
조 씨가 냉정히 판세를 분석해본다. 이번 대국에서도 정 씨를 이길 수 없는 판세였다. 아무리 기를 쓰고 버틴다고 해도 앞으로 열다섯 수 정도면 외통에 걸려 항복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을 비우니 장기 한판 지는 거 별 것도 아니었다. 코 작은 조 씨가 착한 막내 이 씨를 쉽게 이길 것이고, 마나리 박 씨와 조가터 이 씨는 막상막하의 실력이지만, 대체로 승부욕이 남달리 강한 이 씨가 이기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팀 대국에서는 조가터가 본래부터 유리한 구성이었다. 3반 당무 멤버 세 명 중에 정 씨를 뺀 두 명은 1반 조가터 멤버 세 명 중에 아무나하고 붙어도 이길 가능성이 매우 낮은 실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장기 한 판 지는 건데, 오늘따라 눈물샘을 자극하는 옛날 생각들이 눈앞에 있는 장기판의 기물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 십 수 년이 지났는데도 뜬금없는 기억이 눈두덩을 뜨겁게 달구었다.
조 씨는 교사 생활 40년을 하고 정년퇴임을 했다. 마지막 몇 년은 교장으로 일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누군가를 이기려고 한 적 없었고, 제자들에게도 누군가를 이기려고 기를 쓰는 사람은 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기를 쓰고 이기려고 하는 사람은 이겨야 본전이므로 본전인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학교에서 나와 보니 세상은 전쟁터였다. 동네 경로당에서 두는 장기판에서도 이겨야 대접받고, 가까이에 있는 이웃사촌과 마음 나누기보다 이해득실을 따져야했다. 일가친척이라면서 보험이나 이런저런 계약서를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 빈손으로 돌려보내니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이었다.
“장기 두던 사람 할망구 빤추 구경하고 있나.”
정 씨가 허풍스럽게 말했다.
“볼 것도 없는 거 괜히 구경했네, 이 사람아.”
조 씨가 말하면서 마를 본래 있던 중포 앞으로 후퇴시켰다. 그러자 코 작은 조 씨하고 조가터 이 씨는 판세가 기울어졌다는 것을 마주보면서 눈빛으로 교환하더니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면서 나갔다. 일종에 작전회의를 할 요량이 분명했다. 이 씨가 무엇을 하던 지고는 밤잠을 못자는 사람이니 마음이 여린 코 작은 조 씨에게 단단히 주의를 줄 것이다. 더군다나 귀하디귀한 천 원을 장기판에 묻어두었으니 질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제1대국에서 조가터 조 씨는 마흔아홉 수만에 항복했다. 두 번째 대국은 코 작은 조 씨와 착한 막내 이 씨가 맞붙었다. 정 씨는 코 작은 조 씨가 포를 하나 떼고 두어야 한다고 몇 번을 요구했지만 한판을 진 이 씨가 내기 장기인데 그럴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승부욕이 없기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코 작은 조 씨가 장기판을 보고 산 구력이 한참이나 오래되었다. 착한 이 씨는 홀아비로 살면서 농사도 지으며, 이장 일을 보느라고 장기판과 친해진지 겨우 한 해 정도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나 다름없었다. 큰 아들은 회사일이 바쁘다고, 주말에도 학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너무 바빠서 어떡할 수 없다며 명절 때나 얼굴 내밀었다. 지나해 결혼한 둘째 아들도 총각 때와 달리 발길이 뜸해졌다. 맞벌이를 하는데, 주말에도 바쁘다면서 어쩌다 한번 얼굴만 내밀었다가 돌아갔다. 명절 때도 집에 있는 날이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경로당 출입을 시작했다. 바쁜 농사철에도 혼자 먹는 밥이 싫어 굳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경로당까지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그러면서 장기판과 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초등학교 때 윗집 형인 정 씨에게 장기를 처음 배운 이 씨가 나이 들어 정 씨에게 다시 경로당 장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심을 먹고 한판씩 두는 장기에 재미를 붙였다. 이기고 지는 것은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대국을 시작한 지 십 분 만에 판세가 거의 기울어졌다. 코 작은 조 씨의 속전속결 전법에 덩달아 바쁘게 두다보니 정신이 없었다. 이 씨가 상 하나와 병 두 개를 먹는 동안 차와 상, 그리고 마와 포를 하나 씩 잃었다. 게다가 병 두 개는 꼼짝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잡히고 말았다.
“아니야.”
정 씨가 말했다. 착한 이 씨가 중포로 마를 잡았다가 정 씨 말에 감전된 듯 손이 장기판 위에서 멈추었다. 이 씨는 마가 중앙으로 나오자 공짜인 줄 알고 냉큼 잡았는데, 상 길이었던 것이다. 코 작은 조 씨는 이미 상으로 포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수불퇴 몰라. 빨리 손 떼.”
옆에서 지켜보던 이 씨가 말했다. 착한 이 씨의 중포가 잡히면 다섯 수 안에 초의 궁은 피할 길이 없어질 것이다. 포를 취한 상이 뜨면서 포 장이 되고, 다음은 측면의 차가 나와 장군을 치면 초의 궁은 밑으로 내려야 한다. 그 다음은 상이 장군을 치면 초의 궁은 피할 길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엥, 먹고 죽는 놈은 때깔도 좋다는데…….”
착한 이 씨가 한의 마를 잡고, 포를 두고 손을 뗐다. 굳이 고집 피울 일도 아니었다. 이기기는 애초부터 힘든 대국이었다. 얼른 항복하고 박 씨와 이 씨의 대국을 구경하는 게 훨씬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상에게 죽게 되는 마를 피했다. 그러나 조 씨는 상을 옮기면서 포로 장군을 불렀고, 궁을 옆으로 피하자 이번에는 구석에 있던 차로 장군을 불렀다. 그래서 궁을 궁밭 우측 모서리로 내리자 상이 펄쩍 뛰어와 장군을 쳤다. 궁밭 한복판으로 들어가면 한의 중포에 죽고, 위로 올리면 차에게 죽으니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박 씨는 마음이 심란해서 장기판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이 씨가 고개를 푹 숙이고 집중하는 것만큼 박 씨는 어떻게든 정 씨나 착한 이 씨가 모르게 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솔직히 승부욕 강하고 팔자 좋은 이 씨를 이길 기력도 없다. 주말마다 아들딸이 며느리하고 사위를 데리고 다녀가면서 용돈하고 생활비 넉넉하게 쓰라고 주고 갔다는 자랑을 들어주는 것도 몇 년 동안 밥 먹듯이 했다. 게다가 이런 게임에서 이기면 후환이 더 무섭다. 먹을 걸 사와가지고 은근 슬쩍 왕따시키는 이 씨의 교활함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는 게 속이 편할 것이다.
초반부터 장고를 두던 이 씨가 중포 앞으로 마를 이동시켰다. 성격이 급한 박 씨는 느릿느릿 두는 이 씨에게 말려들어 엉뚱한 실수를 곧잘 하는 편이었다. 박 씨는 지더라도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 동안 잘 두지 않던 면상 장기로 시작했다. 상을 궁밭 중앙에 앉혀놓았고, 병도 중앙으로 모았다. 그러다 길을 몰라 실수하는 것처럼 포를 먼저 주고, 마도 주고, 상도 주다가 차를 주면 지게 되는 것이다.
박 씨가 늘그막이 마음 고생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 돈 때문이다. 매일 통장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돈 자랑하는 이 씨가 부러웠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 씨에게 면박을 주기도 하지만, 나이 먹어서 죽을 날 기다리는 사람끼리 모여 앉아 그런 자랑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젊은 세월을 교사로 살면서 모아놓은 재산 충분하고, 자식들 교육 잘 시켰고, 정년퇴임 한 후에는 매달 연금을 꼬박꼬박 받으면서도 언제나 돈 없다면서 짜장면 한 그릇 사지 않는 조 씨가 정상 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박 씨는 귀농한 지 이십 년이 조금 지났다. 어머니가 도시 생활을 너무 힘들어해서 쉰 한 살에 귀농을 결심한 것이다. 자식 셋을 자기들이 배우고 싶은 만큼은 가르쳤다. 첫째는 전문대를 졸업해서 취직했고, 여식인 둘째와 막내아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을 졸업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귀농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구두공장에서 만난 아내와 사글세방에서 동거를 시작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며 집도 장만을 하고 살만하니까 이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내에게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더욱 악착같이 일해서 자식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마저 허망하게 돌아가시게 할 수 없어서 공기 좋고 물 좋은 산골마을로 이사했다. 그래서 몇 달밖에 못살 것 같던 어머니가 십년 세월을 흙냄새 맡으면서 살다 돌아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박 씨는 이백만 원이 넘는 농협 이자를 일 년 동안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연체 독촉장을 받아온 지 몇 달이 지났다. 서울에서 하던 구두공장 처분하여 마련한 이천 평 되는 땅을 다 팔아먹고, 이제 남은 땅도 삼백 평밖에 안 된다. 그것도 진입로가 없는 땅이어서 제 값도 못 받는다. 이미 사용 정지된 휴대전화 요금 독촉장도 급하지만, 3개월이나 밀린 전기세가 더 문제였다. 어제는 한전 직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와 이달 말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전기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귀농하여 시작한 느타리버섯 농사 십 년 만에 빚만 늘어나면서 땅을 팔기 시작했다. 다행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럭저럭 살만해서 추한 모습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해 처음으로 천 평을 팔아 빚을 다 갚았지만, 오백 평을 더 팔아먹는데 삼 년밖에 안 걸렸다. 그렇게 팔다보니 이제 남은 것은 삼백 평이고, 통장에서 돈을 꺼내 생활비로 쓰다 보니 어느 덧 이천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에 잔액이 없다. 나라에서 매달 주는 노인들을 위한 돈도 이자로 나가서 만져보지도 못한다. 착한 이 씨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자식들이 있어서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에 속하지 못했다. 몇 해 전부터는 기력이 없어 그나마 생활비를 조금 벌어 쓰던 느타리버섯 재배를 포기했다. 입에 풀칠은 해야 해서 묵히는 땅을 얻어 풋고추 농사를 지었지만 매달 생활비로도 모자랐다. 돈이 떨어지니까 아들도 찾아오는 날이 뜸해지고, 딸도 사위 눈치를 보는지 이 년 전부터 발길을 뚝 끊었다.
“형, 무슨 생각해. 포 잡히잖아.”
경로당 막내 착한 이 씨가 말했다. 박 씨가 장기판에서 나가 있던 정신을 수습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포는 다른 기물을 넘어가야 하는데 도망 갈 길이 없다. 포가 잡히고 나면 궁밭을 집중적으로 공격당할 것이다. 막을 기물이 없다. 이제야 기를 써본 들 이기기에는 불가능한 대국이었다.
“졌어. 박가, 오늘 정신 나갔구만. 손 털고 일어나.”
군업리 경로당에서 고수로 인정받는 정 씨가 먼저 손을 털며 일어났다. 착한 이 씨도 일어났다. 박 씨는 장기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임에 져서 억울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더는 이 좋은 게임도 즐길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짙푸른 물결처럼 온몸으로 퍼져들었다.
“막걸리 마시고 가야지.”
조 씨가 말했다. 정 씨는 벌써 현관 문지방을 나서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정 씨는 젊은 시절부터 늘 들어오고 나가는 타이밍이 몇 걸음 빠른 편이었다.
“아직은 죽기 싫어. 얼른 가서 집 나간 백구나 기다려야겠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정 씨가 집 밖에서 술을 마실 리가 없었다. 화물차운전을 하고 다니는 착한 이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씨가 박 씨를 일으켜 세웠다. 마나리까지 십 오리 길인데 박 씨 혼자 걸어가게 할 이 씨가 아니었다. 박 씨가 경운기라도 타고 왔으면 그냥 가겠지만, 아침나절에 일부러 박 씨 집까지 들어가서 태우고 왔던 이 씨였다.
“그 놈도 밥 벌러 나갔는가본데, 뭘 기다려.”
키 작은 조 씨가 말했다. 정 씨가 키우는 백구는 수놈이었고, 때가 된 암캐에게 찾아가서 잉태를 시켜주면 나중에 강아지 한 마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 내려온 관례였다. 게다가 정 씨가 키우는 진돗개는 영특하게도 사고를 치지 않아 늘 풀어놓고 키웠다. 동네 사람들을 다 알아보고 꾸벅꾸벅 인사도 잘해서 대접을 받는 개였다. 평소에는 멀쩡하게 들고 다니던 머리를 사람 옆을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신통하게 여겼다. 그런데다 산에서 내려오는 산 짐승을 막아주는 역할도 잘한다.
박 씨는 정 씨가 나가서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일어났다. 미적거리면 착한 이 씨에게 미안한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그냥 혼자 갈 사람이 아니어서 혼자 가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려면 운전대를 잡아야 하니 막걸리를 마시자고 할 수도 없었다.
코 작은 조 씨가 돈 통에 돈을 넣어두고 주방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고 있었다. 막걸리는 일주일에 서른 병씩 지난해부터 경로당에 얼굴도 이름도 알리지 않고 후원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경로당 사람들은 천 원씩 주고 사먹는다. 그렇게 모은 돈은 경로당의 운영자금으로 쓴다.
“맛있게들 들어. 마시고 싶기는 하지만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니 마음만 두고 나는 가네.”
박 씨가 먼저 나간 이 씨 뒤를 따라 현관문을 나서며 말했다. 다시 못 볼 것 같은 얼굴들, 다시 못 올 것 같아 아쉬운 경로당이어서 발걸음이 무겁다. 왜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또 떠오를까,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사이로 코 작은 조 씨가 잘가, 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착하고 부지런한 이 씨는 벌써 차의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경로당을 다닐 때마다 태워오고 태워다 주는 동생인데,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 쓰는 것은 큰 형님같이 넉넉한 사람이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박 씨가 차에 올라타자 착한 이 씨가 물었다.
“일은, 무슨?”
박 씨는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도 이제 지쳐서 눈치라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두 아들이 전화도 안 받은 지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딸은 도리어 죽는 소리가 반인 안부 전화를 마지못해 하는 눈치였다.
“오늘 아침부터 우울해보여서요.”
착한 이 씨가 핸들을 움직이면서 화물차도 천천히 움직였다.
“나야 매일 그렇지, 오늘이라고 더 특별할 게 뭐 있나.”
박 씨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 씨는 좁은 마을길에서 벗어나 신작로에 들어서자 속도를 냈다. 박 씨는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집을 향해 간다는 설렘이나 안정은 느껴본지 오래되었다. 떨림과 불안이 심장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박 씨는 안방구석에 둔 독하다는 제초제 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은 매번 뜨거웠다. 매일 밤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 지도 벌써 달포나 지났다. 나뭇잎들이 바삭바삭 마르기 시작한 가을 초입부터 그랬다. 여름에 사용하려고 사두었다가 남은 제초제를 보는 순간 마시면 죽는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마시고 싶은 충동을 다독이며 안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그날은 겨우 막걸리만 마셨다. 마시다 남은 막걸리와 하얀 사발도 그 옆에 두었다. 자다가 아무 때나 일어나서 바로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이 세상에 미련두지 않고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떠날 거라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가고 싶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길을 떠나야 궁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금니가 저절로 깨물어졌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나면 냉정해졌다. 독한 제초제를 막걸리에 타서 한 잔만 마시면 세상 고민 다 끝난다는 생각까지 하고나면 손이 떨렸다. 막걸리 한잔 마시는 그 짧은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힘들게 잠든 밤마다 악몽을 꾸던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제 그 선택의 순간이 다가와 있음을 아프지만 받아드리고 있었다. 이제 더는 버틸 기력도 없었다.
“형,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드시죠?”
착한 이 씨가 차의 속도를 줄이더니 말했다.
“아녀.”
“나도 오늘은 혼자 밥 먹기 싫어서 그래요.”
이 씨는 박 씨가 내려야 하는 마나리골짜기가 가까워지자 차를 더욱 느릿느릿 몰았다. 가을이 꼬랑지만 남은 산골마을 저녁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입동이 사흘 남았으니 겨울 초입이다.
“밥을 혼자 먹기 싫으면 빨리 과부댁 하나 얻어. 때 놓치면 내 꼴 나.”
“그래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럴 능력이 안 되니 문제죠.”
“나, 내려 줘.”
“집에 가자니까요.”
“아녀, 자네 집에서 밥 먹으면 혼자 걸어오는 게 더 힘들어.”
이 씨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집에서 밥을 지어 먹다보면 어두워질 것이고, 혼자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지 경험하면서 사는 입장이니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칠십 넘은 남자가 외딴집의 불 꺼진 방에 들어서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일 것이었다.
“내말 허투루 듣지 마. 자식들 믿고 살 만한 세상이 아녀.”
박 씨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럴게요. 형님, 식사 꼭 챙겨 드시고 주무세요.”
이 씨의 차가 천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 그 사이의 산골마을 저녁 신작로는 너무 슬픈 색채를 띄운다. 그 회색빛 색채가 오늘따라 유별나게 짙다. 박 씨는 이 씨의 차를 따라 멀리 가 있던 시선을 잡아당겼다. 골짜기로 들어서자 좁은 오솔길이 마치 저승 문턱 같다.
이제 너무 일찍 가버린 아내에게 가야할 때가 되었다. 고생만 하다가 가버린 아내에게 그때 못했던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했다고, 말해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제는 혼자 누워 있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 잠들 때가 된 것이다. 조금 더 망설이다보면 추한 모습밖에 보여줄 게 없다. 살만큼 살았고, 일도 해야 할 만큼은 했다. 자식들 셋이나 세상에 두었으니 모자랐던 부분은 채워줄 것이다. 굳이 해줄 말도 없고, 할 말도 없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손자 녀석들이 눈앞에 밟힌다. 박 씨는 중얼거린다.
이제는 해줄 게 정말 하나도 없는데, 어떡해야 하나…….
이종하 - 1998년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전태일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 『사람의 얼굴』. 중단편 소설집 『가을과 겨울 사이』. 한국작가회의 회원. 리얼리스트100 회원.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사.
- 이전글아라산문/김인자/김인자 시인이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15.07.08
- 다음글신작소설/김세인/웬 아이가 울고 있었다 15.07.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