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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산문/김인자/김인자 시인이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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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2,394회 작성일 15-07-0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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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산문

김인자

시인이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1. 사무엘

발톱이 흔들리는 발을 끌고 킬리만자로를 하산한 후 나는 모든 일정을 접고 사나흘 쉬기로 했다. 그날도 옷을 입은 채 침대로 들었지만 아프리카의 새벽은 여전히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히말라야의 새벽, 따뜻한 짜이 한 잔 침대로 가져다주는 이가 눈물겹도록 고맙듯 누군가 숙소 마당에 모닥불이라도 피워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때 문밖 부겐빌레아 울타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내다보니 게스트하우스 지배인 사무엘이다.

우리는 스와힐리어로 아침인사를 했다. 그날부터 내 방 탁자엔 그가 꺾어다 놓은 부겐빌레아가 투박한 플라스틱 병에 꽂히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꽃은 자리를 지켰고 다다음날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매일 새 꽃으로 바꿔놓는 다는 거. 다른 방엔 아예 꽃병이 없다는 거.

어느 아침 내 방에 꽃을 갈아주고 돌아가는 그에게 마사이족이냐 물으니 키쿠유족이란 답이 돌아왔고 왜 내 방에만 매일 새 꽃을 꽂느냐 물으니 대답을 망설인다.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꽃뿐이 아니라 주고 싶은 것이 꽃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면 착각인가. 낮은 목소리를 가진 그는 예의바르고 침착하고 한 번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차분한 청년이었다. 그와 나는 낙타가 쉬고 있는 들판을 보며 두어 번 차를 마셨고, 한 번은 전구를 사러 40분쯤 걸리는 읍에 따라갔다가 이발하는 시간을 기다려 준 것이 전부였다.

이별, 이거 손 흔들며 눈물 훔치는 거 말고 따스한 눈빛이나 포옹으로 멋지게 할 수는 없을까. 나는 늘 시()의 첫 줄을 고민하듯 세련된 작별의 순간을 꿈꿔왔다. 고백하자면 매번 대본 없는 연극처럼 떨리는 그 순간을 기다렸던 것인데 드디어 떠나는 날이 돌아온 것이다. 사무엘은 내가 언제 떠나는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시간이 되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나는 첫 번째 차를 고의적으로 놓치고 절망적으로 그를 기다렸다. 한참 후 더는 미룰 수 없어 차에 배낭을 실었고 차는 곧 출발했다. 백 미터쯤 전진했을까. 운전기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백미러를 보란다. 나는 내 두 눈과 대책 없이 뛰는 심장을 누를 길이 없었다. 어쩌란 말인가. 반쯤 부서진 백미러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빨간 꽃을 든 사무엘이 꿈결처럼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2. 노인의 지혜

길에서 군옥수수를 팔고 있는 노인에게 사원가는 길을 묻자 무작정 곁에 앉으라며 열손가락을 쥐락펴락 한다. 노인의 수신호를 어찌 알아듣나 고민 하던 차 그 사원에 데려다주겠다는 사이클 릭샤왈랴(자전거꾼)가 거짓말처럼 짠하고 나타났다. 노인의 근심어린 눈빛을 뒤로한 채 나는 마술처럼 젊은 녀석의 꼬드김에 넘어가 폭염 속에서 단 20분이면 갈 거리를 3시간이나 빼앗겼고 그만큼 돈도 썼다.

나중에 알았지만 노인은 그 자리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버스가 있다고 했던 것이고 손가락을 쥐락펴락한 건 10분쯤 기다리라는 신호였던 것인데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노인의 두꺼운 안경 너머의 진심을 읽지 못했던 것,

좌우명처럼 새기는, 곤경에 처할 때마다 지혜로운 해법을 가장 많이 알려 준 첫째 대상은 자연, 두 번째가 노인이란 걸 잠시 잊어서 본 어처구니없는 낭패였다.

다음 날 노인에게 전날 젊은 릭샤왈라가 내게 한 일을 일러바쳤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잘했어, 어제 당신이 릭샤를 타주어서 그의 가족이 밥을 굶지 않았을 테니.” 나는 망치로 한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깨우침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래서 삶은 공평하다. 어제의 희소식도 오늘의 탄식도 모두 다 공평하고 공평한 것이다. <<인도

      

#3. 또 하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좁은 골목에서 빵으로 허기를 채우고 밤늦도록 야외 바에서 맥주와 차를 마시며 사흘 밤낮을 함께 했던 그는 레온에서 만나 레온에서 헤어졌다. 우린 각자 영혼이 얄팍한 순례자의 몸으로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 그곳을 경유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를 뒤쫓았는지 그가 나를 따라왔는지는 알 수 없다. 길을 걷다가 골목 끝에서 마주치거나 내가 미술관을 서성대면 그도 미술관을 서성댔고 내가 성당에 가있으면 어느새 그도 따라왔다. 알베르게(여행자 숙소)에 배낭을 풀고 공동 수돗가에서 그와 마주쳤을 때 어쩌자고 나는 그의 머리칼에 손을 댔을까.

덥수룩한 수염과 목을 휘감던 머리칼, 두고 온 애인이 변심이라도 한 건지. 그가 수돗가 거울 앞에서 뭉텅뭉텅 머리칼을 자르고 있을 때였다. ‘내가 도와줄까?’ 말보다 먼저 나간 손, 그가 엷은 비소로 허락했고 나는 머리칼을 자르기 시작했다. 낯선 남자의 머리를 만지는 동안 두고 온 애인의 머리칼을 생각했다는 걸 그가 알았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는 꽤 그럴 듯하게 손질되었고 거울 속에 번지던 안도와 기쁨을 훔치던 순간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시간이 흐르고 흐른 어느 날 내가 그 순간을 그리워하게 되리란 걸 그는 알았을까. 어느 새벽, 안녕이란 인사 대신 내 방문에 메모지 한 장을 걸어놓고 사라진 그, 내 인생에 또 하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니었을까. <<스페인 산타아고

      

#4. 미카엘의 하쿠나 마타타

32살 미카엘은 네 아이의 아빠다. 그는 백인여행자들이 주 고객인 리조트 앞에서 목조각을 깎아 생계를 잇는 가장이다. 그렇다고 버젓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둥 네 개 세우고 비닐로 하늘을 가린 것이 일터인데 며칠을 지켜보았지만 이 친구 하루 일하는 시간이 아침나절 고작 한두 시간이 전부다. 이유인즉 낮엔 더워서 못하고, 오후엔 졸려서 안 되고, 저녁 답엔 친구들과 호수에 수영하러가야 하고, 마누라 잔소리 땜에 하기 싫고, 막내아들 봐줘야 하니까 안 되고, 마을축제 땐 술 마셔야 하니까 안 되고, 웃기지도 않는 답변으로 일관하는 그는 달변가였다. 가게에 내놓은 조각이 고작 서른 개도 안 되어서 다 팔아도 일이백 불도 채 안될 금액인데다 그도 뻑 하면 친구에게 맡기고 놀러 다니느라 하루 한 개도 팔지 못하는데 어떻게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린단 것인지,

그런데 신기하다. 낙천성 부작용인가, 미카엘은 언제나 싱글벙글이다. 조각을 할 때나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늘 하쿠나 마타타(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노래를 부른다. 어디선가 북이 울리거나 노래가 흘러나오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몸을 흔든다. 점심 안 먹어 배고프지 않냐 하면 원래 그랬으니 상관없단다. 집에 아이들은 누가 돌보냐 물을 때도 아이들은 아내랑 카사바(고구마처럼 생긴 아프리카 인들의 주식) 밭에서 놀거란다.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냐며 내 말에 답도 아예 뮤지컬처럼 노래로 한다. 왜 열심히 일하지 않냐니 그렇게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뭣 땜에 죽어라 일하냐 오히려 반문이다. 이쯤 되면 나도 할 말을 잊고 그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그가 춤추면 나도 몸을 흔들 수밖에 없다.

경제사정과 문화와 인종이 다르니 사는 형편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여지없이 나는 혼란스럽다. 한국은 지상 어디에도 없는 무한 경쟁시스템을 자랑한다. 대부분의 나라는 일몰 전에 상점, 병원, 관공서 등이 모두 문을 닫고 휴식에 들어가는데 우리나라만은 예외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24시간 영업점인데 왜 우리는 24시간을 일해야만 살 수 있는가다. 남보다 더 잘 살고 아이들 잘 가르치고 보다 넓은 집 소유하고.... 이해한다. 그런데 잘살아보자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이 지나치다 못해 삶을 질을 떨어뜨린다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루 대부분을 놀아도 살 수 있는 베짱이 미카엘의 삶이 이상적이란 말은 아니다. 어쩌다 새벽 3~4시에 시내를 경유하다 보면 여전히 택시나 상점들이 불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린다.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 급기야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자각, 혹 냉장고나 명품을 위해, 아니면 고가의 자동차를 위해, 통장의 잔고를 늘리기 위해.... 물론 없으면 불편할 것들이지만 행여 그것이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잉여를 위한 것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신이 일하라고 낮을 만들었다면 밤은 쉬라는 배려아닌가. 나야 어쩌다 한밤중까지 노느라 깨어있었다지만 36524시간 간판에 불을 켜야 하는 고단한 생활자들을 보노라면 급격히 우울해지는 심사를 막을 도리가 없다. 하쿠나 마타타~ 미카엘처럼은 아니어도 조금 천천히 가면 좋지 않을까. <<아프리카 말라위

      

#5. 대장, 나의 조르바

'디드 유 세이 단스(댄스)?'

조르바가 말을 걸어왔다. 느닷없는 이 한 마디에 피돌기가 빨라진 나는 차를 몰고 바다를 향해 가야할 것만 같았다. 많은 청춘들이 그랬듯 젊은 한때 내게도 숱한 영감과 용기를 준 조르바, 바닷가에만 가면 두 팔을 벌려 그의 춤을 따라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조르바를 나는 그리스도 지중해도 아닌 남미 페루,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티티카카호수에서 아만따니섬으로 가는 배 안에서 만났다. 그날 밤 원주민들이 모인 파티장에 나타난 그는 조르바춤이 아닌 겨우 두 손을 들어 폴크로레(페루 민속 춤)를 따라하던 노인이었다.

추억은 얼마나 힘이 센가.

크루즈 여행의 첫 도착지는 그리스 영토 파토머스 섬으로 나는 배에서 내려 땅을 걷는지 허공을 걷는 지조차 잊었다. 생애 첫 여행처럼 별 생각 없이 슬리퍼를 끌고 비탈길을 걸어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파란 돔의 성존스 교회에 도착했다. 그렇게 파토머스 섬 여행은 시작되었고 다음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 출신 작가 카잔차키스가 묻혀있는 크레타 섬이었다. 나는 그가 생전에 써놓았다는 묘비명을 떠올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고 오른 팔을 삐딱하게 치켜든 검은 나무 십자가, 항구에 모여 있는 배조차도 다른 모양새로 약간은 비뚤어져 있거나 헝클어진 채 평화로운, 그래,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라고 쓴 황동규 시인의 시 한 구절도 기억을 되찾았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그의 흔적에 경의를 표하며 나직이 되뇌었다. 길에서 만난 그 많은 조르바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고.

그리고 젊은 시절 조르바가 내게 가르쳐 준 말을 기억해냈다.

밀려오는 먹구름과 소나기를 두려워 말라고, 해일처럼 밀려오는 사랑을 피하지 말라고, 소나기도 사랑도 때가 되면 지나간다고. 마음이 시키면 하는 거라고, 그것이 곧 신의 뜻이라고<<페루, 아만따니 섬

 

 

김인자 - 강원도 삼척 출생,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 슬픈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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