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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김영덕/일진광풍의 데자뷰, 그 기억의 유곡을 찾아서 -정치산 시집『바람난 치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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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영덕
일진광풍의 데자뷰, 그 기억의 유곡을 찾아서
- 정치산 시집 <바람난 치악산>
1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평소 전위적 성향의 시 쓰기를 자주 시도해 온 정치산 시인은 시집『바람난 치악산』의 첫 머리, <시인의 말>에서 ‘폭풍을 몰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휘몰아치는, 소나기 쏟아지기 직전의 미친바람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바람이 났다.’고 고백했다. 한 마디로 적요(寂寥) 직후 일진광풍(一陣狂風)의 패턴에 매료되어 바람이 났다는 것인데, 그 서늘한 이미지는 옛날 사람들의 ‘초인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익숙한 반전의 데자뷰다. 그것은 국면의 극적인 전환일 수도 있고 패러다임이 단숨에 뒤바뀌는 것일 수도 있다. 홀로 산책할 때의 벼락같은 깨달음일 수도 있고, 야구에서 9회말 만루 역전포일 수도 있다. 링 위의 복서가 무수한 잽 공격을 무릅쓰고 상대의 턱 밑으로 들어가 어퍼컷으로 한 방에 승부를 보겠다는 집념의 실루엣도 보인다. 코흘리개 시절 뒤란의 작은 툇마루에서 동무들과 함께 놀던 딱지치기, 계급 높은 쪽이 낮은 쪽을 따먹는 놀이에서 모든 계급에게 다 지지만, 유일하게 제일 높은 계급인 대통령에게는 이길 수 있는 ‘빛나는 일등병’ 패를 감추고 있다가 희희낙락하는 상대에게 불쑥 내보일 때의 그 짜릿하고 자지러질 듯한 통쾌함일 수도 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바람골 깊은 치악에 두고 있는, 치악산 시인인 그녀의 내밀한 로망은 폭풍과 같은 삶으로 일세를 휩쓴 시대의 풍운아일지도 모른다.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골마다 불어대는 바람이었다.
굳은살 박힌 심장이 왈랑 왈랑 두근거리고,
옷자락이 다리를 휘휘 휘감는 감촉이 좋았다.
폭풍을 몰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휘몰아치는,
소나기 쏟아지기 직전의 미친바람이 좋았다.
블랙홀에 빠지고, 토끼 굴에 빠지면서도,
그렇게 불어대는 바람이 좋았다.
그래서 그렇게 바람이 났다.
<2014년 가을 정치산, 시인의 말> 전문
사실 우리말에서 ‘바람’만큼 다채로운 의미로 널리 쓰이는 단어도 드물다. 바람은 기압차로 발생하며, 대기의 대순환에 의해 처음 형성되는 공기의 흐름이다.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사에서도 어떤 사람이 남의 꼬임에 빠지거나, 마음이 들떠 쉽게 호언장담하는 모습을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고 한다. 무나 당근 같은 채소에 물기가 빠져 푸석푸석하게 되었을 때도 ‘바람이 들었다’고 말한다. 남녀관계에서 다른 이성에게 정신이 팔려 놀아나는 모양은 ‘바람이 났다’고 한다. 그 밖에 사교춤에 빠진 춤바람을 위시하여 꽃바람, 신바람, 치맛바람, 댓바람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은 그 쓰임새가 많다. 우리 말 뿐이 아니다. 최근 국내 TV드라마 제목으로도 사용된 영어 ‘왓츠업‘도 바람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에게 ‘웬일이니?, 잘 지냈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영어식 표현인 왓츠업(What‘s Up?)을 원래의 완전한 문장으로 환원해 보면 ‘What’s brought you up here? (무엇이 너를 여기로 데리고 왔니?)’가 된다. 이것은 우리말의 ‘무슨 바람이 불었어?’와 궁극적으로 같은 말이다.
깎아지른 산봉우리에 지팡이 놓고 쉬니
구름 안개 겹겹이 하계를 가로막는데
느지막이 서풍이 백일(태양)을 불어오니
만학천봉이 일시에 드러나네.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다섯 번째 수> 전문
지루한 여름날 불볕더위에 시달려서
등골에 땀 흐르고 베적삼이 축축한데
시원한 바람 끝에 소나기 쏟아져서
얼음발(氷簾)이 단번에 벼랑에 걸리네.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아홉 번째 수> 전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인 김성탄의 ‘불역쾌재삼십삼칙(不亦快哉三十三則)을 패러디하여 ‘스무 가지 유쾌한 일’이라는 뜻을 가진 칠언절구 형식의 연작시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20수(首)‘를 남겼다. 그 중 펀치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섯 번째 수의 ’느지막이 서풍이 백일을 불어오니/만학천봉이 일시에 드러나네‘와 아홉 번째 수의 ’시원한 바람 끝에 소나기 쏟아져서/얼음발이 단번에 벼랑에 걸리네‘ 같은 표현은 정치산 시인의 ’바람난 치악산‘과 그 맥이 닿아있다, 답답한 심경의 극적인 전환이나 무료한 상황의 드라마틱한 대반전(大反轉)이라는 면에서.
2
잘못 발화된 혀들이 걸린다. 길게 휘돌아 딱딱해진 말들이 담긴다. 말랑말랑 풀어진 말들이 그에게 간다. 휘청휘청 그가 휘어진다. 휘돌아진 말들이 입술에 닿는다. 말랑말랑 감긴 혀들이 휘청휘청 휘어져 그의 머리를 감싼다. 굳은살이 벗겨진다. 그의 머리에서 퍼져가는 동심원이 흔들린다. 흔들리던 물결이 울렁울렁 사라진다. 말랑말랑 늘어난다. 그의 시간이 길어진다. 길어진 시간이 휘어져 다시 입술에 닿는다. 그는 말린 혀를 풀무질한다. 말랑말랑한 혀들이 길게 휘어진다. 휘어진 혀들이 그의 심장을 흔들고 간다. 그의 심장이 왈랑 왈랑 쫄깃해진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온다. 울렁울렁 밤이 흔들리고 그의 시간은 환해진다.
<말랑말랑 휘청휘청> 전문
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을 가능성과 관련시켜 해석했다. ‘불안은 가능적인 것에 대한 감정이다. 불안은 인간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아무리 조심해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과 언어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레닌은 ‘모든 언어는 이미 보편화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며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 속에 객관화함으로써, 즉 마음속에서 그것을 끌어냄으로써 인간은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밖에 있는 객체로서 분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산 시인의 시 <말랑말랑 휘청휘청>은 경험의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수단으로써 초현실주의적, 인간정신의 복잡성과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임상 실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정신의 중간지대 사고의 실제 작용으로 어떤 말이나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고 작가는 자동 기술한다는 텍스트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특성인 풍부한 의태어, 의성어를 자유자재로 작동시켜 마음껏 구사하고 있는 이 시는 시적 화자와 ‘그’와의 대화를 텍스트로 사용하는데, 대화를 하면서 격해지는 감정이 급기야 에스컬레이션 되어 ‘잘못 발화된 혀들’이 다행스럽게 화자 의식의 차단 그물에 걸린다. 그리하여 ‘딱딱해진 말들이’ 아닌 ‘말랑말랑 풀어진 말들이 그에게 간다.’ 그러자 ‘휘청휘청 그가 휘어진다.’ 이윽고 ‘그의 머리에 퍼져가는 동심원이 흔들리’며 ‘그의 시간이 길어진다.’ 고 했다. 드디어 ‘그는 말린 혀를 풀무질’하게 되고 마침내 ‘휘어진 혀들이 그의 심장을 흔들고’ ‘그의 심장이 왈랑 왈랑 쫄깃해’지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고 결국 ‘울렁울렁 밤이 흔들리고’ ‘그의 시간은 환해진다.’고 했다. 다분히 문제성 있는 실험적 시 쓰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진을 기대한다.
3
정치산 시인의 연작시 ‘들꽃요양원’에는 모두 마흔 네 개의 병실이 있다. 프로크루테스의 후예나 십자가 장사꾼에 불과한 추악한 종교인들, 대박을 꿈꾸며 공격적 성향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병실은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한 실어증, 피해망상증, 결벽증과 편집증, 불면증을 앓고 있는 이 사회의 온갖 병리현상에 노출되었던 환자들이다. 인생이란 수렵장 같은 야수적 각자도생 사회에서 영육간에 상처입고 쫒기는 짐승처럼 약한 존재들이 들꽃요양원에 머물고 있다. 인생여정의 마지막 은신처에 몸과 마음을 의탁한 군상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이루어 병동을 다시 채운다. ‘막 내린 무대를 다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병동 모습을 시인은 젖은 눈으로 바라본다.
시간이 철썩일 때마다 사람들이 들고 났다. 무의식 속에 꿈을 심던 남자도, 복서의 꿈을 버리지 못해 매일 펀치를 날리던 그도, 밥보다 화장을 더 챙기던 하얀 여인도 벚꽃 따라 피었다 졌다. ‘놀아줘잉’을 반복하던 하얀 소녀와 벽지를 뜯어 설치 미술을 하던 그녀, 똥 벽화를 그리던 그도 떠났다. 열심히 자판기를 두드리며 커피에 매달리던 그는 잠들었고, 술만 먹으면 주위를 시끄럽게 엎어대던 그와 그의 친구는 경찰서로 갔다. 잠시 고요하다. 고요하던 무대엔 사래온 사람들이 나타났다. 고래고래 고래를 찾는 그녀와 음전하게 깽판 치는 그와, 우아한 몸짓으로 밥상을 엎는 그녀와, 사람들을 모으고 막무가내로 욕을 하며 한판 붙기를 시도하는 그들이 경찰을 불러들이고 주먹을 부르며 막 내린 무대를 다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다시 채워지는 병동 – 들꽃요양원·43> 전문
4
건널목을 두고도 철로를 넘는다. 아슬아슬하고 짜릿짜릿한 유년이 다가온다. 금지된 것들을 끄집어들고 유혹의 눈짓을 보낸다.
건널목을 두고도 철길을 넘고, 위험 수위를 넘어 일렁이는 물살에 현기증을 일으키면서 그 거대한 물살의 일렁임에 빠져들던 유년의 기억이 손짓한다. 일렁이는 여울 앞에서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며 자투리로 기워지는 일상을 팽개쳐 본다. 벗어나고 본다.
잠깐 눈 돌린 사이, 잠깐 한 눈 판 사이, 의도하지 않은 낯선 시간 속을 방황했던 짜릿한 스릴이 아련히 스민다. 영화제목처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들을.
<영화제목처럼 – 바람난 치악산·8> 전문
시인은 이 시의 화자를 통하여 ‘내게 금지된 것들을’ ‘영화제목처럼 나는 소망한다’고 했다. 그리고 ‘일렁이는 물살에 현기증을 일으키면서 그 거대한 물살의 일렁임에 빠져들던 유년의 기억이 손짓한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든 중년에도 일탈을 꿈꾸는 욕망은 남아있는 법이다.
어떤 행위를 허용할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 허용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통치자를 영어로는 룰러(ruler)라고 한다. 룰러는 눈금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요컨대, 통치자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자(ruler)를 들이대는 사람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1970년대까지도 이 땅의 비루한 거리에서 경찰관들이 지나가는 청춘남녀의 머리카락 길이와 무릎 위의 치마 길이를 재는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심지어는 즉석에서 장발 단속한다며 가위로 싹뚝 자르거나, 남의 머리카락에 함부로 바리깡(Barriquand et Marre)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분해서 저항하면 바로 즉결처분을 받고 유치장에 갇혔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의 삽입곡으로 나온 송창식의 노래 ’왜불러‘가 인기를 얻던 매우 거칠고 엄혹했던 철권통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한 영혼에게 가해지는 억압이자 폭력인 ’금지‘가 터무니없는 공권력처럼 외부에서만 오는 것일까? 우리 삶 안에서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선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작용하며, 자발적으로 강요당하는 ’금지‘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추억의 연탄난로와 김 서린 유리창,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바람찬 초겨울 저녁의 쓸쓸한 길목에서 ’금지된 것들을 끄집어들고 유혹의 눈짓을 보‘내오는 정치산 시인의 ’유년의 기억‘에 기꺼이 동참해 보는 것은 어떨까?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快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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