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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김영덕/인천에는 한국문학의 로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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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
김영덕
인천에는 한국문학의 로망이 있다
인간생활의 모든 측면에 가격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치환하는 자본주의가 그 치명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심화, 확산, 구조화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상을 추구하느라 세속의 때가 덜 묻은 한 개인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로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의 사전적 의미는 ‘낭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 또는 낭만주의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낭만’이라는 한자 개념어는 사실 일본에서 만들어져 이곳 인천항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수입된 박래품이다. 수백년간 지속되던 막부시대를 종식시키며 굳게 닫혔던 나라의 빗장을 열고, 왕정복고를 통해 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왔던 일본의 청년 메이지국왕은 서양을 보고 배우기 위해 서둘러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 각국에 보냈다. 18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서유견문록’을 쓴 유길준이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직후 민영익을 수행, ‘보빙사(報聘使)’로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출발하기 10년 전이다. 이와쿠라 사절단 일행은 귀국하여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유의미한 기여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서구의 최신 학문과 문화를 한자어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테오 리치 등 유럽의 가톨릭 사제와 선교사들이 중국에 파견되어 전도를 하며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 라틴어 성서를 한자로 번역하여 전파하는 일에 종사했다. 이들은 가톨릭을 천주교라고 번역했는데,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동양의 유,불,선 세계관의 경계에서 이 분야 지식인들이 고심했던 흔적들은 많다.
다시 19세기 일본으로 돌아가, 당시 메이지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번역작업에 몰두했던 지식인들은 서구의 수많은 개념어 가운데서도 Society(사회)나, Happiness(행복), Roman(낭만) 같은 단어에 이르러서는 실로 난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동아시아인들이 지향해 보지 못한 개념들이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단 한 번도 인간의 심리가 지향해 보지 못한 사물에는 명사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어휘의 자료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의미의 체계에 띠라서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만(浪漫)’이라는 어휘는 프랑스어 ’로망(roman)의 일본어 발음인 로망(ロマン )에서 유래된 신조어다. ‘로망’의 사전적 의미는 ‘12세기 중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주로 기사도(騎士道)를 다룬 허구적 설화 양식‘이다. 프랑스어 로망은 영국으로 건너가 ‘로맨스’가 되었다. 역시 동아시아의 사고에는 그런 것이 없었으므로 일본의 젊은 번역자들은 임의로 로망의 일본어 음역에 시각적 이미지를 가진 두 글자 '로'와 '망'을 사용해서 단어를 만들었는데, 매우 절묘하다. 물결 로(浪)에 질펀하게 흘러넘칠 망(漫)을 사용함으로써 이미지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연 것이다. 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이 한자 개념어를 우리말로 읽으면 낭만이 된다.
인천사람들에게 낭만은 햇살 좋은 초여름 날 오후, 자유공원 벤치에 앉아 서해를 바라보며 뱃고동소리 듣는 것이다.
인천은 개항 이후 ‘서울의 관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다. 여기서 자의식 강한 인천사람들은 미묘한 심리적 갈등에 빠지기도 한다. 이 땅의 수도 서울과 함께 거론된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인천은 결국 서울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한계와 그에 따른 비루함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천 지역문학의 활성화와 저변 확대, 그리고 한국문학과의 연계를 위하여 뜻 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아라문학’이 창간된지 이제 햇수로 삼년이 되었다. 우리들의 작은 열정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언젠가 멋진 결실을 맺어 후학들로부터 ‘개항 130년만에 인천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인천의 로맨티시스트들이 마침내 한국문학의 활성화와 저변 확대, 그리고 세계문학과의 연계를 완성해냈다.’ 라는 평가를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낭만’은 이제 새로운 기항지를 찾아 자신의 고향을 떠나왔다. 인천은 항구다. 인천에는 한국문학의 로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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