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대표시 9편
페이지 정보

본문
대표시 9편
이영춘
시간의 저쪽 뒷문 외8편
어머니 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던 날
천 길 돌덩이가 가슴을 누른다
“내가 왜 자식이 없냐! 집이 없냐!” 절규 같은 그 목소리
돌아서는 발길에 칭칭 감겨 돌덩이가 되는데
한때 푸르르던 날 실타래처럼 풀려
아득한 시간 저쪽 어머니 시간 속으로
내 살처럼 키운 아이들이 나를 밀어 넣는다면
아, 아득한 절망 그 절벽……
나는 꺽꺽 목 꺾인 짐승으로 운다
아, 어찌해야 하나
은빛 바람결들이 은빛 물고기들을 싣고 와
한 트럭 부려놓고 가는 저 언덕배기 집
생의 유폐된 시간의 목숨들을
어머니의 시간 저쪽 뒷문이 자꾸
관절 꺾인 무릎으로 나를 끌어당기는데
—《시와사람》 2011년 봄호
패, 저 붉은 얼굴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문학과창작》 2011년 가을호
바람의 집.1
그가 떠난 빈 집 마당에 차를 세워 놓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통째로 저당 잡힌 내 동생의 집, 서까래에선 바람이 윙윙 늑대처럼 울었다 여기저기 붙은 붉은 딱지, 그가 토하고 떠난 핏덩이처럼 뭉클뭉클 구름덩이로 치솟아 올랐다 그가 남긴 흔적처럼, 목소리처럼 빈 소주병과 농약병이 웅웅댔다 누런 달빛이 그의 눈동자인 양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누나, 이제 그만 돌아가!’ 그의 손길이 어느새 내 등을 토닥거리고 사라졌다 적막이 그의 목소리로 꺽꺽 울어댔다
나의 엔진은 오래도록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시평》 2013년 여름호
컵라면
오글오글한
머리들이 모여 있다
혹은 웃는 듯도 하고
혹은 우는 듯도 한
그 얼굴들은
마치 내 동생이
직공 생활을 하면서
야간 학교를 마치던
마산 어느 공단의 여공들 얼굴 같아서
감히 나는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목줄기가 배배 꼬여진다
마치 내 동생의
피와 살이
내 건강한 폐부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아서.
-《현대문학》 1991년 1월호
슬픈 도시락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혼자 먹는 밥,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 속을 들여다볼 때면
그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서 묻어나는 그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싸우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 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빼곰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현대시》1999년 5월호
들풀ㆍ1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바람 센 언덕을 가 보아라
들풀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슴 떨고 있는 언덕을.
굳이 ‘거실’이라든가
‘식탁’이라는 문명어가 없어도
맑은 이슬로
이슬처럼 해맑게 살아가는
늪지의 부리들.
때로는 비오는 날
헐벗은 언덕에 알몸으로 누워도
천지에 오히려 부끄러움 없는
샛별같은 마음들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늪지의 마을을 가 보아라
내 가진 것들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한 순간.
-《월간문학》1987년 7월호
저문 강, 하늘 문
사흘 낮 사흘 밤을 공수拱手로 서 있던 싯다르타가 걸어나간
바라문의 경계가 저런 것이었을까
어둠이 내리는 강 이 쪽에서 하늘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저 강 능라의 능선,
물기둥 한 쪽이 하늘 끝 한 자락을 끌고 내려와
광목 홑이불로 펼치려는 찰나의 저 능선,
죽음의 경계로 들어가는 문이 저리 반짝일 수 있을까
세상 한 쪽에서는 한여름 밤의 아리아가 흐르고
나는 내 잃어버린 꿈 하나
아리아 속에서 *피가로의 부치지 못한 편지로 운다
바라문을 떠난 나의 싯다르타는 돌아오지 않고
황량한 그 발걸음만 바람으로 흐르는데
강은 어느 새 하늘 문을 닫은 듯
깊은 어둠으로 세상 귀를 닫는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노래’변용
-《시와세계》2011년 가을호
밤의 데몬DEM0N*
다리가 긴 황새처럼 나는 늘 허기가 진다 무언가를 기다리다 지친 다리의 종족, 어둠과 어둠 사이에 끼여 몸이 작아지는 형벌의 종족, 내 다리는 언제쯤 불 밝힐 것인가 꽃이 진 상처의 자리 늘 뜨겁다 황새의 깃은 보이지 않고 꽃잎 상처로 일렁이는 이 밤의 데몬, 데몬은 밤공기를 타고 어둠을 퍼 나른다 잠든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어둠의 어깨에 얹은 내 손가락이 기운다 기울어진 손가락 한 끝으로 새들의 혼을 불러와 이 밤 어딘가에 등燈 하나를 단다 그러나 온 우주의 정령이 물그림자로 업혀 오는 이슬 안개, 안개의 한 쪽 귀가 흔들린다 누가 흘리고 간 눈물일까 빗물일까 강이 길게 한숨을 토한다
*그리스어 ‘정령精靈’의 뜻으로 차용.
-《시와 표현》2013년 가을호
와디wadi의 바람
어느 사막에 몸 눕혀야 할까 숨 쉬는 순간마다 목 조이는 바람, 바람의 사슬, 사슬의 길이만큼 내가 온 길은 지워지고 길을 잃는다 불 꺼진 벌판, 잃어버린 한 쪽 다리는 어둠을 켜듯 아득히 허공에 걸려 있다 허공과 허공 사이에 끼인 내 몸은 점점이 얼음 조각이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면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숨 쉬는 계곡마다 바람이 인다 바람에 갇힌 눈 먼 산새 한 마리 대낮 한복판에 누워 허공을 밟고 간다 내가 나를 찾지 못한 바람의 바퀴,그 어둠의 바퀴들이 내 심장을 밟고 간다 내가 없다 없는 나를 데리고 사막을 건너간다 사막의 한 중심에서 흰 발목 하나 보인다 하늘에 걸려 있는 발 하나 암호처럼 환상처럼 별들을 지우고 간다
-《천년의시작》2014 겨울호
- 이전글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신작시 3편 15.07.09
- 다음글권두칼럼/김영덕/인천에는 한국문학의 로망이 있다 15.07.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