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신작시 3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3편
이영춘
월담 외2편
아파트 아래층 정원에서
살금살금 하늘줄기 타고 올라온 나팔꽃 한 송이
우리 집 베란다 창틀에 두 팔 걸치고
슬금슬금 내실을 살핀다
고것 참 이상도 하다
우리 집엔 소녀도 처녀도 없는데
꽃등 위에 엎드려 며칠을 속살거리던 햇살
오늘 그 햇살의 아이들이 색색의 입술로
하늘하늘 손 흔들며
우리 집 창틀에 매달려 하얗게 웃고 있다
독거노인
내 이웃에 혼자 사는 한 노인
점심때가 되면 울밖에 나가
솟대처럼 서 있다
하루 한 끼 동사무소에서 자원봉자자가 갖다주는 도시락,
그 밥이 고마워 연신 도시락에 대고 인사를 하는데
“평생 마누라 배도 제대로 못 채워주고 살다간 남편보다 나으이!”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담!---어디 있어!---
누룽지 같이 꺼끌꺼끌한 손가락 펴
“나랏님 잘 되라고 나라도 빌어야제, 그래야 내가 배불리 먹지!”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고맙다는 말, 입에 달고 사는 노인
나는 하루 세 끼 먹는 내 밥이 부끄러워 뒷짐 지고 하릴없이
내 집 마당을 어슬렁거리는데
클로토의 베틀
어둠의 날개들이 불을 켜고 달려온다 천 개의 날개가 달린 알바트로스, 천 개의 눈이 달린 모이라이*. 내 어둠의 날개 어디만큼 비켜 갈 수 있을까 알바트로스의 깃털, 깃털 같은 길 보이지 않는다 어둠의 손, 어둠의 날개 밤마다 퍼덕인다 아트로스*의 거역할 수 없는 가위손, 운명의 손이 어둠을 퍼 나른다 어둠이 불꽃으로 튄다 불꽃 연기 하늘에 닿는다 아트로스의 가위로 내 어둠을 잘라낼 수 있다면 불 밝히고 누울 나의 집, 나의 동굴 환하겠다 지붕 없는 그 집, 길 없는 그 집, 사방이 꽉 막힌 내 자유의 해방구다 해방구 한 쪽으로 알바트로스의 날개 퍼덕인다 그 집에 이르는 길, 돌 속에서 꽃을 피우듯 절름거리며 간다 암호처럼 별처럼 일렁이는 산 그림자 지우며 간다 저무는 산길에 산 꿩 한 마리 날아간다 흰 눈 내려 산길을 까맣게 지운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들
- 이전글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시론 시의 발자국을 되돌아 본다 15.07.09
- 다음글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대표시 9편 15.07.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